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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부커상을 받은 줄리언 반즈의 동명 장편소설을 영화화했다. 원작 소설이 너무 유명하면 영화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는데 인도 출신 라테쉬 바트라 감독은 소설을 영상 언어로 옮기는 과정을 꽤 훌륭하게 해낸다. 영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소설보다 더 부드러운 스토리텔링을 갖춘 영화다. 그러면서도 소설의 주제인 ‘왜곡된 기억’에 대한 묘사도 예리하게 살아 있다. 중년 연기자들과 이들의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앙상블도 좋고, 분위기를 시종일관 차분하게 유지하는 서정적인 카메라와 음악의 사용도 좋다.
“역사는 불완전한 기억과 불충분한 문서가 만나는 순간 생성됩니다.”
토니(짐 브로드벤트)의 기억 속에서 40년 전 친구 아드리안 핀(조 알윈)이 학교 수업시간에 하는 말이다. 영화의 주제를 함축한 이 대사처럼 영화는 불충분한 문서가 불완전한 기억과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토니는 첫 사랑인 베로니카의 엄마 사라의 부고를 받고, 그녀가 토니에게 아드리안의 일기장을 유산으로 남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니는 전 부인 마거릿에게 자신의 40년 전 기억 속 베로니카(프레야 메이버), 사라(에밀리 모티머), 아드리안을 이야기해준다. 하지만 그가 털어놓는 40년 전 기억은 다분히 자기중심적으로 아름답게 윤색돼 있다. 기억 속에서 젊은 토니(빌리 하울)는 친한 친구인 아드리안이 자신의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사귀게 됐다는 편지를 받고는 쿨하게 대처한다. 하지만 그는 현실의 베로니카(샤를로트 램플링)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기억이 왜곡됐다는 것을 알게 된다. 토니는 자신이 까마득히 잊고 있던 처참한 진실과 마주한다.
소설과 비교해 영화가 가장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영화는 이 잘 알려진 소설을 영상언어로 만들면서 두 가지를 차별화했다.
첫째, 노년이 된 토니의 캐릭터에 대한 보강이다. 원작 소설의 토니가 과거에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영화에서 토니는 현실에 발 딛고 있는 인물로 다가온다. 전 부인 마거릿의 비중이 확 늘었고, 출산을 앞둔 레즈비언 딸 수지(미셸 도커리)가 새롭게 등장해 토니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준다.
거의 40년 만에 첫 사랑 베로니카를 다시 만나게 된 토니는 수염을 다듬고 밀레니엄 브리지로 만나러 가지만 차가운 반응에 실망만 하고 돌아온다. 마거릿은 그를 향해 단호하게 이렇게 말한다.
“베로니카가 그동안 자기만을 생각해주고 있기를 바랐겠지. 별을 보면서 달콤한 시간을 보내기를 기대했을 거야. 안 그래? 당신은 그런 사람이야. 주위 사람은 안중에도 없지. 저기 봐. 당신 딸이 힘들어하고 있는 거 안 보여?”
아빠 없는 아이를 혼자 낳겠다는 수지의 사연 역시 토니가 마주하게 되는 아드리안에 관한 진실과 대비되며 여운을 남긴다. 소설의 엔딩이 편집된 기억의 트라우마를 묘사하는데 집중했다면, 영화의 엔딩은 소설에 비해 더 가족적으로 그 사건이 토니에게 미친 긍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둘째, 과거와 현재를 구성하는 방식이 다르다. 소설은 과거를 회상하는 전반부와 현재를 그린 후반부로 구성돼 있다. 마지막엔 충격적인 반전이 짧은 순간 휘몰아친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반반으로 나뉘지 않고 토니가 마거릿과 대화하면서 그때그때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후반부엔 아예 현재의 토니가 과거의 토니의 공간으로 이동해 진실의 순간을 목도하기도 한다. 소설 속 토니가 반전 '한 방'으로 무너졌다면, 영화 속 토니는 반전 이후로도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실제적 경험으로 체화해간다.
이렇게 두 가지 차별화를 통해 영화가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 얻은 것은 자연스러운 이야기 진행이다. 영화는 토니라는 노인이 40년 전을 회고하며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되었다.
반면, 잃은 것은 원작 소설 특유의 짜임새다. 소설은 전반부에 복선으로 사용될 단서들을 촘촘하게 배치한 뒤 후반부에 이를 남김없이 수거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주었다. 즉, 이야기 구성에서 오는 쾌감으로 인해 책을 다 읽고 나면 얼른 앞장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지게 하는 소설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틈틈이 오감으로써 복선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그때그때 처리한다. 영화는 소설보다 친절하고 엔딩은 낙관적이다.
“지적 가식으로 진실을 대신할 순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비극의 가장 큰 희생자인 아드리안의 말이다. 소설 속 묘사에 따르면 아드리안은 니체나 카뮈를 읽는 (감성적인) 청년이고, 이에 반해 토니는 비트겐슈타인을 읽는 (이성적인) 청년이다. 영화 속에서 둘은 딜런 토마스를 매개로 친구가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말로를 비교해 보면, 아드리안의 끝은 매우 문학적인데 반해 토니의 말년은 그렇지 못하다.
작가를 꿈꾸던 문학청년 토니는 결국 작가가 되지 못했다. 그는 사진을 좋아하던 베로니카의 영향을 받아 노년에 옛날 카메라를 판매하는 상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이성적인 그다운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지만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영향받아 카메라 판매업에 종사하게 됐다고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현실 앞에서 꿈을 접었지만 자존심만은 여전히 문학청년의 그것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노년에도 자기중심적인 그는 젊은 시절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그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지질하고 소심한 남자였다. 편집된 기억이라는 지적 가식 속에 살던 토니는 40년이라는 긴 시간만에 뒤늦게 그가 그동안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인지를 깨닫는다.
생각해 보면 토니의 말로는 아드리안만큼이나 비참하다. 40년을 더 살았지만 이는 덧없는 시간의 연장일 뿐이다. 향수 혹은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과거가 사실은 모두 허상이었고, 이를 회상하는 과정 속에서 숨겨둔 치부가 드러나 과거가 현재의 자신에게 복수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노년이 또 있을까. 소설은 이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반면, 영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해가는 토니로 나아간다. <녹터널 애니멀스> 같은 비슷한 주제를 가진 영화와 비교해보면 이 영화의 낙관주의가 더 눈에 띈다. 아껴둔 기억의 복수에서 쾌감을 얻을 것인가 혹은 상처가 변화시킨 인생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소설과 영화는 이렇게 다르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
기억은 편집되고 역사는 불충하다. 남자는 늙어서도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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