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는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1990년대를 관통하는 문화 키워드에 왕가위가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서태지가 문화 대통령이었다면 왕가위와 무라카미 하루키는 문화부 장관쯤이었을까. 겉치레를 싫어한 하루키는 고위 공무원이 되는 것을 꺼렸겠지만 왕가위라면 자신이 재량권을 갖는 범위에서 수락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재량권이란 바로 자신만의 스타일과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은 영화 <화양연화>에는 1958년 상하이에서 태어나 홍콩으로 이주했던 왕가위 감독의 자전적인 삶이 녹아 있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동경하듯 왕가위에게 '화양연화'는 1962년 홍콩이었다.


역사에서 1960년대 홍콩은 경제가 막 부흥하던 시기였다. 1946~1949년 제2차 국공내전으로 공산당이 승리하고 장제스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패퇴하자 이에 위기를 느낀 상하이의 자본가들과 국민당 지지자들이 영국 식민지인 홍콩으로 이주했다. 영화는 1962년 홍콩의 한 작은 건물에 첸(장만옥 분)과 차우(양조위 분)가 동시에 이사오면서 시작한다. 바로 옆 방이어서 두 사람의 이삿짐이 서로 엇갈리는 장면은 앞으로 이들이 마주하게 될 운명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좁은 공간에서 좁은 화각으로 두 사람의 일상이 보여진다. 신문사의 편집기자인 차우는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며 무협소설을 쓴다. 첸은 무역회사의 비서로 주로 타자를 친다. 각자 부인과 남편이 있지만 출장이 잦아서 두 사람은 건물 안에서나 거리에서나 곧잘 단둘이 마주친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1960년대를 회상할 때 떠올릴 만한 정형화된 인물들이다. 박제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차우는 포마드 기름을 발라 가지런히 고정시킨 머리에 넥타이 맨 양복을 입고 다니고, 첸은 올림머리에 목까지 감싸는 치파오를 입고 다닌다. 이들은 관습에 얽매여 사는 사람들임과 동시에 자기 자신과의 약속에 충실한 인물들이다. 첸은 곧잘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잖아요." 또, 차우에게 일탈이라고는 캄보디아 앙코르 사원에 가서 구멍난 천년 고목에 비밀을 속삭이는 것 정도다. 이처럼 꽉 막힌 채 살아온 남자와 여자가 돌연 사랑에 빠졌으니 두 사람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윤리적인 고민으로 인해 밤잠이나 제대로 잤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두 사람의 내면 갈등에는 큰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느냐 보다는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순수했고 아름다웠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이별연습을 하는 장면에서도 슬픔은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고, 차우가 싱가포르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동안 벌어졌던 사건들과 불면증으로 보냈을 시간들보다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 느낀 감정에 더 집중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단지 1960년대의 아름다운 이별 이야기가 아니라 1999년의 어느 시점에서 1962년의 그들을 추억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좋았던 한때를 회상한다는 점에서 ‘응답하라 1962'쯤 될까. 그래야 첸이 왜 줄곧 화려한 치파오만 입고 다니는지, 차우가 왜 그렇게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만 등장하는지 설명이 된다. 두 사람은 현재를 통해 반추한 기억 속 그들의 완벽한 모습인 것이다. 마치 졸업앨범에 실린 잔뜩 꾸미고 찍은 사진을 통해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과 닮았다.



그러나 기억은 종종 왜곡된다. 기억 속에서 시간은 뒤틀린다. 느리게 가기도 하고 갑자기 빨라지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뒤틀린 시간을 인지하도록 돕는 것은 무역회사에 걸린 원형시계가 아니라 첸이 입은 다양한 모양의 치파오다. 의상이 바뀌어야 비로소 우리는 영화 속 배경이 다른 시간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감독은 영화에서 사건을 과감히 생략한 반면 특별한 순간들은 황홀하리만치 지연시켜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 리듬은 현재의 기억이 만들어낸 과거의 리듬이다. 심장박동처럼 둥둥거리는 4분의 3박자의 ‘유메지의 테마'가 흐르면 시간이 한없이 늘어진 슬로모션 속에서 첸과 차우는 좁은 거리와 복도에서 서로 마주치거나 혹은 엇갈린다. 누구나 기억 속엔 자신만의 뮤직비디오가 있다. 첸과 차우에게도 그렇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면을 보자. 카메라는 차를 마시는 그들을 절대 투샷으로 잡지 않는다. 각각의 옆모습을 따로 잡고 패닝한다. 핸드백과 넥타이에 관한 대화는 지루하리만치 공허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 관계라는 사실을 공유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불륜이라는 짐작보다는 두 사람이 그 짐작을 '공유'한 것이다.


