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기생충’을 계급과 성,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해 보겠습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가득하므로 영화를 보신 분만 읽는 게 좋습니다. 이 해석은 감독의 창작 의도와는 무관한 철저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공생을 모르는 기생충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 반지하와 고지대 저택의 대비, 지워지지 않는 냄새 등은 극단적으로 다른 계층 차이를 상징하는 직접적인 장치입니다. 이런 해석은 많이 나왔으므로 저는 여기에 더해 인물들에 초점을 맞춰보겠습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세 가족, 즉 박사장(이선균) 가족, 기택(송강호) 가족, 문광(이정은) 가족은 수직 관계를 이룹니다. 이 관계는 제목처럼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입니다. 박사장이라는 숙주가 있고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은 여기에 기생합니다.


“저 집에서 우리 집으로 넘어오는 돈이 얼마냐? 위대하신 박사장님!”

“박사장님 리스펙트!”


첫 번째는 기택의 대사고, 두 번째는 문광의 남편 근세(박명훈)의 대사입니다. 두 사람 모두 숙주인 박사장을 칭송한다는 면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공통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후반부 기택이 박사장을 죽이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숙주와 기생충 이야기를 더 해봅시다. 기생충이 숙주에 목매달며 살아가는 반면 숙주는 기생충따위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선을 잘 지키면서 적당히 필요한 만큼의 도움을 주고받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들이 아슬아슬 선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놈의 ‘냄새’가 문제가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 통제가 불가능한 냄새는 선을 지킬 줄 모르기 때문이죠.



여기까지는 매우 전형적인 부자와 빈자 사이의 계층을 드러내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영화에는 주목해야 할 또하나의 관계가 있습니다. 수직인지 수평인지 모호한 관계입니다. 바로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숙주가 우리 몸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몸속에서 기생충과 기생충이 만날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렇습니다. 둘은 공존하지 못합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박살냅니다. 기택 가족과 문광 가족이 지하에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어느 한쪽은 반드시 죽거나 떠나야 합니다. 처음에 문광은 충숙에게 “언니”라고 부르며 공생을 제안하지만 충숙은 이를 단박에 거절합니다. 두 기생충의 공생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부터가 진짜 계급투쟁입니다. 여기서 계급투쟁이란 누가 더 진짜 기생충 계급이냐를 다투는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두 가족의 계급투쟁은 처음엔 북한의 로켓 발사에 비유됐습니다. 동영상 전송 버튼을 누르느냐 마느냐로 둘 사이의 권력 관계가 전복됐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실제 핵탄두를 쏘지 않으면서도 핵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으로 발언권을 얻은 것처럼, 영화 속에서 동영상은 전송되지 않지만 큰 위력을 발휘합니다. 대치 상황에서 근세가 향수에 도취돼 있을 때 기택 가족은 기습작전을 벌이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면서 기택 가족은 인해전술로 문광과 근세를 지하에 가두어버립니다.


기택과 근세는 모두 대만 카스테라를 창업했다가 망해 하층민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권력투쟁 과정에서 대척하지만 한편으로는 서로의 비슷한 처지에 대해 무언의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박사장이라는 저 높은 곳에 위치한 부유한 계층이 있고 그 아래 반지하에 사는 기택 가족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지하에 숨어 사는 근세가 있습니다. 근세는 부잣집 아래 숨어 살기 때문에 수해 피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에선 기택보다 나아 보이지만 감금 상태라는 점에서는 기택보다도 아래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모호한 위치가 상징하는 위태로운 관계 설정은 영화 후반부 내내 시소를 타는 것처럼 긴장감을 만들어냅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기생충과 기생충 사이, 그리고 기생충과 숙주 사이 대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근세는 기우(최우식)를 돌로 치고(이때 대부분 기우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집밖으로 나와 기정(박소담)을 찌릅니다. 충숙(장혜진)은 근세를 죽이고, 기택은 박사장을 찌릅니다.



