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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유독 잘 만들어지지 않는 장르가 있습니다. 바로 SF입니다. 그나마 만들어진 몇 편의 영화들도 대개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디워>와 <설국열차>가 최근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SF 영화들이지만 <설국열차>는 한국에 SF로 알려졌다기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지와 한국인 감독에 대한 애정으로 성공한 경우죠. 애국심 마케팅에서 <디워>는 더 심했었습니다.


한국에서 SF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는 이유는 한국인들이 SF를 좋아하지 않아서일까요?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습니다. 영화의 트렌드는 문학에 후행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영화에 앞서 문학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에서 SF 장르문학의 시장 규모는 무척 작습니다. 독자층이 얇기 때문에 아서 클락, 필립 K 딕, 아이작 아시모프 등 유명 작가만 소개될 뿐 그외 작가들의 신작은 잘 소개되지도 않습니다. 한국 작가 중엔 배명훈, 김창규, 이영수 등이 있지만 한정된 독자층을 갖고 있습니다. 진 울프, 존 발리,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존 크라울리, 사무엘 딜레이니, 토마스 디쉬 같은 이름들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일본에는 꾸준히 번역서가 출간되는 SF의 대가들이지만 한국에는 거의 한 권도 번역되지 않았습니다.


<열한시>


그런데 가만,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할리우드 대작들은 대개 SF 영화인데 한국인이 SF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의아하다고요?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영화들은 SF 장르여서 성공했다기보다는 다른 요소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를 들어, <매트릭스>는 슬로우 액션, <어벤져스>는 캐릭터, <트랜스포머>는 로봇, <이티>는 드라마, <터미네이터>는 특수효과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는 식이죠. 어쨌든 모두 SF영화이니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이 영화들은 대부분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순수한 SF 장르영화가 한국에서 흥행에 성공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뭅니다. 심지어 <스타워즈>나 <스타트렉>의 흥행 성적도 한국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한국에서 SF가 잘 안 될까요? 영국의 문화이론가인 테리 이글턴은 "문화는 사회의 거울"이라고 했습니다. 문화가 사회를 반영해 사회 전체가 거울 앞에서 끊임없이 연기를 하게 됐다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한국에서 SF(Science Fiction), 즉 공상과학이 흥하지 않는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과학이 홀대받는 이유와 맞물려 있습니다. 과학자가 되려면 밥 굶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해야 하는 사회에서 과학적 상상력이 자라나기 힘들고 또 그것을 인정받기도 쉽지 않습니다.


SF는 축적이 필요한 장르입니다. 공상과학을 실제인 것처럼 믿게 만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컨텐츠가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될만큼 쌓여야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누군가 "미래엔 이럴 거야" 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걸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그 가상의 미래 위에 캐릭터가 살아가고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점점 그럴듯한 미래라고 생각하게 되겠죠. 그 미래는 현재의 거울이 될 수도 있고 과거와 통하는 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은 어릴적부터 억압된 사회환경에서 자라왔습니다. 군사독재와 민주항쟁을 겪으며 현실 속의 거대악과 싸워야 했습니다. 또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매몰되어 당장 힘겨운 오늘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이런 굴곡진 역사가 어쩌면 과학적 상상력의 토대를 빼앗아갔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시간여행을 다룬 TV 드라마가 조금씩 만들어지고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조선시대 왕세자나 선비가 현대시대로 오고(<옥탑방 왕세자> <인현왕후의 남자>), 현대의 의사가 고려시대(<신의>)와 조선시대(<닥터 진>)로 가기도 합니다. 워낙 파란만장한 역사를 겪었던 때문인지 역사가 이랬으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 하에 영화(<2009 로스트 메모리즈>)와 소설([리턴 1979])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서 그때의 나를 바꾸면 지금의 나는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이 바탕이 된 이야기(<나인 - 아홉번의 시간여행> <언니가 간다>)는 지금의 나를 바꾸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공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작품들에서 시간여행은 과학적 상상력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상상력에 더 가깝습니다. 과학적인 타임머신 보다는 초자연적인 타임슬립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장소를 발견해 그곳을 통과하거나 혹은 "눈 떠봤는데 과거이더라" 하는 식입니다. '타임슬립'은 필립 K 딕이 [화성의 타임슬립](1964)에서 처음 소개했고, 무라카미 류의 [5분 후의 세계](1994)를 통해 한국에 알려졌는데 과학보다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시간여행을 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더 가까운 용어입니다.