사라지는 담배 연기와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등장하고 이어진 다음 데이트에서 두 남녀는 식당에서 고기를 먹고 있다. 이때 처음 투샷이 등장한다. 같은 화각에 나란히 놓인 그들은 각자의 고기를 오물오물 씹고 있다. 차우는 첸의 접시 한켠에 겨자를 놓아준다. 그러자 첸이 말한다. "부인이 겨자를 좋아하셨나봐요?" 그녀는 자신이 그 겨자를 찍어 먹는다. 마치 자신이 차우의 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첸의 이 돌발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은 이전의 상황을 의심하게 만든다. 혹시 두 사람의 배우자가 실제로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배우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이야기를 지어낸 것은 아닐까. 실제로 핸드백과 넥타이와 일본 출장을 제외하고는 배우자들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그 증거들도 이들이 나중에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오래된 기억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시키지 않던가.



그와의 만남에 그녀는 수줍게 고개 숙였고

그의 소심함에 그녀는 떠나가버렸다.


두 사람은 강하게 끌리고 있고, 또 서로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 표현을 자제한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습이 두렵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종종 엿보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관찰하는데 이는 곧 사람들이 그들의 관계를 훔쳐보는 시선이다. 그 관음증적 시선 속에서 차우는 무척 괴로워하고, 결국 첸에게 이별을 통고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그들이 1962년부터 1965년까지 홍콩에서 겪었던 화양연화의 전부다.



<화양연화>처럼 만들고 싶었던 한국영화가 있었다. 허진호 감독의 <외출>이다. 그러나 정서적인 울림에서 <외출>은 <화양연화>가 되지 못했다. 어떤 점이 달랐을까. <외출>은 <화양연화>를 오해했다. <화양연화>는 단지 맞바람을 피는 순수한 불륜 이야기가 아니다. <외출>에서 외로운 두 남녀 배용준과 손예진이 침대에서 사랑을 나눈다고 해서 좀더 격정적인 불륜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화양연화>는 불륜영화라기보다는 왜곡된 기억의 산물이 그 사랑을 위험한 사랑으로 기억하는 영화다. 생각해보면 누구나 자신만의 '화양연화'를 그렇게 기억한다. 한껏 분 바르고 포마드 기름으로 머리를 넘기고 치파오로 단장한 채 남아 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말이다. 좁은 복도, 가로등 켜진 거리, 어두운 뒷골목은 밀회를 낭만적으로 만들어주는 기억 속에 존재한다. 만약 이 영화에서 두 사람의 직접적인 신체 접촉이 등장했다면 오히려 기억은 치명적으로 손상되었을 것이다.


섹스 장면이 사라진 빈 자리를 이 영화는 먹는 장면으로 채운다. 두 사람은 계속 뭔가를 함께 먹는다. 첫 데이트에서 오물오물 고기를 썰어먹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 차우는 첸에게 겨자를 놓아주고, 첸은 그 겨자에 고기를 찍어 먹는다. 차우가 아프면 첸이 죽을 만들어 주고, 두 사람이 한 방에 갇혔을 땐 국수도 먹고, 차도 함께 마시고, 나중엔 밥도 먹는다. 이처럼 함께 먹는 장면은 두 사람이 감정을 공유하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다. 불륜으로 가족을 잃은 자들의 공허함에 음식이 등장하자 따뜻한 화양연화의 순간이 완성된다.



영화는 후반부에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캄보디아를 방문한 뉴스 클립을 삽입한다. 1966년 캄보디아의 왕자와 왕비가 드골을 영접하러 공항에 나오고 프놈펜 시민들이 환호하는 장면을 프랑스인의 시점에서 담은 영상이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 영화가 처음부터 1999년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기억하는 자는 사건을 순차적으로 회고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간중간 예상치 못했던 기억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캄보디아는 1953년 프랑스에서 독립했지만 입헌군주였던 시아누크공 치세에 여전히 불안정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캄보디아를 방문한 드골 대통령은 영화가 만들어진 1999년 홍콩에선 영국의 여왕이나 총리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뒤 영국은 실효적 지배권을 잃었지만 홍콩인들은 여전히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러니까 왕가위는 1999년 홍콩을 1966년 캄보디아에 빗대고 있는 것이다.


차우는 앙코르 사원에 자신만의 비밀을 고해성사하고 돌아온다. 그 비밀을 간직한 사원의 구멍은 잡초가 솟아난 채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할 말은 많지만 모두 묻어놓았다는 듯 <화양연화>는 그렇게 끝맺는다.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