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번 생은 글렀어. 다시 태어나면 꼭...”

아무 생각 없이 내뱉고 나면 초라해 보이는 말이 있다. 어쩔 수 없어, 더 이상은 해볼 도리가 없다는 말. 그래서 이번 생은 글렀다는 말.


윤회를 믿는다는 것이 꽤 근사해 보이던 때가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니, 전생에 또 다른 내가 있었다니 얼마나 놀라운가. 하지만 지난 겨울 인도에 갔을 때 나는 힌두교도들이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기 위해 평생 기도한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들에게 윤회는 업이자 끊어야 할 사슬이었다. 죽은 뒤 화장해 갠지스 강에 뿌려지면 더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시신은 기차를 타고 갠지스 강이 가까운 바라나시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바라나시 거리 한복판에서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라고 느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가방을 앞으로 메고 얼굴엔 마스크를 쓰고 먼지 가득한 거리를 걸었다. 자전거, 릭샤, 오토바이, 자동차, 달구지, 소, 양에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뒤엉켜서 정신이 없었다. 경적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쉴 새 없이 울려 귀청을 따갑게 했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멈춰 서면 민폐가 되는 이 거리에서 내 발은 이 블록에서 저 블록까지 직선으로만 걸었다. 소똥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 블록 모퉁이에 도착했을 때 한숨 돌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바쁘게 어디론가 움직이는 사람들 뒤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손님을 태운 릭샤 기사들은 먼지를 마시면서도 웃고 있었고, 손님을 태우지 못한 기사들은 골목에 릭샤를 세워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한 남자는 끊임없이 가격 흥정을 하려 했다. 거의 넘어갈 뻔했지만 나는 더 흥미로운 광경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행렬의 맨 앞에는 붉은색 천을 온몸에 휘감은 남자가 꽃을 주렁주렁 매단 나무줄기를 들고 있었는데 꼭대기에는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린 연꽃이 매달려 있었다. 근엄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그 남자 뒤로 여러 남자들이 어깨에 상여를 메고 따라왔다. 상여 위에는 늙은 시신이 사리를 입은 채 누워 있었다. 남자들의 행렬 뒤엔 제사용품을 머리에 이고 가는 여자들이 보였다.



나는 여자들이 지나간 뒤 행렬의 맨 뒤에 따라붙었다. 무리지어 함께 걸으니 혼자서 길을 뚫고 갈 때보다 훨씬 수월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인도인들은 시신이 지나가도록 길을 내주었다. 행렬은 갠지스 강으로 향했다. 갠지스 강변에는 80개의 가트(계단)가 있는데 그중 몇 곳에선 매일 저녁 다함께 춤추고 노래하는 힌두교 제사의식 ‘뿌자’가 행해진다. 종교가 곧 삶인 이들은 갠지스 강에 머리를 담그면 죄가 씻겨 진다고 믿는다. 세상에 그렇게 쉬운 방법이 있을까 싶지만 어쩌면 인생이란 믿는 대로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트 중에는 화장터로 쓰이는 곳도 있다. 정성스레 시내를 지나온 시신 역시 이곳으로 와서 차례를 기다린다. 사리를 정성스레 입은 시신은 곧 불타 강물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여기서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으면 큰아들이 삭발하고 어머니가 죽으면 막내아들이 삭발한다. 이때 머리 뒷부분을 조금 남겨놓는데 이는 죽은 자의 영혼과 소통하는 의미라고 한다. 장례 기간이 끝나면 아들은 남은 머리를 모두 잘라 죽은 자의 영혼과 영영 이별한다.


화장터에 매캐한 연기가 자욱하다.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시신들, 태우기 위해 준비된 나무들, 타고 남은 재들, 흰 옷을 입은 인부들, 목욕하러 온 주민들, 구걸하는 노인들, 관광 온 외국인들, 그리고 혹시 먹을 것 없나 찾아온 굶주린 개들까지 한데 뒤엉켜 갠지스 강 가트는 시내만큼이나 북적거린다.



이윽고 차례를 기다리던 시신 한 구가 화장터로 들어간다.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아내의 남편이었고, 오래 산 노인이었고, 아마도 풍요보다는 가난을 몸으로 실천하며 힌두교에 영혼을 바쳤을 그의 시신이 타들어간다. 삭발한 큰아들은 아버지가 더 좋은 세상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제 고통의 업을 끊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해달라고 정성스럽게 두 손을 모은다. 주위의 인도인들이 시신을 향해 외친다. "Har Har Gange!" 산스크리트어로 "갠지스 강의 신이시여, 고통을 거둬 가시고 소원을 이뤄주소서"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도 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도록 들고 따라해 본다. “하르 하르 강게!”



그토록 강렬한 기억이지만 인도에서 돌아온 뒤 오래지 않아 바라나시와 갠지스 강에 대한 기억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거푸 이어지는 고된 일상은 일상 밖에 있는 모든 기억을 차츰 앗아 간다. 윤회와 고통의 업은 가까이 두기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였다.


계절이 세 번 바뀐 어느 날, 나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보게 됐다. 평소 다큐멘터리 영화를 찾아서 보는 편까지는 아니었기에 반신반의했지만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아름답고 슬프다”는 지인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포스터에 동자승과 늙은 고승의 해맑은 표정이 담긴 영화의 제목은 <다시 태어나도 우리>였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사진 제공=엣나인 필름)


영화는 인도의 북쪽 지역에 위치한 라다크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인도를 여행할 때 꼭 가보고 싶었지만 델리에서 항공편이 주 2회 밖에 없어서 포기해야 했던 곳이다. 나는 라다크를 화면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잊고 있던 인도에서의 시간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나 눈물이 났다.


