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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저주받은 걸작 <블레이드 러너>를 아직 못 봤다면 속편을 보기 전에 꼭 챙겨보는 것이 좋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편으로부터 30년 후의 미래를 그리는데 전편의 설정 뿐만 아니라 대사까지 차용한다. 전편을 모르면 오묘한 재미를 놓칠 수밖에 없다.


<블레이드 러너>가 SF 걸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복제인간(레플리컨트)의 개념을 거의 처음 제시했다는 것, 또 하나는 디스토피아 미래사회를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비주얼로 구현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사이버펑크 - 첨단기술과 반체제 문화의 융합 - 의 시조로 불린다.)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편의 이러한 성취를 연장한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레플리컨트에 대한 고민은 한층 더 깊어졌고, 아이맥스로 구현된 비주얼은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심오한 질문들을 추가한다. 인간다운 것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인가? 가짜를 진짜로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등 영화 전체가 철학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2022년 핵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새로 문명을 건설한 2049년 그레이터 로스앤젤레스. 미래는 여전히 암울하고 축축하고 수직적 건축물로 빽빽하고 요란한 홀로그램 광고로 가득 차 있다. 넥서스8 이후 수명이 연장된 레플리컨트들은 잇따른 반란을 일으켜 타이렐사는 파산했고, 회사의 남은 자산을 인수한 월레스(자레드 레토)가 복제인간들의 창조주로 군림하고 있다.


반란군 소속 레플리컨트를 추적하는 블레이드 러너 K(라이언 고슬링)는 숨어 살고 있는 레플리컨트 사퍼(데이브 바우티스타)를 쫓다가 지하에서 임신한 뒤 사망한 레플리컨트의 시신을 발견한다. 사상 초유의 복제인간 출산 사건에 LA경찰 국장 조쉬(로빈 라이트)는 K에게 당시 태어난 아이를 찾아 없앨 것을 지시한다. 월레스의 수하 러브(실비아 혹스)는 K의 가상현실 여자친구 조이(아나 드 아르마스)를 통해 K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K는 추적을 계속할수록 혹시 자신이 그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자기확신에 빠진다. 비밀을 캐내기 위해 그는 27년 전 대정전의 날 핵폭발로 방사능 오염지대로 남아 있는 장소를 찾아갔다가 그곳에서 과거의 기억 속에 파묻힌 채 숨어 살고 있는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난다.



영화는 K가 레플리컨트임을 보여주는 눈 클로즈업으로 시작한다. 전편에서 눈 클로즈업이 레플리컨트 판별 테스트 역할을 했고, 또 데커드가 인간인지 레플리컨트인지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았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이 과감한 오프닝은 영화가 명백히 레플리컨트의 시점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선언이다. K는 카프카 소설 [성]의 측량기사 K처럼 가짜들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어리둥절해하며 진짜를 찾아 헤매고,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혹시 자신이 '더 원'이 아닐까 상상에 빠져 들뜬다. 그러니까 K는 부조리함을 이해하고, 설레는 감정과 상상력까지 갖춘 레플리컨트다.


K는 레플리컨트들로부터 친부일지도 모를 데커드를 살해하고 그들만의 오이디푸스가 되어주기를 요구받는다. 그들은 인간다움이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K는 친부 살해의 유혹을 뿌리치고, 또 레플리컨트의 임신을 막는 월레스에 맞서며 홀로 선다. 그의 행동은 인간다움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듯하다. 수중에서 펼쳐지는 K와 러브의 클라이막스 혈투는 물이 자궁에 대한 은유라는 점에서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과정을 상징한다. 레플리컨트인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던 K의 이런 결심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다.



러닝타임 2시간 43분에 달하는 영화는 시종일관 묵직하고 장엄하다. 유머는 찾기 힘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철학적인 문제의식으로 일관한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한 번 빠져들면 끝까지 집중하게 되는 작품이다.



영화에는 35년 전 <블레이드 러너>를 만들었던 제작진이 다수 참여했다. 리들리 스콧이 제작자로 나섰고, 해리슨 포드와 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가 출연할 뿐만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의 초고를 썼던 햄튼 팬처가 79세의 노구를 이끌고 각본을 썼다. 또 84세의 전설적인 시각디자이너 시드 미드도 합류해 미래도시를 다시 설계했다.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2049년 미래도시를 콘트라스트 강한 화면에 담아내 내년 아카데미 촬영상 유력 후보로 떠올랐고, 한스 짐머와 벤자민 발피쉬는 35년 전 반젤리스의 부피 큰 테마음악을 압축하고 가다듬어 몰입감 높은 사운드로 재탄생시켰다.


라이언 고슬링의 고뇌하는 연기도 뛰어나지만 이 영화의 발견은 오직 K만을 사랑하는 홀로그램 여자친구 조이를 연기한 아나 드 아르마스다. 영화 <그녀>의 사만다의 비주얼 버전을 연상시키는 그녀는 심오한 드라마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인간 여성 마리에트(맥켄지 데이비스)와의 싱크로를 통한 러브신도 인상적이다. 또 여전사 러브 역할의 실비아 혹스는 액션 장면에서 강렬한 표정 연기를 선보이고, 월레스 역할의 자레드 레토 역시 고뇌하는 대사를 남긴다.




애초 이 영화를 탐낸 크리스토퍼 놀란 대신 선택 받은 드니 빌뇌브 감독은 막중한 부담감을 실력으로 극복해냈다. <컨택트> <시카리오> 등 그의 전작의 명성을 뛰어넘는 작품이 탄생했다.


리들리 스콧의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영화에는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을 <에일리언>의 세계관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도 곳곳에 보인다. 우선 인간의 피조물이자 레플리컨트들의 창조주인 월레스는 <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빗을 연상시키고, 레플리컨트들의 희망이 여성이라는 점은 <에일리언>과 이어진다. 혹시 3편이 탄생한다면 어쩌면 두 영화는 직접적인 접점을 찾을 지도 모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 ★★★★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더 심오한 고찰


>> 35년만의 속편... 왜 다시 블레이드 러너인가?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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