현실세계에서도 타임슬립을 경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주로 아침에 잠 깨기 전에 꿈과 현실을 혼동해 많이 겪습니다만 특이하게도 실제로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거나 혹은 과거를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존 티토라는 사람은 2000년 자신이 2036년 미래에서 온 군인이라고 주장하며 여러 예언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환각 증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은 과학적인 서사가 바탕에 놓여야 하는 SF와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과학적 픽션의 SF라기보다는 초자연적 픽션의 SF(Supernatural Fiction)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스토리도 미스테리 혹은 로맨틱코미디나 멜로드라마가 대부분입니다.


<열한시>


최근 개봉한 <열한시>는 반가운 한국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본격적으로 타임머신을 다루고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과학자이고 그들은 타임머신을 연구하다가 미래로 갑니다. 연구원들은 러시아의 기술을 빌려와 타임머신을 만듭니다. 그래서 기계의 이름도 비운의 혁명가에서 따온 '트로츠키'입니다. 블랙홀 내 웜홀을 지탱해줄 네거티브 에너지 변환기술을 개발했다는 것도 그럴 듯하고, 현대 기술로는 먼 미래로 갈 수 있는 에너지가 부족해 딱 24시간 뒤로만 이동할 수 있다는 설정도 납득할 만합니다. 과학적 사실성을 위해 국내 블랙홀 연구 권위자인 한국천문연구원 박석재 박사에게 자문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광식이 동생 광태> <시라노; 연애조작단> 등 그동안 로맨틱코미디에서 말랑말랑한 심리 묘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온 김현석 감독의 모험적인 시도인데 "할리우드의 공식을 답습했다"는 평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새로운 타임머신을 구현한 시도 자체는 높이 사줄 만합니다. 다만 그동안 영화 속에서 과학자 캐릭터가 드물었다보니 기존의 김현석 영화의 인물들이 연구복을 입고 나온 듯 캐릭터의 선명함이 부족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과연 타임머신은 실제로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과거로는 불가능해도 미래로는 갈 수 있을 거라고 했고, 수학자 괴델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고안하기도 했습니다. 1988년 캘리포니아공대의 물리학자 킵 손은 '웜홀' 이론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현재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타임머신 이론입니다. '웜홀'은 과학자들에 의해 연구중이라고 하는데 아직까지 이론이 현실이 되기엔 많은 장벽이 남아 있습니다.


웜홀을 연구하고 있는 애리조나주립대 비욘드 연구소 폴 데이비스 소장은 시공간을 왜곡해 180도로 휘게 하면 이 휘어진 4차원의 공간을 접어 두 시간대를 연결해 통로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만약 웜홀이 개발된다고 해도 현단계에선 아주 작은 아원자 입자 만이 웜홀에 탑승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물리학자인 로날드 말렛 코네티컷대 교수는 웜홀이 아닌 아인슈타인의 빛의 원리를 이용해 또다른 타임머신을 디자인하고 있다고 하네요. 언젠가 미래에 타임머신이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타임머신은 더이상 SF의 영역으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다가 우주에서 조난 당하는 <그래비티>를 더이상 SF 영화라고 구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경우겠죠.


미국에서 웜홀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어린 시절 보았던 <스타트렉> 같은 SF가 진로를 정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합니다. SF 소설이나 영화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커서 과학자가 되어 로봇과 우주선과 웜홀을 연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학과 영화가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과학자가 이것을 현실로 만드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전 한 국내 기업의 TV 광고 중에 "아이들에게 과학자의 꿈을 돌려 달라"는 카피의 광고가 있었죠. 과학에 대한 투자에 인색한 한국에서 아이들이 과학자의 꿈을 꾸게 하려면 SF가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의 현실 너머에 뭐가 있는지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모처럼 물꼬를 튼 <열한시> 이후 한국영화에 계속해서 SF가 등장하길 기대해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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