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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정보를 지금처럼 많이 접하기 힘들던 20년 전만 해도 '아카데미 수상작'이라는 홍보문구는 흥행과 직결됐다. 수상작들은 어김없이 관객을 끌어모았고 영화를 안 보던 사람들도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만큼은 챙겨봤다. 그 영화를 안 보고서는 대화에 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영화가 대세인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아카데미 수상작들이 흥행과 직결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제외한 외화는 관객이 100만 명 들기도 쉽지 않다. 할리우드 영화가 역차별을 거론하며 극장 상영 보이콧을 하기까지 하니 격세지감이다. 영화 시장은 점점 양극화돼 중박 영화는 없고 쪽박과 대박만 남았다. 이른바 '밴드 웨건' 효과가 더 강해져서 사람들은 사람들이 많이 보는 영화만 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시즌이 돌아왔다. 아카데미 수상작들의 흥행 '약발'이 예전 같지 않긴 하지만 여전히 아카데미 시상식은 현존하는 미국 최고의 '쇼' 중 하나다. 해마다 2월 마지막주 일요일 저녁에 열리던 시상식이 올해는 3월 2일(현지시간)로 잡혔다.


올해 가장 많은 부문 후보에 오른 영화는 <아메리칸 허슬> <그래비티>(이상 10개 부문) <노예 12년>(9개 부문)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노예 12년>과 <아메리칸 허슬>이 나란히 드라마 부문과 코미디 부문의 작품상을 수상했었다.


<노예 12년>은 1840년대 북부 뉴욕주에서 자유인으로 살던 한 흑인이 납치돼 노예제도가 여전히 존재하는 남부 루이지애나주에서 12년 간 노예로 살아남은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한 남자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차분하고 담담하게 그려낸 세련된 연출력이 돋보인다. 영국 출신의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은 대영제국 훈장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미술가였는데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뒤 단 세 번째 작품만에 아카데미 유력 후보에 오르는 재능을 발휘했다.


<아메리칸 허슬>은 1970년대 FBI와 사기꾼이 합작해 부패 정치인을 구속시킨 일명 '앱스캠 스캔들'을 영화화했는데 시종일관 경쾌하고 개성 뚜렷한 인물들의 조화가 장점이다. '진짜'가 되고 싶었던 '가짜'들의 블랙코미디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과는 또다른 미국을 보여준다. 감독은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으로 작년에도 아카데미 시상식의 여러 부문 후보에 올랐던 데이비드 O. 러셀이다.


두 편 모두 작품상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잘 만든 영화지만 수상작은 하나 뿐이다. (아카데미 85년의 역사에서 공동수상은 일곱 차례에 불과했다.) 작품상과 함께 주요 부문별 유력 후보를 살펴보자.



작품상 - 노예 12년 vs 아메리칸 허슬


2010년부터 작품상 후보가 늘어나면서 올해는 9편이 후보에 올랐다. <노예 12년>과 <아메리칸 허슬>이 '투톱'이지만 <그래비티>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주 배경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적 없다는 것이 아킬레스건이다. 전례가 없기는 <노예 12년>도 마찬가지다. 흑인 감독의 영화가 오스카 작품상이나 감독상을 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메리칸 허슬>이 받게 될까? 하지만 <노예 12년>에 담긴 '자유를 향한 의지'라는 미국식 가치관은 전통적으로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선호하는 주제다. 20년 전 <쉰들러 리스트>에 작품상을 안겨주며 유태인 스티븐 스필버그를 위로했던 아카데미의 전례를 보건데 오바마 시대에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이 흑인 감독 영화에 투표하는 것을 망설이지는 않을 것 같다. 만약 <노예 12년>이 수상한다면 지금까지 한 번도 아카데미 트로피를 받지 못한 브래드 피트가 제작자로서 처음으로 무대에 오르게 된다.



남우주연상 - 매튜 매커너히 vs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후보는 다섯 명이다. 그중 누가 받더라도 생애 첫 남우주연상이 된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생애 최고의 연기를 선보였다. 충혈된 눈으로 돈에 미친 사기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매튜 매커너히는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에서 무려 20kg을 감량하고 에이즈 환자를 연기했다. 탄탄하던 근육은 온데간데 없고 갈비뼈가 드러난 모습으로 등장해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맞서 싸웠다. 두 사람과 함께 <아메리칸 허슬>의 크리스찬 베일도 있다. 2년 전까지만해도 배트맨이었던 이 남자는 대머리에 볼록한 올챙이배를 가진 중년 남자로 돌아왔다. 일부러 살을 찌워서 충격적인 변신을 해낸 거다. 남우주연상을 한 명에게만 줘야한다는 것이 이번 시상식에서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인데 개인적으로는 매튜 매커너히가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신경질적이면서도 무심한 듯한 그의 표정 연기는 누구도 따라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우주연상 - 케이트 블란쳇 vs 산드라 블록


이번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은 가장 예측하기 쉬운 부문이다.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이 압도적이다. 그 역할은 케이트 블란쳇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우아함과 속물의 이미지를 동시에 가진 여자, 한없이 처량한 인물임에도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된장녀'를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래비티>의 산드라 블록이 경쟁자가 될 수 있겠으나 그녀는 우주복에 가려진 시간이 너무 많아 연기를 평가하기엔 한계가 있다.



감독상 - 알폰소 쿠아론 vs 데이비드 O. 러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보통 감독상은 작품상을 받은 영화의 감독에게 주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올해는 예외가 될 확률이 높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아무래도 보수적인 아카데미가 <노예 12년>에게 작품상과 감독상을 몰아주는 파격은 피할 것이라는 점. 둘째,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영화의 비전을 <그래비티>가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가장 유력한 감독상 후보는 <그래비티>의 알폰소 쿠아론이다. <아메리칸 허슬>의 데이비드 O. 러셀도 자격 있는 경쟁자이지만 올해에는 대진운을 탓해야 할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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