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광해: 왕이 된 남자>


광해, 관상, 군도, 협녀, 역린, 명량, 해적...


낯익은 제목도 있고 아닌 것도 있죠? 앞의 두 개는 작년과 올해 추석 시즌에 개봉해 1년 간격으로 흥행몰이를 한 팩션 사극의 제목이고, 뒤의 다섯 개는 내년에 개봉할 팩션 사극의 제목입니다. 바야흐로 '팩션 사극'의 시대입니다. 한국인이 사극 좋아하는 게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만 최근 한국영화의 사극 유행은 과거와 조금 다릅니다. 과거 사극이 최대한 실제 사건에 가깝게 '고증'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최근 사극은 배경만 가져오고 인물과 사건을 새로 만들어 교묘하게 끼워넣습니다. '팩트'에 기반한 '픽션' 그래서 '팩션'입니다.


<명량: 회오리 바다>


팩션의 시대


대중문화에서 팩션의 시작은 2003년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바티칸을 둘러싼 마치 실제 같은 음모에 전세계 독자들이 열광했었고 이후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그 소설에 자극받아 한국에서도 정통 사극에 상상력을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장금> <해신> <불멸의 이순신> 같은 드라마가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동안 사극은 끊임없이 역사적 고증에서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아예 드러내놓고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시작하는 팩션은 방송사에게나 작가에게나 소재갈증을 풀어준 대안이었습니다. 이후 TV 드라마의 팩션은 <추노> <뿌리깊은 나무> <선덕여왕>처럼 상상력이 완벽하게 역사에 녹아든 웰메이드 사극으로 진화했습니다.


영화도 팩션을 적극 받아들여 <왕의 남자> <음란서생> <방자전> <최종병기 활> 등 독특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사극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와 <관상>에 이르러서는 최근 몇년새 한국영화가 사회 부조리를 담아내고 있는 경향과 맞물려 팩션 사극도 현재 시대를 반추하고 있습니다. 2006년 <왕의 남자>처럼 권력무상의 메시지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허구 속 주인공의 삶의 낙차가 커서 줄거리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재미가 있습니다. 이는 인물들이 실재했던 배경에서 허구의 삶을 살아가기에 가능한 장치입니다. 즉, 허구의 인물이어서 마지막엔 역사 속에 기록되지 않고 사라져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 높은 곳까지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광해>에서 이병헌은 왕이 됐고, <관상>에서 송강호는 김종서와 문종을 보필하며 수양대군과 대결하는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런 팩션 사극의 유행은 당분간 계속될 것 같습니다. <광해> 관객 수 1232만 명, <관상> 910만 명이라는 경이적인 흥행기록은 충무로의 영화 제작자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합니다. 당장 라인업만 살펴봐도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 <협녀: 칼의 기억>(이하 <협녀>), <역린>, <명량: 회오리 바다>(이하 <명량>), <해적> 등 팩션 사극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큼 화려합니다. 하나씩 살펴볼까요? 먼저, <군도>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윤종빈 감독이 자신의 페르소나인 하정우와 다시 한 번 의기투합한 영화로 조선 철종 10년 도적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강동원, 조진웅, 이성민, 마동석, 김성균 등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조선시대판 <도둑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캐스팅의 화려함에서는 <협녀>도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이병헌, 전도연, 김고은, 배수빈, 준호가 출연하는 고려 무신시대 검객들의 복수극인 <협녀>는 제목에서 홍콩 호금전 감독의 1971년 동명의 걸작 영화가 떠오르지만, 딸을 검객으로 키워 고수와 18년 만에 숙명적 대결을 펼친다는 플롯은 오히려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을 연상시킵니다.


