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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해설을 위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투곤'이라는 게 있다. 단어 그대로 곤충끼리 싸움을 붙이는 건데 초식을 하는 장수풍뎅이와 곤충세계의 깡패인 사마귀를 붙여 놓으면 가끔 온순한 장수풍뎅이가 뿔로 사마귀를 죽이기도 한다. 화이는 붉은 화이목에서 길러진 한마리의 장수풍뎅이 같은 아이다. 사마귀들 틈에서 자라나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등껍질을 단단하게 유지해야 한다. 다섯 명의 아나키스트 아빠들에게 길러진 그는 선과 악이 접합된 묘목에서 태어났다. 그중 악의 뿌리는 다섯 개의 잔뿌리로 확장했다. 이 묘목을 서로 자기만의 방식으로 분재하려는 아버지들에게 자양분을 흡수한 화이는 어느날 '아버지의 죽음'을 선언하고 스스로 뿌리를 자른다.


기묘한 알레고리의 영화 <화이>는 근래 한국영화 중 가장 파워풀하고 심오한 상업영화다. "다섯 명의 살인청부업자 아버지들에게 유괴당해 길러진 아이가 7년 후 아버지들을 향해 복수한다"는 독특한 줄거리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우선, 다섯 명의 아버지는 저마다 성격이 다르다. 석태(김윤석 분)는 권위적이고 기태(조진웅 분)는 다정다감하고 진성(장현석 분)은 지적이고 동범(김성태 분)은 폭력적이고 범수(박해준 분)는 시니컬하다. 통상적인 아버지의 서로 다른 성격을 캐릭터화했다는 점에서 소년이 아버지를 극복해가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신화가 떠오른다.


또, 극중 진성은 [최초의 아나키스트]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들이 제거하는 대상은 부패한 전직 검사나 돈 많은 부르주아들이다. 그러나 카지노로 돈을 탕진하며 살아가는 그들은 혁명을 꾀하지도 않고 국가시설을 파괴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석태가 돈다발을 발로 걷어차며 "목표가 이거 아니었어?"라고 시큰둥하게 내뱉는 장면이 있다. 거래처(?)를 관리하며 신중하게 일을 계획해 조직의 평화를 유지하려는 진성과 달리 석태는 더이상 괴물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일을 한다. 자신보다 깨끗한 척, 착한 척 하는 것들이 역겨워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 위해 스스로 피를 묻힌다. 깨끗하다는 컴플렉스에서 벗어나면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석태가 보기에 임형택(이경영 분)이나 전회장(문성근 분)이나 자본주의의 개인 것은 마찬가지다. 멋대로 죄를 짓고 그 죄를 기독교로 용서한다는 것이 석태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보인다. 극중 부패 경찰(박용우 분)의 말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적 안 만들고 부자된 사람 없다." 그래서 석태도 자본주의의 개가 됐다. 전회장의 돈을 받고 임형택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자본주의라는 위선의 '괴물'을 삼켜버린 다섯 아나키스트들의 이야기이다. 다 죽이고 돈이나 벌자고 생각한 그들의 마음 속 한구석 허전함을 채워주는 존재가 바로 화이다. 그런데 화이는 그의 아버지를 임형택으로 오해하고 이들을 모두 적으로 돌린다. 아나키스트들과 자본주의의 개들을 성지시멘트 공장터에 집어 넣어 서로 총질하게 한다. 결국 모두 죽고 홀로 살아남은 화이,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최초의 아나키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화이는 아버지를 죽인다. 글자 그대로 '죽인다.' 그 상황을 부추긴 것은 석태다. 석태가 화이를 이 일에 끼어들이겠다고 결심한 것은 화이가 시각장애인을 쏘는 것을 망설였기 때문이다. 괴물이 보인다고 하면서도 그 괴물을 정면으로 마주보지 못하는 화이의 내면에서 괴물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다. 영화에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지 않지만 임형택은 화이의 친부모는 아닌 것처럼 보인다. 석태에게 강간당한 뒤 함께 사는 영주(임지은 분)가 끝까지 "화이는 안돼"를 외치는 것은 아마도 모성본능의 표현일 것이다. 석태가 감옥에 간 뒤 (아마도) 화이를 맡아 키웠을 임형택에게서 석태는 아이를 되찾아온다. 화이는 자신이 친아버지를 죽였다고 오해하고 자신을 이렇게 만든 괴물들을 처단하러 집을 나선다. 그리고 임형택을 포함해 여섯 명의 아버지들을 모두 죽인 후에야 비로소 오렌지를 들고 오렌지를 좋아했던 엄마를 찾아간다. (이 장면은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에야 나온다) 여기에서 아버지들을 모두 죽이는 행위는 결국 구세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화이에게 다가온 괴물은 아버지와 타협하라고 부추긴다. 너도 이미 더럽혀졌지 않냐고 힐책한다. 그러나 화이는 아버지 세대를 살해할 때 비로소 홀로 설 수 있음을 안다. "아버지 세대의 영화는 죽었다"고 선언한 1960년대 독일영화계의 '오버하우젠 선언'처럼 구체제와 작별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화이는 새로운 길을 떠난다.


이처럼 <화이>가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태어날 때부터 선과 악의 도그마에 빠져 있던 아이가 16세가 되어 결국 커다란 오해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간다. 이 과정은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무서워해 거세불안에 빠진 아이가 프로이트의 남근기를 빠져나오는 과정이기도 하며, 천민 자본주의와 그에 기생한 테러리스트로 상징되는 구세대와 단절하고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재탄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구를 지켜라> 이후 10년 만에 돌아온 장준환 감독은 그의 재능이 아직 녹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올드보이> 이후 실로 오랜만에 보는 한국 상업영화의 문제작이다. 다만 10년 전 지구를 날려버릴 정도의 '똘끼'는 이 영화에서 상업영화에 안착할 정도로 순화되어 있는데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세공된 것 같아 반갑다. <화이>는 무겁게 보면 다층적으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가볍게 보면 비운 속에 자란 한 아이의 핏빛 복수극으로도 훌륭한 액션 스타일을 가진 영화다. 멋진 남자가 조직을 향해 통쾌하게 복수하는 <아저씨> <회사원> 등의 계보를 잇는 영화이기도 한데, 특히 자동차 추격 씬은 꼼꼼하게 공들여 찍었다. 마지막으로, 화이 역의 여진구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고 에너지가 넘친다. <황해> <남쪽으로 튀어> 등과 이미지가 겹치는 김윤석에 비해 결코 밀리지 않는 눈빛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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