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놀랍게도 주요 배역을 맡은 네 명의 배우가 모두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메릴 스트립,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 에이미 아담스, 비올라 데이비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주연이 아니라 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됐네요. 또 놀랍게도 넷 중 아무도 수상하지 못했어요. 신기하죠? 한 명만 주면 다른 배우가 섭섭해 할까봐 그랬나요?


메릴 스트립은 케이트 윈슬렛(<책 읽어주는 남자>)에게,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은 히스 레저(<다크 나이트>)에게, 에이미 아담스와 비올라 데이비스는 페넬로페 크루즈(<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에게 양보해야 했습니다. 원래 연극인 <다우트>를 기획하고 영화로 각색한 존 패트릭 셰인리는 각색상 후보에 올랐지만 2009년의 영광은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사이먼 뷰포이가 차지했죠. 뭐, 꼭 오스카를 받아야 좋은 영화인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상을 비켜간 데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아카데미 위원들의 성향이 아니거나 혹은 완성도가 2% 부족하거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후자입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오히려 원작 연극으로 보는 게 나앗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배우들의 연기를 연출이 전혀 받쳐주지 못 합니다. 훌륭한 각본을 써놓고도 고리타분한 클리셰로 분위기를 망치고 있습니다. 감독 존 패트릭 셰인리는 톰 행크스 주연의 1990년작 <볼케이노> 이후 한 번도 영화 연출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인데요. 그동안 연극을 하거나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고 하네요. 그런데 비슷한 주제와 비슷한 규모의 유명 연극인 <대학살의 신>이 로만 폴란스키에 의해 얼마나 멋지게 영화로 옮겨졌는지를 떠올려보면 <다우트>의 만듦새는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더 입체적이었어야 할 주제를 너무 단순화시켜 버렸어요.



이야기의 주제는 '의심'입니다. 셰인리는 애초에 부시 정부가 아무 증거도 없이 이라크 전쟁을 벌이는 것을 보고 작은 소품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가 배경으로 택한 곳은 1964년의 뉴욕 브롱크스의 한 교구학교입니다. 원칙주의자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와 자유분방한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먼)는 애초부터 잘 맞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종교라는 명목으로 '사랑'을 설교하고 있지만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맞춰가면서 살 수는 없죠. 알로이시스는 플린이 손톱을 길게 유지하는 것, 학생들에게 유한 것 등이 마음에 들지 않고 플린은 알로이시스가 지나친 엄격함으로 학교를 중세시대의 감옥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합니다. 둘 사이의 중재자는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로 그녀는 순수하고 유약한 외모를 하고 있지만 필요할 땐 자신의 신념을 드러낼 줄 아는 내적 강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여성입니다.


갈등은 한 흑인 학생과 플린 신부가 어떤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알로이시스가 의심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영화는 케네디 암살을 언급하면서 배경이 1964년임을 살며시 드러내고 있지만 사실 언제가 배경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흑인 아이라는 설정은 일종이 '맥거핀'일 뿐 이 영화는 인종차별이나 성적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가 반에서 따돌림 당하는 흑인이라는 사실은 알로이시스가 의심을 키우는 계기로서만 작용하고, 당시 사회 전반적으로 시민 권리를 주장하는 움직임이 퍼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플린의 행위를 납득시키는 재료로서 기능합니다.


사건이 커지는 것은 알로이시스라는 인물의 완고함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알로이시스가 없었다면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녀 앞에서 플린은 한낯 피해자에 불과합니다. 영화는 초반에 플린이 정말로 아이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는지를 궁금하게 만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아이의 엄마(비올라 데이비스)가 플린을 두둔하며 알로이시스를 나무라기까지 합니다. 이제 문제는 알로이시스가 그것을 용납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로 넘어갔습니다. 알로이시스의 작은 의심은 심증이 되고 심증은 다시 확신이 되어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플린는 자신에게 뒤집어씌워진 의심의 덫을 벗어나려 해보지만 빠져나가려 할수록 덫은 더 세게 조여와 견딜 수 없습니다. 아카데미가 메릴 스트립만을 주연상 후보에 올리고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을 조연으로 본 것은 그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의심 속에 세상을 살아갑니다. 영화 속에서 플린이 언급하는 것처럼 험담은 칼로 찌른 베개와 같아 한 번 터진 베갯속은 다시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믿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의심의 싹이 트기 시작하면 물을 주지 않아도 자꾸만 자라서 결국 믿음의 뿌리마저 썩게 만듭니다. 알로이시스처럼 뒤늦게 후회해봐도 결국 남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 뿐이죠. 알로이시스는 제임스에게 자신이 의심을 하게 된 계기를 '연륜'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나이 들어 모든 것을 꿰뚫게 됐다는 착각이었죠. 그러나 착각에서 시작된 의심의 끝은 불행이었습니다. 제임스는 의심하는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알로이시스는 결국 왈칵 눈물을 터뜨리고 맙니다.


영화의 결말은 열려 있습니다. <더 헌트>의 주인공이 한 아이의 거짓말이라는 증거를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아서 불행에 빠졌다면 <다우트>는 한 사람의 맹목적인 자기 과신이 어떻게 스스로를 불행의 길로 몰아가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우트>의 내러티브와 주제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세련되지 못한 화술은 영화가 명작이 될 뻔한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습니다. 긴장감이 필요할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고, 어김없이 기울어진 화면 구도가 등장하고, 대사에 맞춰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립니다. 연극에서는 통했을지 몰라도 영화에서라면 지나치게 편협한 연출이 아닐 수 없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