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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역사 보조교사였던 팻(브래들리 쿠퍼). 8개월간 정신병원에 있다가 막 퇴원한 그는 검정 비닐을 입고 다니는데 반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집도 잃고 직장도 잃고 아내도 잃었습니다. 그는 아빠 엄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미식축구팀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광팬인 아빠(로버트 드니로)는 아들을 반갑게 맞아주지만 팻은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아내에겐 접근금지명령이 내려져 150m 근방으로 접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 니키를 꼭 되찾고 싶습니다. 병원에서 배운 것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힘들게 일하면서 긍정적 마음을 가진다면 구름뒤 햇살(Silver Lining)을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긍정적이 되자! [무한도전]의 '노긍정' 만큼이나 팻은 매사에 긍정적이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은 웨딩송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어느날 집에 일찍 돌아온 팻은 집안이 옷가지들로 어수선한 것을 발견합니다. 아내의 속옷이 계단에 놓여져 있고 아내는 샤워중입니다. 웨딩송이었던 노래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샤워부스에는 동료 역사교사가 아내와 함께 있었죠. 그날 팻은 그놈을 죽도록 패주었습니다.


긍정 트레이닝을 위해 독서를 합니다. 그에게 도움이 될까요? 팻은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있거라]를 열심히 다 읽더니 책을 창문으로 집어던집니다. 새벽 4시에 자고 있는 아빠 엄마의 침대에 나타나 책 내용을 줄줄이 설명합니다.


팻: 니키가 아이들에게 저딴 책을 가르치다니! 결국 캐서린이 죽어요. 세상은 충분히 험난하고 힘들어요. 좀 긍정적으로 끝나면 안돼요?

엄마: 팻, 지금 새벽 4시야! 너 우리에게 사과해라.

팻: 전 사과할 수 없어요. 헤밍웨이를 대신해서 사과할게요. 헤밍웨이 잘못이니깐.

아빠: 헤밍웨이에게 우리한테 전화해서 사과하라고 해라.


오호, 헤밍웨이의 책을 집어던지는 영화라니. 이 영화의 패기가 정말 대단한데요. 전 이때부터 눈을 똑바로 뜨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대사가 참 좋습니다. 하나하나 놓치기 아까운 대사들이 펼쳐지는데 그것이 명언이어서가 아니라 그 상황을 가장 유머러스하게 설명하는 대사들이라서 감탄했습니다. 게다가 그 인물의 심리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주면서도 결코 촌스럽지 않습니다. 가령 친구 집에서 벽에 아이팟을 꽂으면 음악이 흘러나와 아이에게 들려준다고 하자 팻이 "아이에게 메탈리카 들려줄 수 있어요?" 하는 식이죠.


이 영화의 제목인 '실버라이닝(Silver Linings)'이란 구름의 흰 가장자리, 한줄기 빛나는 희망이라는 뜻인데 영화 속에서는 'Excelsior'와 함께 쓰이는 단어입니다. 팻이 긍정적인 마인드를 고취시킬 때 쓰는 단어이자 자신의 심리상태를 남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되뇌이는 말이기도 하죠. 또 플레이북(Playbook)은 각본이란 의미 외에 미식축구에서 작전, 전술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합니다. 이 영화에서 미식축구는 주요 소재로 쓰였습니다. 결국 영화의 제목은 희망을 위한 전술책쯤 되겠네요. 그런 책이 정말 있을까요? 확실한 건 헤밍웨이는 아니라는 겁니다.


팻은 티파니(제니퍼 로렌스)를 만납니다. 그녀는 친구 부인의 동생입니다. 남편이 사고로 죽고난 뒤 방황하고 있습니다. 첫 만남부터 심상치않은 기운이 감도는데 티파니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느낀 것 같습니다. "아, 이 사람 나랑 같은 과구나." 친구 부부와 식사하다 말고 티파니는 팻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 지금 집에 갈건데 바래다 줄 거에요?" 얼떨결에 따라나선 팻. 어리둥절해하는 팻에 비해 그녀는 과감합니다. 집 앞에 도착하자 본격적으로 팻에게 작업을 겁니다. "부모님 방에 불 꺼지면 내 방에서 나랑 섹스할래요?" 팻은 허겁지겁 도망갑니다.


다음날부터 티파니는 팻을 쫓아다닙니다. 팻의 조깅코스를 알아내서 쫓아옵니다. 이 장면에서 두 사람의 대사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달려드는 여자와 빼는 남자라니. 색다른 긴장감이 느껴졌어요.


티파니: 헤이!

팻: 뭐야? 난 결혼했어요.

티파니: 나도 했어요!

팻: 무슨 말이에요! 남편 죽었잖아요.

티파니: 그쪽 아내는요?

팻: 당신 미쳤어요!

티파니: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사람은 내가 아니죠!

팻: 그래도 난 난잡하진 않아요.

티파니: 전엔 난잡하게 놀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내 안에 나쁘고 더러운 마음이 있지만 난 그걸 좋아해요. 다른 내 마음 만큼이나. 이 개자식아, 넌 그런거 인정할 수 있어?


팻은 이 상황을 이해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티파니는 예쁘고 매력적입니다. 대체 이 여자가 왜 자신을 쫓아오는 것일까요? 그래서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의사: 매력적인 티파니에게 끌리면 니키가 돌아오지 않을까봐 자신을 감추는 거 아니에요?

