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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20년 만에 <네트워크>를 다시 봤다. 예전에 상/하로 나뉘어진 비디오테이프를 대여점에서 빌려 본 기억이 나는데 지금 그때보다 더 좋은 화질로 다시 보게 되니 오히려 이 영화를 처음 보는 기분이다. 사실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아서 기억 속에서 어떤 장면은 홀리 헌터가 나왔던 <브로드캐스트 뉴스>와 짬뽕이 되어 있기도 했다. 1976년작 <네트워크>를 1987년작 <브로드캐스트 뉴스>와 헷갈려하다니! 둘은 전혀 다른 영화인데! <브로드캐스트 뉴스>는 방송기자를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인 반면, <네트워크>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비디오드롬> 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영화다.



"이보다 더 시니컬할 수 없다."


<네트워크>를 보면 이 말이 어떤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오직 시청률 올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UBS 방송국 프로그램 기획자 다이애나(페이 더너웨이 분). 영화를 그녀의 시점에서 보면 이 영화는 다이애나의 성공담이다. 시청률이 저조해 은퇴를 앞둔 앵커 하워드 빌(피터 핀치 분)은 동료이자 친구인 프로그램 기획자 맥스(윌리엄 홀든 분)와 술을 마시며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차라리 권총자살이나 해야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실제로 뉴스 프로그램 클로징 멘트로 그 말을 해버린다.


"시청자 여러분, 다음주에 저는 여기에서 권총자살하겠습니다. 그러면 시청률이 50%쯤으로 오르겠죠." 그러자 방송국은 난리가 난다. 간부회의가 소집돼 어떻게 수습할지 논의하고 결국 하워드와 맥스를 해고하기로 결정한다. 수백명의 기자들이 찾아오고 하워드 빌은 순식간에 타임지 1면을 장식하는 인사가 된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시청률의 여왕' 다이애나는 방송국 사장인 프랭크(로버트 듀발 분)에게 가서 이렇게 말한다. "하워드를 해고하겠다고요? 지금껏 바닥을 기던 시청률이 치솟았는데 이 기회를 날리겠다고요? 저한테 맡겨주세요."



다이애나는 하워드 쇼 이전에 무정부주의 테러리스트들의 은행강도를 담은 비디오클립을 시리즈로 만들어 황금타임에 방영하는 것을 기획하고 있었다. LA로 날아가 테러리스트와 연결된 공산주의자를 만나 "더이상 팜플렛이나 전달하지 말고 우리 프로그램으로 마오쩌둥처럼 수천만명의 시청자를 거느리는 스타가 돼라"고 말한다. 지금으로 치면 알카에다 찾아가 황금타임에 내보내줄테니 너희들 테러 영상 달라는 말이다. 어쨌든 그게 먹혀들었고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던 맥스를 꼬셔 그 자리를 꿰차면서 결국 다이애나는 '하워드 쇼'와 '테러리스트 쇼'를 동시에 메가히트시켜 방송국의 구세주로 떠오른다.


테러리스트들이 스타가 되자 여기에서 감독은 시니컬하게 한 씬을 삽입하는데 그 장면에서 테러리스트들의 변호사와 공산주의자는 서로 돈을 누가 더 가져갈지를 놓고 계약서를 들이밀며 언쟁을 벌인다. 그러자 테러리스트 대장이 총을 쏘며 공산주의자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네가 그 돈 갖겠다는 거지? 그렇게 해." 시청률과 돈 앞에서는 이념도 이미 우스울 뿐이다. 이 영화가 냉전시대였던 1976년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시니컬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번번한 인간관계 하나 없는 다이애나는 대학 시절부터 자신의 우상이었던 맥스와 동거하게 되지만 침대에서도 자신의 관심은 오로지 시청률 뿐이라며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여자다. 페이 더너웨이는 이 역할로 1977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자신의 욕망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야망에 사로잡힌 여자 캐릭터는 아마도 많은 여배우들이 탐낼 만한 캐릭터다. 두 손을 들어 지휘자처럼 자신의 시청률에 대한 탐욕을 부르짖는 연기가 일품이다. 그 표정에 <보니 앤 클라이드> <차이나타운>의 경험이 다 묻어난다.



