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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은 영화 중반부에 나온다. 폭우가 쏟아지는 와중에 기택(송강호) 가족이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간다. 카메라는 수직 트레킹으로 이들을 쫓는다. 어둠 속 가로등 빛이 계속해서 하강하는 빗줄기를 비춘다. 빗소리가 점점 둔탁해진다. 내려갈수록 그곳은 더 음습하고 불안한 세계다. 이 장면은 마치 디스토피아를 그린 SF영화처럼 상징적이다. 저 위의 세계가 꿈이었다면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순간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와 딸 기정(박소담)이 멈춰선다. 숨가쁘게 이야기를 전개해온 영화는 여기서 숨을 고르고 방향을 튼다.



계단이라는 상징물은 넘어설 수 없는 계층 차이를 묘사하는 영화에서 자주 등장했다. 봉준호 감독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뒤 수상소감에서 언급한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도 자주 계단이 나왔다. 기생충과 주제를 공유하는 ‘하녀’ ‘충녀’에서도 집 안의 계단은 극복할 수 없는 계층을 상징했다. '기생충'은 계단의 의미를 집안을 넘어 동네로까지 확장했다.



“이것 참 상징적이네.”


영화 속에서 기우는 자주 이렇게 말한다. 영화에 깜짝 출연하는 친구(박서준)가 기우에게 선물로 가져온 수석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수석은 진열장에 놓으면 값비싼 물건이 되지만 물 속에 놓으면 다른 돌들과 구분되지 않는 평범한 돌일 뿐이다. 영화에서 유명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멋진 집도 마찬가지다. 누가 사느냐에 따라 집의 의미는 달라진다. 위치는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햇빛 안 드는 반지하에 살 때와 햇빛 잘 드는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 살 때 기택네 가족은 전혀 달라 보인다.



영화는 빈부 격차를 이야기하지만 그 원인까지 파헤치지는 않는다. 멋진 집이 소재지만 부동산이나 최저임금 같은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대신 영화는 부유하고 가난한 서로 다른 가족을 한 집에 데칼코마니처럼 겹쳐 놓고 그 차이를 묻는다. 그 차이는 의외로 되게 단순하고 사소하다.


기우는 박사장(이선균)과 연교(조여정)의 딸 다혜(정지소)의 영어 과외교사로 그 집에 들어간다. 기우가 다혜에게 써보라고 말하는 단어 중 ‘pretend’가 있는데 이 단어는 기우네 가족을 상징한다. 부자인 척, 명문대를 나온 척, 고급 제품에 익숙한 척 하더니 급기야 그 집에 사는 척한다.



여느 영화라면 여기서 인간의 욕망을 이야기의 동력으로 삼을 것이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 ‘충녀’도 그랬다. 계층을 넘는 사랑, 불륜 같은 것들이 집주인이 되고 싶은 욕망을 넘어 결국 파멸로 치달았다. 그런데 봉준호 감독은 오히려 ‘사랑’을 조롱한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제거하는 대신 더 부차적인 것을 물고 늘어진다. 서로 다른 세계에 살고 있어서 절대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부딪히는 지점은 감정 이전에 사소한 디테일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사모님을 사랑하시죠?”


기택의 이 대사는 두 차례 나오는데 기택은 별 뜻 없이 한 말일 수 있지만 박사장은 이 질문을 받을 때마다 기택이 선을 넘는다고 생각한다. 박사장의 미묘한 표정 변화에는 사랑이라는 아주 내밀한 감정을 공유하려 드는 행위는 명함을 공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이 영화가 차별화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영화 속 인물 누구도 욕망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다.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뉘는 여러 캐릭터들 중 욕망에 눈 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행주 빤 것 같은 냄새, 선을 넘어온다는 생각, 열등감을 느낀 사람의 자격지심이 충동을 자극해 사건이 벌어진다.



“가장 완벽한 계획은 무계획이야.”


빗속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빛나는 장면 이후 기택은 가족에게 이렇게 말한다. 계획이 없다는 그의 말처럼 이후 벌어지는 사건들은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 비가 갠 후 연교는 아들의 생일 파티를 계획하지만 사건은 계획과 무관하게 진행된다.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순간의 짜릿한 서스펜스가 영화 후반부 내내 계속된다(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기생충’은 봉준호 감독의 전작들 중 어느 영화와도 닮지 않았지만 매순간 봉준호 영화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다. 모자란 듯하지만 능력자인 소시민, 평범하지 않은 가족과 과하지 않은 가족애, 가장 이질적인 두 인물의 만남, 예상치 못한 비밀 공간, 빠르게 치고 가다가 속도 조절하는 순간의 주제 전달, 수직 혹은 수평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동선, 툭 치고 빠지는 유머 등 봉준호 영화의 요소들이 잘 어우러졌다.



봉준호 감독은 이야기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성취를 중시하는 테크니션이기도 한데 ‘기생충’에서도 비주얼과 사운드의 미학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설국열차’까지 필름 사용을 고집하다가 ‘옥자’를 통해 뒤늦게 디지털로 넘어온 그는 ‘기생충’ 역시 ‘옥자’ 만큼이나 공을 들였다. 덕분에 풍부하고 선명한 4K 화질의 색감과 세밀하고 다층적인 돌비 애트모스 사운드를 통해 두 가족의 블랙코미디를 즐길 수 있다. ‘버닝’에서 황홀한 노을 색감을 스크린에 그대로 박제해낸 홍경표 촬영감독은 ‘기생충’에선 탁월한 부감 쇼트(피사체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장면)로 장면의 공기를 장악한다. 정재일 음악감독은 '옥자'에서 선보인 경쾌한 브라스 음악과 달리 이번엔 현악, 벨, 톱, 아카펠라 등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 서스펜스를 자극한다.


칸 영화제에선 여러 배우들 중 송강호만 주목받았지만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이선균, 조여정, 이정은, 정지소 등 배우들의 출연 분량이 고르고 앙상블이 좋은 영화다. 특히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혜진과 이정은은 놀라운 존재감을 보여준다.


기생충 ★★★★☆

모든 장면이 봉준호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5714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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