팻: 나쁘지 않네요. 연애박사님.

의사: 티파니는 단지 친구가 필요해서 그랬을 지도 모르죠.

팻: 그녀는 더이상 난삽하게 안놀지만 그녀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대요. 나한테 그럴 수 있냐고 묻더군요.

의사: 그럴 수 있어요?

팻: 내가요? 내 미친 정신 상태로요?

의사: 당신이 티파니와 친구가 되면 니키는 당신이 남을 돕는 관대한 사람이라 여기겠죠.


그래서 의사의 충고대로 티파니와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다음날 조깅코스에 다시 나타난 티파니.


팻: 왜 자꾸 나를 따라다녀요?

티파니: 난 단지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에요.

팻: 음, 저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을까요?
티파니: (잠시 망설이는 척하더니) 7시 30분에 태우러 와요.

이 대사에서 박수를 치는 여자 관객들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남자를 졸졸 쫓아다니다가 정작 남자가 관심을 보이자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생각하고 정식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라는 거지요. 전 여자도 아닌데 괜히 통쾌하더군요.


드디어 첫 데이트인가요? 레스토랑을 찾은 팻과 티파니. 왠지 주위 사람들이 그들의 데이트를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티파니는 이 동네에서 남자들에게 아주 유명하거든요.

티파니: 대체 왜 시리얼을 시킨거죠?
팻: 당신은 왜 차를 시켰어요?
티파니: 당신이 시리얼을 시켰으니까.
팻: 데이트라고 오해할까봐 시리얼을 시켰어요.
티파니: 그래도 데이트인건 마찬가지에요.
팻: 이건 데이트 아니에요. 일은 잘 돼가요?
티파니: 좋아요. 접근금지명령은 어때요?
팻: 접근금지명령이 내 일은 아니지만 니키를 되찾는 일은 잘 하고 있죠.
티파니: 내가 편지 전해줄 수 있어요. 니키랑 내 언니가 가끔 만나거든요.
팻: 그래주면 정말 고맙겠어요.
티파니: 언니에겐 비밀이에요. 이건 불법이니까요.
팻: 그래도 해주실 거죠?
티파니: 나도 조심해야 돼요. 실직해서 가족들과 안 좋아요.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슬슬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지나요? 하지만 아직 더 큰 한 방이 남았습니다.

팻: 어쩌다 실직했어요?
티파니: 회사 사람 전부와 잤어요.
팻: 전부요?
티파니: 남편 죽고 굉장히 우울했어요.
팻: 몇 명이요?
티파니: 11명.
팻: 더 이상 말 안꺼낼 게요.
티파니: 좋아요.
팻: 하나만 더 물어봐도 돼요?
티파니: (떨떠름한 표정)
팻: 여자도 있었어요?
티파니: 네.
팻: 가만, 니키가 우리 만나는 거 알고 있어요?
티파니: 그렇겠죠.
팻: 이거 무슨 테스트 같은 건가요? 그동안 나 잘 해왔어요?
티파니: 뭐 기본적으론 그렇죠.
팻: 기본적으로라니 그럼 다른 부분은...
티파니: 나랑 비슷하다고요.
팻: 당신 같다고요? 니키한테 말 안했길 바래요.
티파니: 왜요?
팻: 그쪽이랑 날 동급으로 보면 안돼죠.
티파니: 내가 당신보다 미쳤다고 생각하는군요?
팻: 그게... 우린 많이 다르잖아요.
티파니: 젠장... 짜증나게 하네요. (역겨운 표정을 지으며) 내가 당신보다 미쳤다고요?
팻: 목소리 낮춰요.
티파니: 난 미망인에 미친 걸레인걸! 하하하! 잊어버려요! 꺼져!

열받은 티파니는 테이블 위의 시리얼컵과 찻잔을 부숴버리고는 밖으로 나갑니다. 식당 안의 사람들이 티파니를 향해 박수치며 휘파람을 붑니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멕 라이언이 연기한 오르가즘 씬 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제니퍼 로렌스의 식당 연기였습니다. 자, 이제 관계가 역전됐습니다. 팻은 티파니를 찾아가야겠죠. 본격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시작입니다. 어딘지 정신적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는 깨지기 쉽고 연약해 보이지만 한 번 달라붙으면 강렬한 스폰지처럼 서로의 사랑을 빨아들입니다.

티파니와 팻이 함께 연습하는 춤과 필라델피아 이글스의 미식축구를 통해 두 사람이 맺어지는 과정은 기존의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급진전되는 듯하다가 장애물을 만나 조마조마하게 하고, 오해가 풀리면서 사랑고백이 이어집니다. 니키가 등장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가족과 친구가 고민하는 팻에게 힌트를 주고, 티파니는 사랑을 쟁취한 여자가 되고, 팻은 사랑을 선택한 남자가 됩니다.


로맨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감정들을 솔직하게 뱉어내는 데에 있습니다. 인물들의 트라우마가 대사를 통해 그대로 전달되고 솔직함이 쌓이면서 두 사람의 감정이 서로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춤을 통해 몸이 가까워지면서 감정들에 날서 있던 긴장의 경계가 무너집니다.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힐링의 과정이라면 이 영화는 로맨틱한 힐링무비입니다. 구름 뒤에 가려진 햇살을 발견할 때의 기쁨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기분 좋은 영화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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