영화는 라다크에 사는 앙뚜라는 소년과 그의 보호자 우르갼의 우정을 그린다. 앙뚜는 자신이 전생에 티베트의 고승 린포체였다고 믿는 아이다. 라다크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가본 적도 없는 티베트 캄을 그림으로 그리고, 과거 제자들의 이름을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리워한다. 처음에 반신반의하던 승려들은 명백한 증거 앞에서 그가 린포체의 환생이라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작 티베트 캄의 사원은 소년을 데리러 오지 않는다. 중국의 경계가 삼엄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라다크 사원도 더 이상 앙뚜를 보호하지 못하고 그를 추방한다. 고작 11살인 앙뚜는 이제 갈 곳이 없다. 그가 의지할 이는 어릴 적부터 그를 키워온 노인 우르갼 뿐이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사진 제공=엣나인 필름)


린포체를 모시게 돼 영광이라고 말하는 이 무학의 노인은 소년에게 경어체를 쓰며 그를 극진히 키워왔다. 때론 눈싸움을 하고 썰매도 타면서 즐겁게 놀다가 불경 공부를 돕기도 한다. 앙뚜에겐 우르갼과 동네 친구 몇 명이 전부다. 노인이 며칠 동안 마을을 다녀오려 하면 앙뚜는 세상이 무너진 듯 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두 사람은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 그 이상이다.


우르갼은 앙뚜가 린포체인 줄 모를 때부터 키워왔다. 노인은 소년이 이처럼 버림받은 채 방치되는 것을 견딜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소년과 만난 지 10년째 된 어느 날 앙뚜를 티베트로 데려가기로 결심한다. 린포체는 마땅히 티베트에 있어야 한다는 게 이유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사진 제공=엣나인 필름)


두 사람은 라다크에서 내려와 북인도 땅을 걷는다. 이때 바라나시는 속세의 도시로 잠깐 등장한다. 앙뚜와 우르갼은 어리숙한 여행객이었던 나처럼 바라나시 거리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두 사람은 갠지스 강으로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시신들을 보며 어리둥절해 한다. 반복되는 삶의 고통을 끊기 위해 죽어서 갠지스 강을 찾는 그 절박한 행렬을 앙뚜는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쩌면 윤회의 고통을 이미 겪고 있는 앙뚜에게 그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인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도시 바라나시를 떠나온 앙뚜와 우르갼은 히치하이킹으로 트럭을 잡아타고 마침내 티베트 시킴까지 찾아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르갼은 앙뚜를 진정한 린포체로 교육시켜줄 승려에게 맡기고는 돌아선다. 우르갼이 자신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눈치 챈 앙뚜는 우르갼에게 가지 말라고 애원한다. 우르갼은 자신도 울고 있으면서 말없이 소년의 눈물을 닦아준다.


“린포체님, 저는 여기까지예요.” 우르갼은 소년에게 깍듯한 예우를 갖춰 작별인사를 한다. 그 모습에 앙뚜는 더 이상 어리광을 부리지 못하고 우르갼을 놓아준다. 라다크와 티베트라는, 세상에서 가장 때 묻지 않은 자연 풍광으로부터 시작해 그 어떤 극영화보다 슬픈 눈물로 끝맺는 이 영화는 내가 올해 본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화로 기억에 남아 있다. 우르갼의 주름살과 앙뚜의 해맑은 표정이 영화를 진정성 가득한 작품으로 만든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사진 제공=엣나인 필름)


<다시 태어나도 우리> (사진 제공=엣나인 필름)


영화를 만든 문창용, 전진 감독은 9년 동안 실제 앙뚜와 우르갼을 따라다니며 촬영한 끝에 이 감동적인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두 사람은 처음엔 환생이 아니라 티베트의 의학을 다루려 했다고 한다. 라다크에서 전통 의술로 진료하는 우르갼을 취재하다가 그의 옆에 다섯 살난 앙뚜라는 동자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듬해 여섯 살이 된 앙뚜가 불교협회로부터 린포체로 인정을 받자 영화의 방향을 바꾼 것이다.


린포체는 선출되거나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윤회에 의해 계승된다. 린포체가 죽으면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 후보가 되고 그중 한 아이가 선택받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앙뚜가 정말 린포체의 환생이 맞는지 아닌지일 테지만 영화는 이런 질문에는 관심이 없다. 아예 의도적으로 그 질문을 배격한다. 대신 오직 앙뚜라는 소년이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모습만을 집요하게 따라가며 카메라에 담는다.



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든 제작진은 앙뚜와 우르갼이 단지 세간의 호기심으로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이런 선택을 했다. 린포체로서가 아니라 앙뚜로서, 또 앙뚜의 할아버지로서 우르갼의 지금 그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영화에 담긴 두 사람의 모습은 나이와 국적과 종교를 초월한 순수한 우정의 원형을 떠올리게 한다. 각박한 도시 생활 속에서 잊고 있던 순수함 말이다.


마지막 장면 눈물을 닦고 홀로 선 앙뚜의 당당한 모습은 “이번 생은 글렀다”며 자책하던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삶이 당당하다면 굳이 다시 태어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영화의 제목처럼 다시 태어나도 다시 만나 똑같은 삶을 살면 될 것이다. 티베트에서 윤회는 영광스러운 부활이고, 힌두교도들에게 윤회는 고통스런 삶의 연장이겠지만 사실 윤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현재의 삶이다.


* [BBB] 2018년 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