이 살벌한 살인들의 이유를 살펴봅시다. 근세는 자신을 지하에 살게 해준 박사장에 대한 존경심에서 기택 가족을 죽이려 했을 것입니다. 죽어가면서도 “리스펙트!”를 외치는 게 그 증거입니다. 충숙은 딸에 대한 복수와 더불어 기생충 사이 권력투쟁을 마무리하기 위해 근세를 찔렀을 것입니다. 살인자인 근세를 죽임으로써 박사장으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려는 것이죠. 충숙이 8분 밖에 남지 않은 급박한 상황에서도 집안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짜파구리를 끊임으로써 연교(조여정)의 신뢰를 유지하려 했던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충숙은 그만큼 이 집에 필사적으로 남고 싶었습니다.


여기서 마무리됐다면 이 뜨거운 오후의 피튀기는 살인 사건은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되고 박사장 가족과 기택 가족은 어쩌면 평화를 되찾았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기택은 뜬금없이 박사장을 죽입니다. 대체 왜 그랬을까요? “위대하신 박사장님”이라고 칭송하던 그를 대체 왜 죽인 것일까요?



영화에선 지울 수 없는 반지하 냄새가 결정적 이유로 제시됩니다. 하지만 냄새 이전에 근세에 대한 동병상련의 연민이 있었습니다. 같은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하다가 망해본 경험(그놈의 먹거리 X파일 방송 한방에)으로 인해 기택은 근세에게 호기심을 갖게 됐습니다. 지하로 내려간 기택은 근세에게 어떻게 여기서 4년이나 살 수 있었냐고 물어보고, 근세는 살아보니 살아지더라고 답합니다.


이처럼 근세에게 동질감을 느끼던 기택은 쓰러진 근세에게서 나는 악취 때문에 코를 움켜쥐는 박사장을 보고는 참을 수 없도록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안 그래도 자꾸만 냄새를 지적해 짜증이 나던 차였습니다. 근세를 향한 연민은 이제 뜨거운 태양빛 아래서 복수심으로 전환됩니다.


박사장을 죽인 기택은 근세가 살던 지하실로 들어갑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순환구조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기택은 지하에서 근세처럼 살아가다가 독일인 숙주에게 빌붙기 위해 찾아올 또다른 기생충 가족과 마주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영화는 무한반복되는 구조가 됩니다. 빈부격차가 결코 줄어들지 않고 대물림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최적의 구성이겠죠.



또다른 해석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기생충인 기택은 숙주인 박사장을 죽였습니다. 이는 자살 행위와 다름없습니다. 기생충은 숙주와 공생관계를 이루어야만 생존이 가능합니다. 숙주와 기생충은 권력구조로 보면 상하로 나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관계입니다. 기택 가족은 박사장에게 아이들 과외교사와 운전기사,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기생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이 무조건 일방적이지 않기에 오래 공존할 수 있는 것이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기생충이 숙주를 죽였다는 것은 자살을 택한 것과 같습니다. 다른 숙주를 찾아나서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제 기택이 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숙주를 찾는 것입니다. 기택은 죽은 근세를 대체해 자발적 감금 상태로 들어갑니다. 그 결과 독일인 숙주의 기생충이 되었습니다. 기우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기생충이 자립하는 기적을 보여주는 듯했지만 이내 희망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렇게 쉽게 돈을 벌어 자립하고 계급 전복을 할 수 있다면 애초 이 영화가 성립할 수 없었겠죠.



이처럼 ‘기생충’에는 부자와 빈자 간 심각하게 벌어진 계층 차이 뿐만 아니라 두 기생충 간의 미묘한 계급투쟁 과정도 담겨 있습니다. 계급투쟁의 결과는 새로운 기생충이 오래된 기생충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문광 가족은 전멸했고, 기택 가족은 넷 중 셋이 살아남았습니다.


빈부격차는 이처럼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도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오히려 빈부격차가 고착화되면 빈자들의 싸움이 더 치열해집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적은 의외로 가난한 자들입니다. 부자들은 기택과 충숙이 하는 말처럼 다리미처럼 구김살이 없이 착하고, 기우가 하는 말처럼 언제 모여도 쿨하고 멋져 보이는 반면, 가난한 자들은 항상 결핍을 안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갈등은 자주 빈자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공생을 모르는 기생충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영화의 제목인 ‘기생충’은 그래서 더 상징적입니다.