<역린>은 정조 시대로 갑니다. <이산>의 이서진에 이어 이번엔 현빈이 정조 역을 맡아 여성팬들을 설레게 하고 있습니다.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박성웅, 정은채가 출연하는 정조 암살 음모극입니다.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들었던 MBC PD 출신의 이재규 감독이 연출을 맡았는데 채널CGV에서 방영했던 <정조 암살 미스터리 8일>과 소재가 유사해 과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명량>은 <최종병기 활>을 만들었던 김한민 감독 작품이라는 점에서 기대가 가는 영화입니다. 1597년 단 12척의 배로 왜군 330척을 물리쳤던 명량해전을 얼마나 실감나게 연출할 지 궁금합니다. 전작에서 몽골 장수를 연기한 류승룡이 왜군 역을 맡았고 최민식이 무려 이순신을 연기합니다. <해적>은 옥쇄를 삼킨 고래를 추적하는 조선 초기 해적과 산적이 등장하는 액션 사극입니다. <댄싱퀸>으로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했던 이석훈 감독의 차기작으로 손예진과 김남길이 <상어>에 이어 또다시 호흡을 맞춥니다. 이렇게 한 편씩 나열하고 보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배우들은 지금 거의 모두 팩션 사극을 찍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군요.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두 글자 팩션


재미있는 점은 공교롭게도 위에 열거한 앞으로 나올 팩션 사극 영화의 제목이 모두 두 글자라는 것입니다. '영화의 얼굴'인 제목은 영화를 총체적으로 표현함과 동시에 흥행과 직결되기 때문에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야겠죠. 제목 때문에 흥한 영화도 있고 영화는 괜찮은데 제목을 잘못 지어서 망한 영화도 있을 것입니다. 제목만 봐서는 도무지 무슨 영화인지 알 수 없는 영화들도 꽤 있으니까요. 최근 <광해>와 <관상>의 대성공 때문인지 충무로에 '사극=두 글자'라는 징크스가 생긴 것 같습니다.


'두 글자 사극'의 시대가 처음은 아닙니다. TV 드라마에서 정형수 작가가 한때 '두 글자 사극' 유행을 선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상도> <다모> <주몽> <야차>를 기억하시나요? 아무래도 같은 작가가 쓰다보니 나름대로 성공 방정식을 이어가고 싶었겠지요. 여기에 <이산> <동이> <마의> 등 정형수 작가와 작품을 함께 했던 이병훈 PD가 두 글자 징크스를 이어갔습니다.


비슷한 뉘앙스로 말의 느낌을 살리는 것을 '라임(Rhythm)'이라고 하죠. 시로 말하면 운율이고, 대중문화에선 주로 힙합 가사에서 기가막힌 '라임'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상업영화의 제목도 어떤 '라임'을 따라갑니다. 두 글자가 유행이면 아무래도 두 글자를 더 찾게 되고, 세 글자 시대엔 세 글자, 또 한때는 <싸움의 기술> <연애의 목적> <작업의 정석>처럼 'OO의 OO' 제목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유행했던 영화 제목의 라임을 살펴볼까요?


2007년엔 다섯 글자 제목이 대세였습니다. <화려한 휴가> <우아한 세계> <그놈 목소리> <즐거운 인생> <세븐 데이즈> <이장과 군수> <최강 로맨스> <만남의 광장> 등 대체로 상징적이고 문학적인 제목이 많았습니다. 2008년엔 제목이 세 글자로 줄었습니다. <추격자> <쌍화점> <더 게임> <신기전> <미인도> 등. 글자 수가 줄어들수록 문학이 사라지고 더 직접적으로 사물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군요. 여기에 <놈놈놈> <우생순>처럼 긴 제목을 세 글자로 줄이면서 입에 착착 달라붙게 만든 제목도 있습니다. 세 글자 제목의 유행은 몇 년간 계속됩니다. 2010년엔 할리우드에서 날아온 대작 <아바타>와 <인셉션>마저 세 글자였고 한국영화도 <아저씨> <의형제> <전우치> <방자전> <해결사> <무적자> 등 세 글자가 아니면 장사가 잘 안 될 정도였습니다. 2011년엔 <고지전> <7광구> <완득이> <도가니> <의뢰인> <아이들> <글러브> <평양성> 등 흥행한 영화도 있고 잘 안 된 영화도 있는데 이때 쯤엔 슬슬 무리하게 지은 제목들도 보이는 것 같습니다. 2012년부터는 <화차> <타워> <은교> 등 두 글자로 줄어드는 조짐이 보이더니 결국 두 글자 팩션 사극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