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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시작해 뜨겁게 끝맺다


영화는 전두환 동정을 보여주는 대한뉴스의 소위 '땡전뉴스'로 시작해 6월 항쟁 영상으로 마무리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전두환 시대가 무너지는 1987년 1월부터 6월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재현한다.


영화는 릴레이 계주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그날'의 불씨를 피웠는지를 추적해간다. 박종철(여진구)의 부검을 꼭 해야겠다며 화장하라는 지시를 묵살한 최환 검사(하정우), 촌지를 주며 부검기록을 조작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 보도통제에도 아랑곳 않고 목숨 걸고 취재에 나선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와 동아일보 윤상삼 기자(이희준), 지명수배된 재야인사 김정남 선생(설경구)을 보호하는 스님과 김승훈(정인기), 함세웅 신부, 수감된 민통련 상임위원장 이부영(김의성)을 보호하며 목숨을 무릅쓰고 그가 쓴 글을 김정남에게 전달한 교도관 한병용(유해진)과 안유(최광일), "뭐라도 해야죠"라며 시위를 주도한 이한열(강동원) 등 영화는 '그날'은 단지 한두 명의 영웅적 행동이 아닌 우리들 모두의 용감한 행동들이 연쇄작용을 일으켜 마침내 이룩해낸 역사라고 말한다.



영화는 '레미제라블'처럼 '호헌철폐, 독재타도' 구호가 장대하게 울려 퍼지는 시청앞 광장의 모습을 부감으로 보여주며 마무리한다. 한병용의 조카 연희(김태리)는 영화 속에서 가장 평범한 대학생이었지만 우연히 만난 오빠(객석을 술렁이게 하는 강동원의 쓰임새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에 이끌려 각성하고 시청앞 광장 맨꼭대기에 선다.



서슬 퍼렇던 시대의 몰락


민중이라 불리는 이 수많은 시민들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은 남영동 안기부 대공분실의 박처장(김윤석)이다. 최검사, 윤기자, 김정남, 한병용 등 각각 다른 곳에서 활약했던 이들은 박처장을 고리로 연결된다.


전두환을 받들고 강한 카리스마로 부하들을 이끄는 박처장은 영화 속에서 모든 악의 역할을 혼자 뒤집어 쓴다. 안기부장(문성근)도, 치안본부장(우현)도 박처장의 카리스마에 미치지 못한다.



어린 시절 한국전쟁 당시 공산당원이 된 형에게 가족이 몰살당한 뒤 남쪽으로 내려와 오로지 '빨갱이'를 잡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박처장은 전두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레드 콤플렉스'에 빠진 그는 수도 없이 고문을 자행하면서 그것이 애국이라고 믿는다. 애국이라고 믿지 않으면 지금껏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보잘 것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에게 세상은 빨갱이와 빨갱이 아닌 것으로 나뉜다. "빨갱이 잡는데 협조하지 않으면 당신도 빨갱이로 간주하갔어." 이 한 마디면 기무사든 경찰이든 검찰이든 그 앞에 바짝 엎드려야 한다.


독재권력을 유지하는 폭력의 자기장이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민중의 힘에 의해 하나씩 뚫려나가면서 호랑이 같던 박처장의 위세도 점점 무너져간다. 영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후반부에 최검사, 윤기자, 한병용과 교도소장 등이 박처장과 맞닥뜨리는 장면을 삽입하면서 관객에게 권력구도 변화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모두가 그 시대의 주인공


이처럼 '1987'은 신문기자부터 교도관까지, 스님과 신부부터 아빠 잃은 대학생까지 모두가 함께 했던 그날을 향해 차곡차곡 드라마를 쌓아간 뒤 후반부에 이르러 장엄하게 터뜨리는 영화다. 1987이라는 타이틀이 나오는 마지막 장면에선 가슴이 먹먹해져 엔드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다. 이 라스트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이미 모든 사람이 아는 30년 전 '그날'은 스테레오타입화된 인물들에 의해 정공법으로 스크린에 펼쳐진다. 수많은 캐릭터들 중 누구도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이 없다. 검사, 기자, 교도관, 신부, 대학생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마땅히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한다. 그런데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는 데도 영화에는 시종일관 긴장감이 넘쳐 흐른다. 1987년은 그런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았던 시대, 상식이 억압받던 시대, 거리에서 불심검문이 횡행하던 시대, 폭력이 눈과 입을 막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3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1987년으로부터 멀리 떠나와 있다. 최소한 막무가내식 국가 폭력, 불심검문은 사라졌다. '그날' 그들의 용기가 끝내 승리한 덕분이다. 박종철, 이한열뿐만 아니라 그날 그곳에서 자기 할 일을 해낸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박처장'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악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레드 콤플렉스와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다른 박처장들이 여전히 우리 사회 기득권의 한 부류로 살아가고 있다. 1987년으로부터 30년 후, 광화문에서 6월 항쟁을 능가하는 규모의 촛불 시위가 벌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장준환 감독


386세대 장준환 감독의 부채의식


'지구를 지켜라!'(2003),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를 만든 장준환 감독은 89학번이다. 영화 속 87학번 연희보다 두 학번 아래다. 그는 자신의 바로 윗세대의 이야기인 '1987'을 만들면서 영화 속 거의 모든 인물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처리했다. 그만큼 스토리는 실제 사건을 재현했고, 또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다.


'1987'은 상상력 가득했던 감독의 전작들과 달리 리얼리티에 기반한 영화지만 세 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1980년대에 대한 고통스런 묘사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신하균)가 가정폭력의 희생자가 된 것,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 화이(여진구)가 다섯 아버지의 실험대상이 된 것은 모두 괴물 같은 시대였던 1980년대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의 초창기 단편영화 '2001 이매진'(1994)의 주인공 역시 1980년대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면서 자랐다.


선과 악의 경계에 서는 조반장을 연기한 박희순. 그는 '2001 이매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1987'에서 장 감독은 비로소 자신의 머릿속에 비뚤어진 공포의 원형으로 남아 있던 1980년대를 가장 리얼하게 재현하고는 이를 하나씩 돌파해간다. 그러니까 장 감독이 '1987'을 전작들처럼 돌려서 말하는 방식으로 우회하지 않고 정공법으로 만든 것은 그로서도 자기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도전이었던 셈이다.


그 결과 '1987'의 결말은 계몽적이다. 역사의 그날, 이토록 위대한 국민이 있었고, 철모르던 여대생마저도 감화돼 그날 광장에 참여했다는 스토리는 사회주의 국가의 옛날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광주를 최초로 정면으로 응시한 상업영화 '택시운전사'가 최대한 그 시대에 예의를 갖췄듯, 박종철과 이한열이 등장하는 첫 상업영화인 '1987'이 시대에 예의를 지키기 위해 메시지를 강조한 것은 필연적인 선택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장준환 감독이 '2001 이매진'으로 영화를 시작하던 순간부터 마음에 지고 있던 1980년대에 대한 빚을 갚는 그만의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1987 ★★★★

검사, 기자, 교도관, 스님, 신부, 대학생… 모두가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그날’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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