지하실이라는 자궁


박사장의 저택은 ‘설국열차’의 기차와 닮았습니다. ‘설국열차’의 기차가 수평으로 미지의 앞칸을 향해 나아가는 구조라면 ‘기생충’의 집은 지하로 내려가면서 미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또 둘다 빈부격차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배경이라는 점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섹슈얼리티에 관한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은 몇 년 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기차가 성기의 상징물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기차 안에서 보면 여성의 질이고, 밖에서 보면 남성의 페니스라는 것입니다.


그 관점을 박사장의 집에 대입해 보겠습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박사장의 집은 수직을 강조하는 이 영화에서 의외로 수평적입니다. 세트로 지었다는 박사장의 집 내부 거실은 2.35:1의 스크린 비율에 딱 맞게 한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설국열차’의 앞칸을 보는 듯합니다. 이 집 역시 안에서 밖을 내다보면 여성의 성기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습니다.



문광(이정은)이 남편을 찾아 지하로 내려갈 때 카메라가 따라 내려가는 장면 기억하시나요? 카메라가 남성기가 되어 침투하는 듯한 이 장면의 끝은 거대한 자궁과도 같은 벙커였습니다. 벙커 안에는 근세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대만 카스테라 사업으로) 사회에서 실패한 사람인데 4년이나 지내다 보니 이곳이 너무 좋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디 앨런 영화 중 ‘섹스에 대해 알고 싶은 모든 것’에 여성의 몸 속에 들어간 남자 이야기가 나오는데 근세가 딱 그런 사람입니다. 쌓여 있는 콘돔 포장지는 벙커가 자궁의 은유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자, 여성의 성기 같은 대저택 지하에 한 남자가 아무도 모르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민머리에 말도 어눌합니다. 원래 박명훈 배우의 헤어스타일은 민머리가 아닙니다. 근세 배역을 위해 일부러 헤어스타일을 바꾼 겁니다. 왜일까요?


지하실이 자궁이라면 근세는 태아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정말 근세의 외모는 아기같을 뿐더러 문광은 지하로 내려오자마자 근세에게 아기젖병을 물려주기까지 합니다. 근세는 머리로 스위치를 들이받으며 박사장에게 신호를 보내는데 이는 태아가 엄마의 배를 차면서 아빠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애쓰는 것과 닮았습니다.


지하실에서 한바탕 혈투가 벌어지고 나서 문광은 쓰러져 뇌진탕을 일으키고 근세는 피투성이가 돼 온몸이 묶입니다. 이때 박사장 가족이 집으로 들어오고 기택, 기우, 기정은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거실 바닥에 숨습니다.



모두 숨죽인 순간, 박사장 부부가 거실로 나와서 서로의 성기를 애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상황이 벌어질 때 주위 상황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닥에는 기택 가족이 누워 있고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아들 다송(정현준)이 인디언 텐트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 장면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신에게 무언가를 기원하는 것 같은 구도입니다. 집밖 인디언 텐트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처럼 보입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빌었을까요? 다산의 신에게 아기를 점지해달라고 빌었을까요? 눈여겨 볼 것은 이 의식이 행해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태아인 근세가 자궁 밖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는 출산에 해당합니다.



그렇다면 의식이 성공한 것일까요?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출산은 출산이되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는 출산이니까요. 몰래 숨어 있던 기택 가족 때문에 부정을 탄 것이죠. 박사장 가족 중 유일하게 근세의 존재를 알고 있던 사람은 다송이었습니다. 인디안 텐트에 있던 다송은 태아의 모르스 부호 신호를 알아차려 “도와줘”라는 신호를 받아적습니다. 어릴 적 귀신인 줄 알았던 근세를 본 것도 다송입니다. 하지만 박사장 부부는 다송이 적은 이 메시지를 보지 못했겠죠. 이런 부주의함이 결국 파국을 막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박사장 부부가 잠든 틈을 타 기택 가족은 집을 빠져나옵니다. 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물은 계단 아래로 흐르더니 결국 반지하 집까지 범람합니다.


비는 왜 이토록 매몰차게 쏟아지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출산이 곧 시작될 것임을 암시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택에 외부자의 침입이 있었고 그 충격 때문에 자궁 속 태아인 근세의 상태가 위독합니다. 이때 양수가 터졌습니다. 대저택이라는 거대한 질에서 양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외부자들은 놀라서 집으로부터 멀리 도망칩니다.


