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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영화 흥행 톱10 중 무려 8편이 한국영화다. 중소배급사의 1200만 관객 영화가 탄생했고 900만 영화도 두 편이나 나왔다. 900만 관객대 영화가 탄생한 건 사상 처음이었는데 1000만 문턱에서 흥행이 멈춘 것은 그만큼 배급사나 극장이 예전보다 계산기를 더 두드린다는 반증이다.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1000만 돌파할 때까지 상영기간을 늘렸을 것이다.


영화시장 규모는 점점 커져서 사상 최초로 2억 관객을 돌파했고 극장 요금 인상도 이루어졌다. 관객들이 한국영화에 몰린 덕분에 그동안 외국영화에 비해 차별받던 극장 부율 문제가 한국영화 제작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개선됐다. 오히려 최근엔 할리우드 영화가 배급에 역차별을 겪는 현상까지 벌어져 20년 전 영화시장 개방을 반대한 영화인들이 극장에 뱀을 풀던 시대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올해 개봉한 영화의 흥망을 좌우한 10가지 특징을 뽑아봤다.



1. 알뜰해도 잘 만들면 통한다


최근 개봉한 <변호인>이 첫 주말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중소배급사 NEW가 올해 배급사별 점유율 1위에 오를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지난 2008년 배급사별 점유율이 집계된 이후 줄곧 CJ가 1위를 지켜왔던 것을 감안하면 올해는 NEW의 해다.


NEW가 배급한 <7번방의 선물>(1281만명) <숨바꼭질>(560만명) <감시자들>(550만명) <신세계>(468만명) <몽타주>(209만명) <변호인>의 공통점은 알뜰한 제작비에 만듦새가 뛰어나고 메시지가 분명한 영화들이라는 것. 다른 배급사가 극장과 밀월관계로 스크린 독과점 논란을 부른데 반해 NEW는 극장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NEW의 성공은 고무적이다. 직원 20여명에 불과한 NEW의 성공비결은 작은 조직의 빠른 의사결정이었다. NEW는 <뫼비우스> <무게> 등 다른 배급사가 외면한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이밖에 <더 테러 라이브>(557만명) <소원>(270만명) 등도 적은 예산으로 관객의 마음을 빼앗은 영화들이다. <소원> <박수건달>(389만명) <공범>(176만명)처럼 트렌드를 따라가기보다는 작아도 확실한 시장을 노리는 상업영화의 전략도 여전히 유효하다.


2. 돌아온 스타감독보단 신인감독


<전설의 주먹>의 강우석, <감기>의 김성수, <미스터 고>의 김용화, <남쪽으로 튀어>의 임순례, <고령화가족>의 송해성은 오랜만에 돌아왔지만 스타일을 구긴 감독들이다. 할리우드 진출 1호작을 내놓은 <스토커>의 박찬욱과 <라스트 스탠드>의 김지운은 많은 응원을 받았지만 흥행 성적은 시원찮았다. 돌아온 스타감독 중 명성에 비례한 성공을 거둔 감독은 <설국열차>(934만명)의 봉준호와 <베를린>(716만명)의 류승완 정도다.


오히려 올해 한국 영화계를 뒤흔든 감독은 재능과 패기를 갖춘 신인 감독들이었다. <더 테러 라이브>의 김병우는 시청률 지상주의에 한방을 날렸고, <숨바꼭질>의 허정은 아파트로 대표되는 신분사회에 경종을 울렸으며, <연애의 온도>의 노덕은 헤어진 연인의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리얼하게 표현해 남녀관계를 재조명했다. 또 <감시자들>의 김병석 조의석은 세밀한 액션으로 통했고, <변호인>의 양우석은 뚝심 있는 드라마로 호평받았다.


