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1977년 독일 베를린에서 정신과 의원을 운영 중인 클렘페러 박사의 사무실로 패트리샤(클로에 모리츠)가 찾아온다. 무언가 환영을 보는 듯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는 그녀는 마녀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어딘가로 사라진다. 미국 오하이오에서 베를린 무용 아카데미를 찾아온 수지(다코타 존슨)는 패트리샤가 떠나 공석이 된 기숙사에 입학 허가를 받는다. 전설적인 무용수 블랑(틸다 스윈튼)은 수지의 뛰어난 무용 실력을 눈여겨 보고 자신이 만든 공연 ’Volk(민중)’의 주인공으로 발탁한다. 애초 주인공을 맡기로 되어 있던 올가(엘레나 포키나)는 의문의 죽음을 맞고 클렘페러 박사는 패트리샤와 수지의 절친 사라(미아 고스)를 찾아와 무용 학교에 비밀 공간이 있다고 말해준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의 사라


지난 16일 개봉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서스페리아'는 강렬하고 무시무시한 장면들로 2시간 3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을 끌고 가는 영화다. 이탈리아 선배 감독인 다리오 아르젠토가 1977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를 리메이크했지만 원작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인해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하다. 이 놀라운 변신은 어떻게 가능했는지 '서스페리아'를 파헤쳐보자.



고전 반열에 오른 이탈리아 호러영화


지난해 영국 신문 가디언은 공포영화 감독들을 모아놓고 가장 무서운 호러영화 장면을 꼽게 했다. 다수가 선택한 장면은 '서스페리아'(1977)의 오프닝 시퀀스였다.


그전까지 공포영화는 처음엔 평화로운 일상을 보여주다가 서서히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서스페리아'는 처음부터 기괴하게 시작한다. 오프닝 시퀀스는 독일 뮌헨 공항에 도착한 주인공 수지(제시카 하퍼)가 폭우가 쏟아지는 공항을 빠져나와 택시를 타고 무용학교로 가는 단순한 장면이지만, 고딕양식의 과장된 컬러 사용, 아트록 밴드 고블린의 기괴한 음악, 어둠 속에 핏물처럼 쏟아지는 비, 음악 사이를 휘감는 음산한 마녀 목소리가 불안한 기운을 고조시킨다. 이런 스산한 분위기는 영화 내내 지속된다. 당시 이 영화의 미국판 포스터엔 이런 문구가 있었다. "마지막 12분보다 처음 92분이 더 무섭다."(당시 미국판 러닝타임은 92분이었다.)


다리오 아르젠토의 '서스페리아'(1977)


'서스페리아'는 깜짝 쇼를 펼치는 여느 공포영화들과 달리 공포영화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빨강, 파랑 등 원색의 과감한 사용, 무용학교 내부의 화려한 미장센, 조각처럼 떨어지는 빛, 중독성 강한 음악 등 미학적인 장치들은 몸이 꺾이고 피가 쏟아지는 고어 장면에서도 돋보였다. 무용학교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배후에 마녀가 있다는 영화의 스토리보다도 강렬한 이미지들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 이 영화는 시간이 흘러 호러영화의 고전 반열에 올랐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


가장 무서운 영화의 아름다운 리메이크


이탈리아 출신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14살 때 '서스페리아'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영화를 본 뒤 영화가 사람의 내면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것 그대로의 생생한 경험에 매료돼 시간이 지나도 영화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느새 40대가 된 그는 '서스페리아'를 리메이크 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시작은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8년 구아다니노는 '아이 엠 러브'를 준비하던 중 아르젠토를 만나 '서스페리아'의 리메이크 허락을 받아낸다. 이후 틈틈이 제작 기회를 엿보던 그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으면서 투자를 받을 수 있었다. 그에게 '서스페리아'는 전작과는 전혀 다른 모험이었다.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뜨거운 여름을 배경으로 떨리는 감정 변화를 포착해낸 작품이라면 '서스페리아'에선 스산한 겨울을 배경으로 과감한 몸동작과 여러 상징적 요소들을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구아다니노는 '서스페리아'가 단순한 리메이크를 넘어 원작에 '오마주'를 바치는 새로운 작품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원작의 이야기 골격을 유지하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창조해 자신만의 '서스페리아'로 재탄생시켰다. 독일 무용 학교로 미국 소녀가 전학 온다는 설정은 같지만 원작의 가장 큰 특징이던 고딕 양식의 인위적 미장센과 뇌리에 강하게 남는 고블린의 음악은 과감하게 버렸다. 원작에서 모호했던 시대상과 페미니즘 설정은 강화했고, 춤은 사드마조히즘을 연상시킬 정도로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였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


우선 원작의 화려한 벨벳 느낌의 미장센 대신 구아다니노는 자연스러운 햇빛을 끌어들였다. 탈색된 화면에 쏟아지는 겨울 햇빛은 원작과 다른 느낌으로 불길함을 묘사한다. 또 원작에서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던 카메라 대신 화려한 커트분할과 강렬한 교차편집으로 불안감을 표현했다.


고블린의 중독성 강한 음악은 '서스페리아'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지만 구아다니노는 이를 버리고 새로운 사운드트랙을 시도했다. 이를 위해 그는 라디오헤드의 톰 요크에게 처음으로 영화음악에 도전하도록 설득했는데 요크는 1960년대 독일 실험음악 크라우트록에서 영감 받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며 화답했다.


