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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이 등장한 시기는 1987년입니다. 미국이 레이건 정부 피로감에 휩싸여 있던 시절입니다. 영국에서는 대처리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던 시대입니다. 공공 서비스를 사기업이 접수하는 '민영화'는 미국인들에게도 공포였나봅니다. <로보캅>은 그 반작용으로 등장했습니다. 민영화를 극단으로 밀어붙인 미래사회라는 상상의 세계가 바로 인간과 로봇이 하나 된 미래의 경찰로 등장한 것입니다.


2014년 <로보캅> 리메이크 개봉에 앞서 1987년 폴 버호벤의 <로보캅>을 복습했습니다. 다른 SF 영화와 달리 <로보캅>은 에드워드 노이마이어와 마이클 마이너의 오리지널 스크립트입니다. 에드워드는 폴 버호벤의 <스타쉽 트루퍼스>의 각본을 쓰기도 했습니다.



다시 본 <로보캅>은 참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예리한 정치적 함의들을 깔끔하게 히어로 무비의 근육 속에 녹여냈습니다. 단순한 SF 액션으로만 즐기기에 아까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미래 디트로이트입니다. 도시에서 경찰력을 운영하는 OCP(Omni Consumer Products)라는 대기업은 디트로이트를 '델타시티'라는 유토피아로 변화시키려는 야심찬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자 상태인 경찰의 효율성을 높여야 합니다. OCP의 직원이기도 한 경찰관들은 이에 반발해 파업을 하려 합니다.


이름만 델타시티일 뿐 사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이 도시는 디스토피아 그 자체입니다. 미디어 통제, 극심한 빈부격차, 군사 무기까지 갖춘 갱들, 권력 부패, 기업 내 권력다툼, 탐욕 자본주의, 민영화, 환경오염, 사람을 죽이는 기계 등 고담시를 능가하는 암울한 곳입니다. 여기에 OCP는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기계로 만든 경찰을 등장시킵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기계와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 본성에 대한 주제까지 이야기의 층위를 넓혀갑니다.



"우리는 24시간 일할 경찰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먹고 잠잘 필요도 없는 경찰, 월등한 화력을 지닌 경찰을 개발했습니다."


부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딕 존스(로니 콕스 분)가 ED-209를 소개하며 하는 말입니다. OCP 중역회의실에서 ED-209는 경찰에 투항한 인간을 죽이는 실수를 저지르는데 그 이유가 어이없게도 총 놓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문에 딕이 권력서열에서 밀려나고 로보캅 프로그램의 책임자인 로버트 모튼(미구엘 페러 분)이 급부상하게 됩니다. 그뒤 이야기는, 모두 아는 것처럼, 알렉스 J. 머피(피터 웰러 분)라는 경찰이 갱들에게 죽임을 당하자 로버트가 그를 로보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로보캅에게는 네 가지 규칙이 있는데 이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과는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로봇 3원칙'이 인간과 로봇 간의 관계를 규정해 무조건 인간에게 복종하게 한 규칙이었다면 로보캅에게 주어진 규칙은 경찰로서의 규칙입니다. 공공의 질서 유지와 법을 수호하는 규칙입니다. 좋은 법이든 나쁜 법이든 로봇은 법을 수호하는데 이용될 수도, 악용될 수도 있습니다.


비밀에 감춰진 네번째 규칙은 후반부에 드러나는데 (워낙 오래된 영화니까 공개하자면) OCP의 임원을 체포하게 되면 작동을 멈춘다는 것입니다. 이또한 앞으로 인간이 로봇을 개발하게 되면 어떻게 사용하게 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규칙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 웨어러블 컴퓨팅이나 사이보그가 점점 이슈가 되고 있고 개발이 되고 있는데 로봇 기술이 발달할수록 더 성능이 뛰어난 로봇을 가진 사람이 결국 권력도 갖게 될 지 모릅니다. 이런 윤리적인 문제가 반드시 불거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로보캅은 인간과 기계의 합성입니다. 인간의 뇌에 기계의 손과 가슴, 다리를 부착했습니다. 만약 먼 미래에 죽지 않는 '슈퍼 휴먼'이 만들어진다면 그는 로보캅과 같은 모습일 지도 모릅니다. 물론 로보캅처럼 딱딱한 철로 만드는 대신 부드러운 실리콘 같은 재료를 이용하겠지만요. 이런 '인간-기계'는 자신을 인간으로 인식할까요, 기계로 생각할까요?


처음에 로보캅은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주어진 명령에 따라 범죄를 소탕하기 위해 행동할 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트라우마가 그를 자극합니다. 갱단에게 총 맞아 죽던 순간의 악몽이 죽어 있던 기억을 깨운 것이죠. 도움을 준 사람은 그의 부인이나 아들이 아닌 동료 여자 경찰관 앤 루이스(낸시 앨런 분)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러브라인이 있던 것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의 동료애는 의아하면서 한편으로는 궁금합니다. 부인과 아들은 죽은 머피를 떠나버린 것으로 나오고 동료 여자 경찰관을 파트너로 만든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요?



인간이었던 자신의 죽음을 알게 된 로보캅은 자신을 죽인 갱단 두목 클레어런스 보디커(커트우드 스미스 분)를 찾아나섭니다. 영화의 후반부, 경찰에게 총격 받고 도망간 한 폐기물 공장에서 그는 쓰고 있던 헬멧을 벗습니다. 그리고 거울을 봅니다. 자크 라캉은 아이가 거울 단계를 거치며 스스로를 자각하게 될 때 비로소 상상계를 넘어 언어와 문화로 이루어진 보편적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이행한다고 했습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기계가 된 머피는 스스로를 인식하고 비로소 정체성을 찾습니다. 그전까지의 로보캅이 기계 그 자체였다면 지금부터의 로보캅은 인간이 컨트롤하는 기계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OCP 중역회의실에 다시 들어선 로보캅에게 회장(댄 오헐리히 분)이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로보캅은 "머피"라고 말합니다. 비로소 '인간-기계'는 자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보통 인간의 이름은 남들에게 불리워질 때 자각하게 되고,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단계로 나아가면서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이 가능해집니다. 로보캅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는 것은 이 사회에 머피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델타시티는 모든 것을 민영화한 도시입니다. 경찰력을 비롯해 OCP는 군사용 무기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민영화된 경찰들은 자신이 공공의 영역에 속해 있는지 혹은 사기업의 월급쟁이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효율성만 중시하는 고용주에 맞서 그들은 파업을 결정합니다. 경찰이 파업하자 델타시티는 헬게이트의 문이 열린 것처럼 난장판이 됩니다. 갱들은 서로 총질하고 가게를 부수고 차를 폭발시킵니다.


그러나 델타시티의 TV뉴스에는 이런 폭동이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멕시코의 위기나 다른 지역의 우스갯거리가 뉴스가 될 뿐입니다. 지역뉴스는 로보캅이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정도로만 소개됩니다. 중간중간 맥락없이 등장하는 광고는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서 가장 어이없는 산물을 풍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생 광고를 보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1987년의 할리우드가 상상한 이 암울한 미래 도시의 모습을 현대 사회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OCP에게 해고는 죽음을 뜻합니다. 로보캅은 딕을 잡기 위해 회장에게 제안을 합니다. 그러자 회장은 딕을 해고시키고 비로소 로보캅은 그에게 총을 쏠 수 있게 됩니다. 악당을 처단하는 장면이긴 하지만 해고 이후 자사 로봇이 곧바로 실업자를 죽여버린다는 점에서 섬뜩하게 다가온 미래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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