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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프리즈너스>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 등으로 많은 팬을 확보한 캐나다 출신 드니 빌뇌브 감독의 2016년작 <컨택트>는 외계 우주선이 지구에 나타난 어느날을 가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매스미디어는 외계 우주선 출현 소식으로 도배가 되고, 미국 정부는 외계인과 의사소통하기 위해 언어학자 루이스(에이미 아담스)와 물리학자 이안(제레미 레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컨택트>라는 제목은 칼 세이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영화 <콘택트>(1997)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이는 영화 수입사의 페이크다. 영화의 원제는 'Arrival'이기 때문.


다만 <콘택트>와 유사한 점이 있다면 <컨택트> 역시 아주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는 것이다. 칼 세이건까지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수많은 팬을 가진 SF 소설가 테드 창의 단편 [네 인생의 이야기]가 원작이다. 이 단편이 수록된 소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많은 SF 팬들이 '인생의 책'로 꼽을 만큼 마스터피스로 추앙받는 작품이다.



테드 창은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뒤 글을 쓰기 시작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로 휴고상, 네뷸러상을 비롯해 9개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위한 매뉴얼을 쓰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소설을 쓰는데 집필 속도가 느려서 지금까지 발표한 소설은 손에 꼽을 정도다.



영화를 보기 전에 원작 단편소설을 먼저 읽어보기를 권한다. 언어에 대한 이야기이니만큼 영화보다 소설이 더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할리우드식 SF에 길들여져 있는 관객이라면 테드 창의 SF가 낯설 것이다. 필자도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수록된 일곱 작품들 중 몇몇 작품은 너무 전문적이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언어학, 근대철학, 물리학, 동양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SF에 접목돼 있어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도전하는 기분이랄까. 단, [네 인생의 이야기]는 [바빌론의 탑]과 함께 가장 쉽게 읽히는 소설 중 하나다.


멋진 영화들로 필모그래피를 쌓아오고 있는 촉망받는 감독과 우리 시대 SF 거장의 걸작이 만나 빚어낸 결과물인 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우선, 감독은 테드 창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 조심한 듯 보인다. 그런데 그 조심성이 지나친 나머지 시종일관 진중하게 진행돼 다채로운 맛은 부족하다.


전작들에서도 그랬지만 감독은 일관된 톤을 유지하면서 강약을 조절하는데 재능이 있다. <컨택트>를 지배하는 일관적인 기운은 느릿느릿 무중력상태의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느낌이다. 딸 한나를 잃은 루이스를 중심으로 그녀가 외계인과 접촉을 통해 소통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 <그래비티>의 라이언 스톤(산드라 불록)과 사연도 비슷하고 삶에 의욕이 없다는 점에서 분위기도 닮았다. 단, <그래비티>에선 조지 클루니가 연기한 맷 코왈스키가 강약을 조정하는 역할이었지만 <컨택트>의 이안은 아쉽게도 극에 잘 녹아들지 못하고 조력자에만 머문다.


다소 느리지만 의자 깊숙이 고개를 파묻고 본다면 <컨택트>가 보여주는 신비한 이야기에 빨려들어갈 수 있다. 외계인의 불가사리 같은 손가락에서 퍼져 나오는 원형의 언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이 밝혀낸 휘어지는 시간 등이 루이스 개인사와 연결돼 영화가 그녀 인생의 이야기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결말의 반전은 <그을린 사랑>처럼 영화 전체의 스토리에 연결되어 있어 영화가 끝나고 나면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놓고 아마도 토론의 장이 열릴 것이다.



외계인이 나타난다는 어쩌면 자극적일 수 있는 상상력을 기반으로 테드 창이 쓴 소설의 제목은 '컨택트'도, '어라이벌'도 아닌 '당신 인생의 이야기'였다. 테드 창은 한 여성 언어학자가 외계인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재발견하는 이야기를 남겼다.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국제적인 상황 등 소설에 많은 부분을 덧입혔지만 결과적으로 원작을 크게 훼손할 정도는 아니다.


외계인이든 다른 인간이든 타자와의 소통은 언제나 인내를 필요로 한다. 영화는 그 인내하는 소통의 과정 속에 '당신 인생의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다. 모두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영화는 아니지만 쓴 인내 끝의 열매는 달다.


루이스 역을 맡은 에이미 아담스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점점 할리우드의 대표 여배우가 되어가고 있다. <녹터널 애니멀스>와 또다른 느낌으로 이번엔 표정 하나하나까지 섬세하게 절망과 절박함 사이에 놓인 루이스를 표현하고 있다. 2월 2일 개봉.


컨택트 ★★★★

낯설지만 세련된 하드 SF. 끝까지 봐야 제대로 보인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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