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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6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수상한 그녀>. <미녀는 괴로워>의 할머니 버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었는데요. 저도 영화를 보면서 많이 웃긴 했지만 썩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장면은 도저히 웃을 수 없기도 했어요. 영화가 개봉한지 석달 정도 지난 지금, 불편했던 지점들을 한 번 짚어보려 합니다.


1. 윤리적인 긴장


<미녀는 괴로워>는 단순히 뚱뚱하고 못생긴 여자가 예쁘고 날씬한 여자로 재탄생하는 이야기였기 때문에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윤리적 고민이 끼어들 여지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수상한 그녀>는 다릅니다. 할머니가 젊은 여자가 된 것에서 머문 것이 아니라 하필이면 그녀가 손주와 친구가 되면서 단순히 세대 갈등 문제을 넘어 근친상간의 위험수위를 넘나듭니다. 영화 속에는 고백하려는 손주의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는 것으로 희화회되고 있지만 가족영화치고는 제법 복잡한 계산을 하게 하는 설정이죠. 물론 이런 설정은 1980년대에 이미 <백투더퓨쳐>에서 마이클 J 폭스가 자신의 엄마와 사랑에 빠질 뻔한 이야기로 다뤘던 것이라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백투더퓨쳐>에서 마이클 J 폭스가 박사에게 엄마 이야기를 털어놓음으로서 그 지점을 영화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갔다면, <수상한 그녀>는 두리뭉술하게 회피합니다. 관객은 혹시나 손주가 오두리를 여자로 보면 어쩌나 걱정하지만 오두리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 아무 이야기도 던지지 않을 거면서 쓸데없이 윤리적인 긴장만 낭비하다가 마는 것이죠.


2. 모든 것의 보수화


<수상한 그녀>는 바디 체인징 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바뀌는 영화들은 대개 '공감'에 방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청년 세대와 공감하고, 남자가 여자를 이해하고, 아이가 어른을 다시 보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통합의 메시지를 주려는 목적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스토리입니다. <수상한 그녀>의 차별점은 가족코드에 있습니다. 핏줄이 우선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가족이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거죠. 사실 청춘사진관에서 오말순(나문희)이 오두리(심은경)로 변했는데 아무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면 오두리는 그저 오두리로 살아가면 됩니다. 만약 그랬다면 뱀파이어 스토리의 또다른 변형이었겠죠. 그런데 오두리에게 가족이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굳이 박씨 할아버지(박인환)의 하숙집을 찾아가고 그에게 정체가 들통나고 맙니다.


어쨌든 여기까지는 그럴 듯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의 코드에 맞추느라고 모든 것이 보수화된다는 것입니다. 메탈리카 사운드에 88만원 세대의 절망을 담아 노래하던 반지하밴드는 갑자기 '나성에 가면'을 부르며 양복을 입은 건전밴드로 거듭나고, 기존의 신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새로운 가수를 찾아다니던 한승우PD(이진욱)는 오두리의 보컬만 취하고 작곡은 기성 작곡가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영화는 가족은 화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로 드는 것은 단지 그들이 한 핏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손주에게 수혈해주고 할머니로 돌아가는 오두리의 선택이 그걸 상징적으로 대변해줍니다. 이런 한국적 상황이 느낌으로 이해는 되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공허합니다. 고부갈등에 속앓이하던 며느리 애자(황정민)가 오말순을 견딜 수 있게된 것은 결코 두 사람이 서로에게 공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저 서로의 부재 속에서 뒤늦게 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캐릭터인 반하나(김슬기)는 오두리가 오말순으로 돌아간 후 오두리의 자리를 차지하는데 오두리와 반하나 사이에는 같은 핏줄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연결고리도 없습니다. 영화가 그만큼 허술하다는 증거입니다.


'핏줄이 댕긴다'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화가 21세기에 만들어져 크게 히트할 수 있다니, 그만큼 한국사회도 굉장히 보수화되었나 봅니다. 하긴 독재자와 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그 딸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가 됐으니까요.


3. 신데렐라 스토리


오두리는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라이징 스타입니다. 그녀가 스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속의 사회가 복고풍을 유행으로 받아들인 때문이겠죠. 전라도 사투리를 할머니처럼 쓰는 젊은 여자라는 캐릭터는 분명 특이하긴 할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을 파독 광부로 보내 잃고, 홀로 외아들을 키우며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고 살아온 전형적인 한국인의 할머니를 대표하는 캐릭터이기에 그녀가 스타가 되는 삶은 많은 관객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아들 반현철(성동일)이 오두리가 어머니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녀에게 떠나라고 말할 때일 것입니다. 아들은 젊음을 되찾은 엄마에게 이제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달라고 말합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에서 화자가 뒤늦게 엄마의 삶을 깨달은 것과 같은 맥락이죠. 개인적으로 저도 그 장면에서 오두리가 떠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그녀의 피를 뽑아냅니다. 신데렐라처럼, 12시가 지났기 때문에 돌아가야한다는 것인데 이 장면에서 신데렐라는 오두리에게 참 야속한 이야기의 원형일 것입니다. 왜 그녀는 또다시 자신을 희생해야 할까요? 이진욱으로 상징되는 왕자님은 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영화는 캐릭터를 지나치게 정형화된 틀 안에 가두면서 상상력을 차단합니다. 그래서 <수상한 그녀>는 참 나쁜 영화입니다.



4. 몸이 바뀌는 이야기


마지막으로 <수상한 그녀>처럼 몸이 바뀌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변형되어 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시초는 아마도 1988년작 <빅>일 것입니다. 어른이 된 아이 톰 행크스는 회사에서 아이같은 독특한 상상력으로 능력을 인정받는데 점점 성숙한 어른이 되어가죠. 한국에서는 동명의 드라마 <빅>이 2012년 제작됐지만 어른이 된다는 설정만 비슷할 뿐 줄거리는 전혀 달랐습니다.


1988년에 할리우드에서 또 하나의 바디 체인징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바로 <18 어게인>입니다. 81세 할아버지와 18세 소년의 몸이 바뀌고난 뒤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영화입니다. 이런 종류의 영화가 1988년에 연속해서 나오기 시작한 이유는 아마도 레이건 정부 말기 사회는 보수화되고 신자유주의로 양극화 문제가 대두되는 시점에 사회통합의 메시지가 절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후 세대간의 바디 체인징을 넘어 남녀의 몸이 바뀌는 야릇한 상상을 하는 섹시 코미디 영화들이 등장했고, 중년이 된 두 남자가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보는 영화들이 만들어져 중년의 삶을 응원하기도 했습니다. 남녀의 몸이 바뀌는 영화로 <핫칙>(2002), <보이걸씽>(2009) 등이 있고, 한국에서는 정준과 김소연의 몸이 바뀌는 <체인지>(1996)가 거의 선구자적으로 만들어졌고 한참 뒤 드라마 <시크릿 가든>(2010)이 좀 더 우아하게 시도했죠.


중년의 삶이 바뀌는 영화로는, 성공했지만 고단한 삶을 사는 변호사와 자유분방한 포르노 배우, 두 동창생의 몸이 바뀌는 <체인지 업>(2011)과 13년 전 나의 또다른 삶으로 돌아가는 <패밀리맨> 등이 떠오릅니다. 그밖에 20년 전으로 돌아가 고등학생이 되는 남자이야기 <17 어게인>(2009), 아빠와 딸의 몸이 서로 바뀌는 일본 드라마 <아빠와 딸의 7일간>, 돈 많은 노인과 야심만만한 청년의 바디 체인징을 스릴러로 풀어낸 <더 게임>(2007) 등이 떠오르는군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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