<네트워크>의 엔딩은 충격적이다. 사실 요즘 영화에서 이런 엔딩은 보기 힘들다. 어떻게 보면 한국영화 <더 테러 라이브>의 엔딩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사실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 화면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더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진다. 하워드 빌은 자살소동 이후 마치 예언자처럼 자신이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며 앞으로 진실만을 말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이애나는 '하워드 빌 쇼'를 만들어 히트시킨다. 맥스는 이를 못마땅해하지만 사장은 맥스를 해고하고 그 자리에 다이애나를 앉힌다.


하워드는 프로그램 시작부터 미국인들을 향한 메시지를 던진다. "유가 상승과 경제 불황으로 괴롭나요? 지금 당장 창문을 열고 이렇게 외치세요. 나는 미쳐버리겠다! 더이상 참을 수 없다!" 전염병처럼 사람들이 실제로 외치기 시작하고 '하워드 빌 쇼'는 USB의 최고 인기 프로그램이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워드가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에 실망한 미국인들로 인해 48%까지 치솟던 시청률이 점점 하락하게 되자 다이애나는 중역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자살하는 걸 기다릴 수 없다면 차라리 암살해버리죠. '테러리스트 쇼'에서 하워드를 암살한 것으로 만들면 시청률은 다시 두 배가 될 거예요."


패디 차예프스키가 쓴 <네트워크>의 각본은 이처럼 탐욕에 가득한 캐릭터들과 미처버린 앵커, 그 사이에서 방황하는 중년 남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밑바탕에는 TV에 대한 증오가 가득 차 있는데 이는 당시 할리우드가 TV에 대해 갖게 된 두려움의 표출일 수도 있겠고, 윤리의식이 실종된 TV의 시청률 경쟁에 대한 경고일 수도 있겠다. 재미있는 것은 패디 차예프스키는 아카데미 각본상을 단독으로 세 번이나 수상한 유이한 작가(다른 한 명은 우디 앨런)이지만 그는 영화보다 TV용 극본을 훨씬 많이 썼다는 것이다.



패디 차예프스키, 윌리암 홀든, 피터 핀치 모두 당시 노장들이어서인지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후 5년 안에 모두 사망했다. 피터 핀치는 앵커로 시작해 예언자로 무대에서 죽는 하워드 빌 역을 맡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가 됐지만 이미 시상식이 열리기 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시상식에선 패디 차예프스키가 피터 핀치 대신 대리수상 했다.


시드니 루멧은 피터 핀치의 호주식 억양 때문에 그를 캐스팅했다고 하는데 존 슐레진저의 <선데이 블러디 선데이> 외에 마땅한 대표작이 없던 베테랑 배우에게 대표작을 안겨준 셈이 됐다. 하지만 피너 핀치는 역시 연기보다는 난봉꾼으로 더 유명할 것이다. 술 좋아하고 여자 좋아했던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민 가서 살다가 로렌스 올리비에의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돌아가 연극무대에 섰는데 그때 로렌스 올리비에의 부인이었던 비비안 리와 바람난 일화는 유명하다.


<네트워크>의 스토리텔링이나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다소 무모해 보이면서도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아마도 패디 차예프스키의 절친이었던 시드니 루멧 감독이 TV 프로듀서 출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방송국 시절 경험했던 자신의 장기를 살려 영화로 전업한 뒤에도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었다. '최고의 걸작'이라고 부를 만한 영화는 없지만 대부분의 영화가 고른 완성도를 보이고, 또 스토리텔링에 강점이 있어 적어도 단언컨대 그의 영화 중 재미없는 영화는 없다.


1957년 <12명의 성난 사람들>로 센세이셔널하게 데뷔한 이래 <밤으로의 긴 여로> <말론 브란도의 도망자> <전당포> <뜨거운 오후> <형사 서피코> <에쿠우스> <폴 뉴먼의 심판> <허공에의 질주> <글로리아>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 등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대부분 사회에서 버림받거나, 부조리한 제도에 의해 쫓기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들은 대개 도덕적인 문제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유작이 된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에서도 스토리텔링의 실험을 계속한 그는 천상 이야기꾼이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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