3. 스케일 승부는 여전히 불안하나 멀티캐스팅은 된다


순제작비 450억원의 <설국열차>, 108억원의 <베를린>은 성공한 반면, 225억을 들인 <미스터 고>, 130억원의 <타워>, 99억의 <감기>는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특히 <미스터 고>의 실패는 뼈아팠다. 김용화 감독은 지난 4년 간 고릴라의 털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덱스터 스튜디오라는 회사를 차리면서까지 매달려 결국 풀3D로 야구하는 고릴라를 재현했으나 관객은 외면했다. 고릴라가 야구한다는 판타지를 관객이 받아들이지 못했고, 중국인 소녀 주인공을 낯설어한 것이 흥행참패의 이유였다.


반면 작년 <도둑들>에 이어 올해도 멀티캐스팅은 통했다. <신세계> <관상>(913만명) <감시자들>은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한꺼번에 캐스팅했다. 스타들의 '떼샷'이 등장하는 영화는 '극장용 영화'라는 인식을 낳으며 관객을 끌어모았다.


4. 할리우드는 사이즈가 문제다


흥행 톱10 중 한국영화가 아닌 영화는 <아이언맨3> <월드워Z> 뿐이다. 50위 내에서도 <나우 유 씨 미: 마술사기단>과 <컨저링>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다.


관객들이 기꺼이 극장 티켓을 구입하는 영화는 스케일이 큰 영화와 윤리적으로 불법 다운로드 받기 꺼림칙한 한국영화 정도로 압축됐고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고착화되고 있다. IPTV와 VOD 시장이 커지면서 영화의 극장 개봉과 디지털 부가시장 등록 사이의 홀드백 기간이 줄어들고 있는 것도 중저예산 외국 영화가 극장에 걸릴 자리가 점점 줄어드는 이유다.


5. '잉여' 세대가 스크린에 떴다


청춘영화는 항상 시대를 반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청춘영화는 지금 살고 있는 청춘이 아니라 90년대의 청춘을 다루는 경우가 많았다. <건축학개론> <응답하라 1994> 등이 그랬다. 변화는 독립영화 진영에서 먼저 시작됐다. 88만원 세대가 스스로의 자화상을 '잉여'라는 단어 속에 녹여낸 것이다. <잉투기> <잉여들의 히치하이킹> <네버다이 버터플라이>는 올해 호평받은 독립영화들이다. 상업영화에선 <고령화가족>이 잉여 가족을 담았다. 더불어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한윤형, [잉여사회]의 최태섭 등 '잉여'를 파헤친 책들과 전문가들도 등장해 주목받기 시작했다. 과거의 청춘들이 자본주의의 틀에 갇히기 싫어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찾기를 갈망했다면 지금의 청춘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자신 없이도 돌아간다는 두려움 속에 비자발적으로 잉여가 된다. 과거 낭만을 불러일으켰던 `백수'라는 단어가 지금의 잉여와 전혀 다른 이유다.


6. 조폭은 가고 간이 돌아왔다


<베를린> <은밀하게 위대하게> <동창생> <용의자> <붉은 가족>의 공통점은 북한 첩보요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는 간첩을 친숙하게 그리기 시작했다. 올해는 그 경향이 절정에 달한 해다.


간첩 캐릭터의 부상은 그동안 한국영화의 단골 캐릭터였던 조폭의 침체와 맞물린다. 조폭 영화는 제작편수가 줄어 올해 <신세계> <친구2> <박수건달> 정도만 만들어졌다. 조폭 캐릭터도 변화를 거듭해 요즘 조폭 영화의 특징은 더 스타일리시해지고 선악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전 조폭 영화가 조폭을 우스꽝스럽게 그리며 친근감을 표현했다면 요즘 조폭은 멋있게 등장한다. 하정우, 이정재, 황정민, 주진모, 김우빈 등 시대의 대표 얼굴이 캐스팅된다. 그러나 <친구2>와 <박수건달>은 예전 방식의 조폭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케이스다. <친구2>(297만명)는 지방에서 흥행몰이를 했고, <박수건달>(390만명)은 조폭 코미디 시장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7. 재개봉 영화의 새 시장이 열렸다


