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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여자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자.

웰메이드 스릴러의 진수를 보여준 스페인 기옘 모랄레스 감독의 두번째 영화 <줄리아의 눈>.


앞이 보이지 않는 여자는 공포영화에서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소재였다. 테렌스 영 감독의 <어두워질 때까지>에서 오드리 헵번이 보여준 강렬한 인상 이후 감독들은 예쁜 여배우가 곤경에 처하는 모습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앞이 안보이는 상황을 설정했다. 시력을 잃거나 혹은 집안의 전원을 차단해 깜깜하게 만드는 식이다. <왓 라이즈 비니스>에서 강렬했던 암흑 장면을 떠올려 보라. 몇 년 전에는 <눈 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시력상실이 새로운 소재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김하늘 주연의 <블라인드>가 만들어졌다.


한편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남자는 H.G.웰스의 [투명인간] 이래로 영화의 소재였다.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첫 영화인 1933년의 제임스 웨일 감독의 <투명인간>은 투명인간이 된 과학자가 미쳐서 살인자가 되는 공포영화였다. <줄리아의 눈>에서는 여기에 비사교적인 사이코패스가 결합되어 새로운 유형의 연쇄살인범이 만들어졌다.


영화는 스릴러의 장치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쌍둥이 언니의 갑작스런 죽음, 실명한 사람이 많은 음산한 마을, 형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인기척이 느껴지는 남자 스토커, 어디에도 맞지 않는 열쇠, 제발로 찾아간 그 남자의 집,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살인범...


줄리아는 남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쌍둥이 언니 사라의 의문의 죽음을 추적한다. 남자가 있음을 알게 됐지만 정작 주위에 그 남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는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이 없는 남자다. 거리에서 누구도 눈길 주지 않고, 어디에 들어가도 누구도 쳐다보지 않으며, 세 번 질문을 해도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남자. 하지만 그 남자는 구식 플래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줄리아와 사라의 사진을 몰래 찍고 있다.


사랑하던 남편이 죽은 뒤, 시력 상실을 눈앞에 둔 줄리아는 기증받은 눈으로 수술을 하고 2주간 보호붕대를 감고 있어야 한다. 한번도 완전히 시력을 잃어본 적 없는 그녀에게 찾아온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의 2주.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그 시간에 그녀는 환영을 보고 악몽을 꾼다. 정신착란인지 실제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녀는 살인자와 맞딱드리는데 그때마다 그녀를 곁에서 보호해주는 사람은 간병인 이반이다.


한밤중에 낯선 곳을 헤매고 있는데 어두운 골목길에서 한 남자와 마주친다. 그 사람을 보고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까 혹은 무서운 마음이 먼저 들까? 줄리아가 이반을 대하는 태도도 그런 식이다. 카메라는 이반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줄리아도 관객도 그 남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줄리아는 처음에 이반을 경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얼굴은 모르지만 자상한 이 남자에게 점점 끌린다. 급기야 앞이 보이지 않는 그녀는 그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사하라 사막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그에게 키스한다.





모든 것이 밝혀지는 것은 붕대를 풀기 4일 전이다. 4일만 더 참으면 된다고 줄리아는 화장실에 앉아서 읊조리지만 4일이나 더 견디기에 그녀에게 닥친 상황은 만만치 않다. 줄리아를 쫓아 이반의 집으로 숨어 들어온 옆집의 한 소녀는 줄리아에게 이반이 바로 살인마라고 말해준다. 이 소녀는 줄리아의 환영일까 아니면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걸까. 줄리아는 평생 보이지 않는 행성를 찾는 일을 해왔었다. 시력을 잃어도 두렵지 않겠느냐는 이반의 질문에 그녀는 아름다운 것을 많이 봤기 때문에 두렵지 않다고 대답한다. 화장실에 앉은 줄리아는 붕대를 풀고 드디어 현실의 칼날에 정면으로 응시한다. 이반은 과연 어떤 사람일까.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그리고 드디어 카메라도 관객에게 이반의 얼굴을 보여준다. 관객과 줄리아가 동시에 진실과 마주하는 순간은 그러나 고통스럽다.


다시 줄리아의 집으로 무대를 옮겨 벌어지는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이 영화의 백미다. 구식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한 커트씩 화면에 어둠이 사라지고 줄리아와 이반의 사투가 나타난다. 마침내 형사들이 문을 열고 들이닥쳤을 때 줄리아는 형사에게 플래시를 빼앗아 보이지 않던 남자를 비추며 외친다. "이래도 안보이나요?" 플래시 세례를 받은 남자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주목받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스포트라이트가 자신에게 비치는 것을 견딜 수 없는 그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투명인간의 생을 마감한다. 소외된 인간의 고독까지 담아냈던 H.G.웰스의 [투명인간] 만큼은 아니지만 인상적인 엔딩이다.


시각적인 스릴러에 비해서 우주공간과 연결시킨 러브스토리는 이 영화의 사족처럼 보였다. 비록 남편이 희생됐지만 짜임새 있는 플롯이 남았으니 <줄리아의 눈>은 스페인에서 온 웰메이드 스릴러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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