기택은 멈춰 서서 가만히 돌아봅니다. “나에게 계획이 다 있다.” 하지만 기택의 계획은 무계획입니다. 질 속으로 침입했는데 그 안에 아이가 있습니다. 노랗게 질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수밖에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파티가 벌어지고 근세는 마침내 스스로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영양분을 공급해주던 아내도 죽었기 때문에 밖으로 나오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4년이나 갇혀 있어 무척 조루한 태아는 무작정 칼을 휘두르며 세상에 대한 분노를 드러냅니다. 기우와 기정은 근세에게 일격을 당하고 이때 태아를 제압하는 것은 충숙입니다. 충숙은 의식이 벌어질 때 가담하지 않았기에(바닥에 숨어 있지 않았기에) 태아를 죽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택은 왜 박사장을 죽일까요? 어쩌면 박사장에 대한 성적인 라이벌 의식 때문은 아닐까요? 기택은 연교와 사우나실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던 순간 연교에게 굳이 악수를 청합니다. 박사장과 기택 모두 소파에서 아내와 자는 장면이 나오지만 더 뜨거운 쪽은 박사장과 연교입니다. 꼭 이것만은 아니겠지만 박사장에게 칼을 꽂을 때는 성적인 이유도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택은 지하실로 들어갑니다. 새로 온 독일 주인이 기택에게 영양분 공급원이 되어줍니다. 이제 기택은 남궁현자가 지은 저택의 아무도 모르는 비밀 공간에서 근세를 대신해 새로운 태아가 되어 또다른 출산을 기다리며 살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 보면 영화 ‘기생충’은 대저택이 잉태한 태아의 불운한 출산과 새로운 임신 과정으로 읽힙니다. 대저택이라는 산모는 건강하지 못한 자본주의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죠.



고정관념


영화 초반부에 기우의 친구 민혁(박서준)이 기택에게 할아버지의 선물이라며 산수경석을 들고 옵니다. 충숙은 “먹을 거 사오지”라고 말했다가 기정에게 핀잔을 듣습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 힘든 기택네 식구에게 산수경석은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입니다. 차라리 충숙의 바램처럼 한우를 사왔다면 훨씬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됐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당연한 조합을 거부합니다.


의외의 설정은 산수경석뿐만이 아닙니다. 사실상 이 영화의 모든 설정이 고정관념을 벗어납니다.



한국영화나 드라마에서 부잣집을 표현할 땐 주로 재벌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세, 3세가 등장해 악행을 저지릅니다. 기택 역시 박사장을 보고는 막연하게 “한 집안의 가장이자 회사의 총수” 이런 대사를 하죠. 그런데 박사장은 재벌이 아닙니다. ‘Another Brick’이라는 IT 기업을 운영하는 젊은 CEO입니다. 성격이 괴팍하지도 않습니다. 냄새에 예민하고 운전기사나 가사도우미를 깔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무시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 정도의 예의는 갖춘 부자입니다.


부잣집 사모님 연교는 하얀 도화지처럼 순수해 보입니다. 기택 가족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믿어줍니다. 기존 한국영화에서 보던 쌀쌀맞고 냉정한 사모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수다쟁이에 사교성도 좋아 친구도 참 많습니다. 남편에겐 꼬박 존댓말을 쓰면서 가부장적인 모습도 보여줍니다.



기택네 식구도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반지하에 살 정도로 가난하지만 사실 겉보기에는 그렇게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기우의 뽀얀 살결, 기정의 있는 척하는 표정을 보고 있으면 연교 아니더라도 그들이 부잣집 자녀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충숙은 여느 엄마와 달리 해머던지기 선수 출신입니다. 기택은 가부장적이라기보다는 아내한테 꼼짝 못하고 또 아들 딸에게는 무척 자상한 아빠입니다. 다른 영화와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난한 집안의 불화를 기택 식구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정관념을 깨는 의외성은 계속됩니다. 영화 초반부에 출연하는 피자나라의 젊은 여성 점장은 전혀 점장 같지 않아 보입니다. 영화 에필로그에서 기우가 깨어날 때는 형사 같지 않은 형사와 의사 같지 않은 의사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고정관념을 깨는 캐릭터들은 ‘기생충’을 지켜보는 또하나의 재미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