중장년층 관객 증가, 디지털 부가시장 확대, 복원기술의 진화, 저렴한 판권과 마케팅 비용 등으로 재개봉 영화 시장이 커지고 있다. 추억의 영화를 찾는 사람들은 예전의 자신과 만나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3D로 재탄생한 <몬스터 주식회사> <니모를 찾아서> <쥬라기 공원>은 수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 <러브레터> <레옹> <시네마 천국>은 향수를 자극했고,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러브 액츄얼리>는 10주년 기념판이 새로 만들어졌다.


8. 웹툰 영화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요즘 충무로 PD들을 만나면 다들 웹툰 이야기다. 웹툰 시장이 뜨면서 독자에게 검증된 콘텐츠를 스크린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늘고 있다. 유명 웹툰 작가는 첫 회를 올리자마자 영화 판권을 계약하기도 한다. 그동안 웹툰 원작 영화는 많았지만 다들 흥행성적은 고만고만했는데 올해 <은밀하게 위대하게>(695만명)가 처음으로 웹툰 원작으로 흥행 대박을 쳤다. 하지만 김수현의 스타파워가 흥행 원동력이어서 작품성에서는 아쉽다는 평이 많았다. 또다른 웹툰 원작 영화인 <전설의 주먹>(174만명)과 <더 파이브>는 부진했지만 웹툰을 소재로 한 <더 웹툰: 예고살인>(120만명)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공포영화로는 5년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전반적으로 웹툰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작업은 아직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다. <목욕의 신> <신과 함께> 등 내년의 라인업이 더 기대된다.


9. 더 심해진 스크린 독과점


극장가에 두 가지 풍경이 있다. 멀티플렉스에는 한 편의 영화가 모든 상영관을 점령하고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반면 다양성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은 한정된 스크린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 관객의 취향에 맞춰 회차마다 다른 작품을 상영한다. 낮에는 주부와 시니어를 위한 영화, 저녁에는 직장인을 위한 영화를 트는 식이다. <설국열차> <은밀하게 위대하게> <아이언맨3>는 독과점 논란에 휩싸이며 다른 영화 볼 기회를 차단한 덕분에 흥행질주를 한 영화들이다. 인터넷에는 "볼 게 없어 <은위> 봤다"는 말이 떠돌아다녔다. 그런가하면 <마지막 4중주> <로마 위드 러브>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14만명) <우리 선희> 등은 다양성영화로 묶인 한정된 상영관 수에도 불구하고 큰 사랑을 받은 영화들이다. 과거 왕가위 감독의 영화는 전국에서 와이드 개봉했지만 올해 그의 신작 <일대종사>는 다양성영화에 속했다. 한국영화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속하지 않는 영화의 설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이처럼 특정 영화가 스크린을 독식하면서 좋은 영화를 극장에서 보기 힘들어진 것이 영화 관객 2억명 시대의 그림자다. 흥행 순위 20위까지의 매출 비중은 무려 56%에 달하는데 이는 올해 개봉한 영화 835편 중 불과 2.4%가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영화계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지고 있다.


10. 뻔한 답습은 외면받았다


<마이 리틀 히어로>(18만명) <분노의 윤리학>(22만명) <배우는 배우다>(11만명)는 처참한 흥행 성적을 기록한 영화들이다. <깡철이>(120만명) <런닝맨>(140만명) <노브레싱>(35만명)도 기대 이하였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다들 어디서 본 영화들의 재탕이라는 것. 흥행작을 우려먹으려는 안일한 시도는 외면받는다. 영화 홍보에 기존 미디어보다 SNS를 통한 입소문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세상이다. <그래비티>(318만명)처럼 새로운 영화나 <어바웃 타임>처럼 관객의 취향에 맞는 영화는 홍보를 많이 하지 않아도 관객이 먼저 알아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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