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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최근엔 일본인 연예인이 이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긴 하지만 한국인에게 '강남'은 영욕의 이름인 듯합니다. 얼마전 압구정 신현대아파트의 경비원 자살 사건, 그리고 싸이가 부른 '강남스타일'의 조롱 섞인 가사에서 드러나듯 강남은 졸부와 빈부격차를 상징하는 이름이면서 동시에 부촌의 대명사인 타워팰리스 같은 고급 주택이 자리잡고 있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본사가 있는 이곳에 취업대기자들이 줄을 선다는 점에서 선망의 땅이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강남은 '돈'입니다. 서울에서 강남구 예산이 가장 많고, 그만큼 인구도 많으며 범죄도 많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 트렌드가 있고 권력이 있고 욕망이 있습니다.


<강남 1970>의 원제는 <강남 블루스>였습니다. 처음 이 제목을 들었을 땐 할 말이 참 많겠구나 싶었습니다. 인간의 욕망이 팔딱거리는 강남은 이야기의 보고이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제목이 <강남 1970>으로 바뀌었을 땐 뭔가 정형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1970년에 강남 개발계획이 발표되었으니 미국의 서부시대 개척사처럼 강남을 개발해가는 과정 속에 꿈틀대는 욕망과 비극이 펼쳐질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강남 1970>은 제목에서 느껴지는 어떤 고정된 이미지와 싸워야 하는 영화였습니다.


유하 감독은 데뷔 때부터 강남을 무대로 한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말죽거리 잔혹사> 등 그는 유년기를 보낸 강남이 창작의 원천이었노라고 곧잘 말합니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할 것은 그가 데뷔한 당시의 강남과 지금 강남의 차이입니다.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나왔을 때 강남은 졸부들이 돈 자랑하며 거들먹거리는 곳이었고 오렌지족의 놀이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남은 굳건히 갇힌 성벽 같은 곳입니다. 예전엔 누구나 큰 마음 먹으면 한 번쯤 진입하리라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지금은 로또나 당첨되어야 강남에 집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0년 전 트렌디한 영화의 무대로 등장하던 강남이 지금 오히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돈과 욕망의 상징으로 등장한 것은 적확한 해석으로 보입니다.



영화의 두 주인공인 김종대(이민호)와 백용기(김래원)는 넝마주이 생활을 하는 전쟁 고아입니다. 두 사람은 조폭이 되면서 권력자들의 하수인이 됩니다. 그들은 성공에 근접하는 것 같지만 결국 권력자들에게 이용당하고 맙니다. 유하 감독은 <비열한 거리>에서도 그랬고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그랬듯이 결코 주인공들이 욕망을 실현하도록 돕지 않습니다. 그대신 그 욕망을 짓밟습니다.


종대는 땅을 갖고 싶어하고 용기는 돈을 좇습니다. 이 욕망은 본능적이라기보단 다른 사람에 의해 투영된 욕망입니다. 바로 두 전현직 국회의원과 중앙정보부장, 룸살롱 마담 등의 욕망을 대신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대와 용기의 욕망은 탐욕스럽다기보단 오히려 순수하게 보일 지경입니다. 그들은 다른 인물들에 섞이지 못 하고 겉돕니다. 권력의 하수인이 대리전을 펼치는데 이들은 모두 자신이 언제 죽을 지를 모릅니다. 아쉬운 것은 영화를 잘 만들었다면 종대와 용기의 최후에서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나야 하는데 <강남 1970>은 서사를 쌓아올리는데 집중하느라 그 정도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헬기를 타고 강남 일대 논밭을 돌아보는 스펙터클로 시작해 터널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시적이고 웅장한 엔딩으로 마감하는 영화 <강남 1970>의 야심은 어쩌면 코폴라의 <대부>나 스콜세지의 <갱스 오브 뉴욕> 같은 에픽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동생의 결혼 상견례 장면과 종대가 영등포파를 치는 장면을 교차편집한 것은 <대부>를 떠오르게 하고, 호시탐탐 복수를 노리고 양기택 밑에서 생활하는 백용기는 <갱스 오브 뉴욕>을 떠오르게 합니다. <갱스 오브 뉴욕> 역시 지금 미국에서 가장 부자동네인 월스트리트가 150년 전 가장 가난한 동네이던 시절이 배경인 영화였죠. 그러나 <강남 1970>은 스토리를 따라가는데 급급해 서사시를 만드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 합니다. 다중플롯으로 씨줄과 날줄을 엮기에만 바빠 두 주인공의 운명이 비극으로 마감하는 정당성을 관객에게 설득시키지 못 합니다.


<타짜>를 연상시키는 기차 살해 장면, 열차 터널에 대한 구태연한 메타포, 진부한 여성 캐릭터 등 <강남 1970>에 대해 지적할 점은 많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희한하게도 이 영화가 싫지 않았습니다. 유하 감독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 같아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요즘 상업영화로 이렇게 감독 인장이 흥건히 묻어난 영화 찍기 힘들잖아요. 오랜만에 작가주의 상업영화의 출현이랄까요. <비열한 거리>에서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and Wise'를 천호진이 멋들어지게 부르는 장면을 기억하고 있고 좋아하는 필자로서 이 영화에서 비록 올드할지언정 프레디 아길라의 'Anak'이 반복되며 흘러나오는 장면에서 편안하게 영화에 동화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또 1960년대말 서울 한강다리를 CG로 재연한 장면, 일주일간 촬영했다는 묘지에서의 진흙탕 패싸움처럼 몇몇 장면은 분명히 기억할 만합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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