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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캔 스피크. 직역하면 '나는 말할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뭔가 문장이 끝나지 않았다는 첫 인상을 남긴다. 보통 아이 캔 스피크 다음에 어떤 단어(언어의 종류)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제목이 뜻하는 것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영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과정을 주요 소재로 하지만 이 영화에서 영어는 수단에 불과하다. 반세기 동안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할머니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에서 미국 하원 청문회장에 선 나옥분(나문희)이 "아이 캔 스피크"라는 말을 할 때 이 문장은 덧붙일 말이 필요없는 완벽한 문장이 된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강렬하고, 적확하고, 완벽한 제목이다.
영화는 '도깨비 할매'라 불리는 민원왕 옥분이 원칙주의자인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와 티격태격하다가 영어를 가르쳐달라며 매달리는 전반부와 옥분이 평생 감춰온 비밀이 드러난 뒤 미국 워싱턴 의회에서 일생일대의 연설을 하는 후반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코믹하고 후반부는 감동적인, 이 영화의 제작사 중 한 곳인 명필름이 오래 전 구축해온 한국영화의 전형적인 공식대로 흘러가는 영화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은 오히려 공식이 주는 편안함을 잘 이용한 덕분에 후반부에 결이 다른 무거운 이야기를 하는데도 전혀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정서는 시종일관 따뜻하고 부드럽다. 사람이 죽지 않고 피와 욕설이 나오지 않는, 그러면서도 감정을 절제하는 미덕까지 갖춘 한국영화를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철거 위기에 몰린 시장 상인, 성심껏 돕는 구청 공무원 등 영화 속 거의 모든 등장인물은 착한 사람들인데 이들 사이의 작은 갈등과 봉합 과정이 섬세한 연출력에 힘입어 큰 울림을 만들어낸다. 민재가 마치 <미생>의 장그래처럼 숨겨진 재능을 발휘하며 뒤에서 사건을 해결해가는 과정에는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코미디 영화에서 용납 못할 수준은 아니다.
전반부에 차곡차곡 쌓은 드라마는 후반부에 묵직한 이야기로 넘어갈 때 든든한 응원군이 되어 준다. 갑작스런 아재개그, 뜬금없는 사랑고백, 하라면 하는 복지부동 공무원을 풍자한 실수담 등 김현석 감독 특유의 귀여운 유머도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만들어주는 요소다.
나문희는 흡입력 있는 표정과 목소리로 119분 러닝타임 내내 영화의 공기를 휘어잡고, 이제훈은 나문희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깐깐하면서도 속깊은 청년을 정성스럽게 연기한다.
올해 <택시운전사> <군함도> <박열> 등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상업영화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데 <아이 캔 스피크>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다.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옥분의 증언 장면은 2007년 2월 미국 하원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HR121) 채택을 위한 청문회 당시 이용수, 김군자 할머니의 증언을 모티프로 한 것이다. 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미첼 할머니 역시 당시 청문회에서 눈물로 절규했던 네덜란드 출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잰 러프 오헤른 할머니의 증언을 바탕으로 재구성했다.
<군함도>가 지나치게 흥행을 의식한 플롯으로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이고 <택시운전사>가 과거진행형으로만 역사를 그려 일각에서 지적받은 것에 비해 <아이 캔 스피크>는 아픈 과거를 보여주는 장면은 최대한 자제하고, 그 대신 위안부 할머니의 세상을 향한 외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진취적이다.
<아이 캔 스피크>는 CJ문화재단이 주관하고 여성가족부가 후원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시나리오 기획안 공모전에서 75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당선된 시나리오를 4년 간의 개발과정 끝에 완성한 작품이다. <스카우트>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프로야구라는 평범한 소재를 통해 우회해 그려 감동을 이끌어낸 김현석 감독은 이번에도 위안부 피해자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코미디라는 세련된 방식으로 힘 빼고 담담하게 그린다. 작은 이야기를 통해 큰 감동을 이끌어내는 솜씨는 그의 전성기가 아직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영화가 끝나고 시사회장에 박수가 쏟아진 것은 참 오랜만이다. 21일 개봉.
아이 캔 스피크 ★★★★☆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한국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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