올리비에 상을 수상한 안무가 데미안 잘렛이 전설적인 무용수 마사 그레이엄과 피나 바우쉬의 느낌을 살려 만든 춤은 영화에서 마녀의 마법과 비슷한 역할을 한다. 막이 계속되면서 강렬해지는 춤은 영화에서 감정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클라이막스를 담당한다.


이처럼 원작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시청각 요소들을 버린 것은 영리한 결단으로 보인다. 원작의 향수에 기대지 않으면서 감독이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


1977년 야만의 시대와 페미니즘


리메이크작이 가장 많이 달라진 지점은 1977년 분단된 베를린(원작의 배경은 독일 소도시 프라이부르크)이라는 명확한 시공간 설정과 페미니즘을 강조한 것이다.


'독일의 가을'이라 불리던 1977년은 서독의 급진적 무장단체인 적군파(RAF)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다. 그해 10월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와 인질 살해 사건은 테러의 절정이었다. 또 그 해는 유럽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거세게 불던 시기이기도 하다.


감독은 원작이 처음 선보인 1977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 해를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하면서 실제 역사적 사건을 영화 속에 담았고 이를 영화의 주제로까지 삼았다. 즉, 적군파의 테러를 나치의 홀로코스트 유산과 연결시켜 권력의 무자비한 남용을 비판하고, 모권사회인 무용 아카데미와 중세 마녀사냥을 연결해 현대에도 지속되는 여성 혐오의 근원을 파헤치는 식이다.



그는 지난해 미국 영화잡지 할리우드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스페리아'는 여성을 마녀에 비교한 여성 혐오와 관련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여자들은 마녀로 몰려 처벌 받았죠. 저는 아예 자신을 마녀라고 칭하는 여성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마녀로 몰려 희생당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오히려 자신의 힘을 당당히 외칠 수 있게 될 테니까요."


6막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놀라운 스토리 반전을 보여주는데 그 바탕엔 감독이 말한 마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자리잡고 있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의 수지


아르젠토는 영국 작가 토마스 드 퀸시의 19세기 에세이 '심연의 한숨'에 등장하는 세 마녀 중 한숨의 마녀 서스피리룸을 소재로 가져왔는데 그동안 서스피리룸은 다양하게 해석돼 왔다. 모성애의 현현 혹은 칼 융이 말한 무의식의 발현으로 설명되기도 했다.


구아다니노는 이를 더 발전시켰다. 그는 아예 이 영화가 '모성'에 관한 영화라고 말했다. 모성애는 아이를 위해 일방적으로 헌신하는 엄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모성은 그토록 단순하지만은 않다. 자신을 위해 아이를 희생시키는 엄마, 아이를 조종해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엄마 역시 다른 층위에서 모성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영화 후반부에 여성들(블랑, 마르코스, 수지) 사이에서 권력 전복이 이루어지는데 이 장면엔 모성의 여러 층위가 포함돼 있다. 여러 '모성들' 중 자신이 엄마로서 갖게 된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자만이 에필로그에서 살아남는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의 블랑


인간 본성과 무의식을 표현한 틸다 스윈튼


고전 호러영화를 예술영화로 승화시킨 대단히 상징적이고 강렬한 이 영화의 버팀목은 다코타 존슨과 틸다 스윈튼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로 스타가 된 존슨은 주인공 수지 역할을 맡아 파워풀한 춤으로 눈길을 잡아 끈다.


스윈튼은 연기력에 있어서는 설명이 필요 없는 배우지만 이 영화에선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무려 1인 3역을 맡았는데 그중 하나는 엔드크레딧이 올라가도 도저히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감쪽 같다. 캐스트 대부분이 여성인 이 영화에는 주요 배역 중 유일한 남성이 있는데 82세의 정신과 전문의 클렘페러 박사다. 처음엔 '루츠 에버스도르프'라는 배우가 이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나중에 그 이름이 스윈튼의 가명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의 클렘페러 박사


무용학교 밖에서 무기력하게 마녀를 추적하는 클렘페러를 스윈턴이 연기함으로써 그녀는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에서 인간 본성의 세 측면을 상징하는 이드(마르코스), 에고(블랑), 슈퍼에고(클렘페러)를 모두 연기함과 동시에 융의 정신분석학에서 무의식의 두 측면인 아니마(남성의 여성성)와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성)까지 완성시킨다.


영화 '서스페리아'(2018)


이처럼 구아다니노의 '서스페리아'는 곱씹어 볼수록 많은 것들을 읽어낼 수 있는 엄청난 고민의 산물이지만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원작과 다른 매력의 아름다운 영상, 음악, 춤은 시종일관 시선을 잡아끄는 반면 손에 잡히지 않는 스토리 라인과 여러 층위의 상징은 관객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때문이다. 전작들에서 억압받는 인간의 욕망을 때론 난도질하듯(아이 엠 러브), 때론 쓰다듬듯(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때론 코믹하게(비거 스플래쉬) 그려낸 감독은 '서스페리아'에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듯 초현실적인 영역으로 넘어갔다. 전작들에서 욕망을 억압하는 기제가 계층, 성정체성 등 사회 속에 내재된 갈등이었다면 '서스페리아'에선 파시즘, 정신분석학, 페미니즘 등 여러 분야로 뻗어 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동시에 하려다 보니 억지로 의미 부여한 듯한 장면도 있어 의욕 과잉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시청각적 측면에서 빼어난 완성도로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동시에 지적 유희까지 자극하는 영화는 흔하지 않다. 극장에서 내려가기 전에 이 작품을 즐길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란다.


서스페리아 ★★★☆

최면을 거는 듯한 춤의 마력. 숨가쁜 교차편집과 어둠 속 마녀의 춤 장면은 환상적.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5649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