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밟을수록 강해지는 건 잡초뿐만이 아닌가보다. 영화계 블랙리스트, 부산국제영화제 예산 삭감, 세월호 관련 영화 배급사 사찰 등 정권 입맛에 맞는 영화만 남기기 위해 박근혜 정부에서 무수한 압력이 있었음이 최근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한국영화계는 굴하지 않고 꾸준하게 현실비판 영화를 만들어오고 있다.


대한민국을 피비린내 나는 지옥에 비유한 <아수라>, 원전 위험을 고발한 <판도라>에 이어 이번엔 검찰을 겨냥한 <더 킹>이다. 이 영화는 5년마다 바뀌는 정권보다 더 악랄한 무소불위의 권력은 검찰이라고 콕 집어서 말한다. 우병우, 김기춘 등 검찰에서 권력만을 좇으며 살아온 이들에게 강력한 한 방을 날린다.



영화는 서울법대 85학번 박태수(조인성)의 회고록이다. 학창시절 싸움으로 학교를 접수한 태수는 진짜 권력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공부에 전념한 끝에 사시 합격해 검사가 된다. 부잣집 딸 임상희(김아중)와 결혼해 재력까지 등에 업은 그는 어느날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기획통 한강식 부장검사(정우성)와 양동철 검사(배성우)를 만난다. 거물들을 잡아넣어 매번 신문 사회면 톱을 장식하는 이들과 함께 태수는 1% 검사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관객 900만명을 동원한 사극 <관상>(2013)에서 계유정난 속 무자비한 권력암투의 희생양을 그린 한재림 감독은 <더 킹>에선 한국 현대사를 정면으로 겨냥해 방아쇠를 당긴다. 전두환부터 김영삼, 김대중을 거쳐 노무현,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시대 변화를 뉴스 화면과 함께 다큐멘터리처럼 재현하고 그 속에 상위 1% 검사들의 세계를 드라마틱하게 녹였는데 이는 한국영화에서 전례없는 새로운 시도다. 실제 정치사와 허구의 캐릭터들이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켜 영화의 몰입감이 상당하다. 감독은 권력의 속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며 두루뭉술하게 비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검찰을 이 지경으로 만든 파렴치한 자들에게 복수해야 한다고 분명한 메시지를 남긴다.



메시지가 강렬한 영화가 선동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재미와 완성도가 필요한데 <더 킹>은 상업영화로서의 재미와 작가주의 영화로서 완성도를 두루 갖췄다. 정교하게 세공한 보석을 경쾌한 돌직구로 던진 셈이랄까. 감독은 지나치게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미장센에 공을 들여 장면 하나하나를 세련되게 다듬었다. 슬로모션, 증강현실, 리와인드, 360도 회전 등 다양한 영상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총알이 날아가는 장면, 야바위꾼의 빈잔 돌리기 등 정신을 쏙 빼놓는 영화적 비유로 러닝타임 내내 휘몰아친다.


영화에서 주제를 연결하는 동선을 '이미지너리 라인(imaginary line)'이라고 하는데 <더 킹>은 현란한 영상 속에서도 피사체 움직임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솜씨가 귀신같다. 이야기가 평이한데도 집중하며 따라가게 만드는 힘이 대단하다. <암살> <돈의 맛> <고지전> 등을 찍어온 김우형 촬영감독의 솜씨다. 또 조인성, 정우성, 류준열 등 톱스타들의 멋들어진 연기에 배성우, 김의성, 김소진, 정은채, 박정민 등 검증된 배우들이 조연으로 가세해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능구렁이처럼 들이대는 안희연 검사 역의 김소진은 단연 이 영화의 발견이다.


<좋은 친구들>(1990)


<더 킹>을 보며 떠오르는 영화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좋은 친구들>(1990)이다. 플래시백 구조, 세 명의 물고 물리는 우정과 복수, 그 중 한 명의 내레이션으로 진행되는 전개가 닮았다. <좋은 친구들>이 갱스터 영화의 걸작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의미심장하다. 검사의 세계를 깡패 조직처럼 그린 것이다. 영화의 화자인 박태수는 중간중간 이렇게 말한다. "내가 깡패인지 검사인지 가끔 구분이 안 된다." 또 깡패 두목처럼 보이는 부장검사 한강식은 태수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바로 대한민국의 역사야."



최근 한국영화에서 현실 비판은 하나의 장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늘었고 한편으로는 습관화되고 있지만 <더 킹>은 이 분야 영화의 정점을 보여준다. <부당거래>(2010), <내부자들>(2015)을 넘어설 만큼 예리하고 통쾌하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선부터 탄핵, 서거까지의 과정을 극의 흐름과 교차시켜 만들어내는 드라마에선 감독의 결기가 느껴진다. 다만 결말부에 이르러 극의 흐름이 갑자기 바뀌는 점은 옥의 티다. 아마도 뚜렷한 신상필벌로 더 많은 관객을 만족시켜야 하는 상업영화의 한계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김구의 임시정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한 <암살>, 권력 중심부에서 재벌-언론-정치권이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고 고발한 <내부자들>에 이어 <더 킹>은 검찰 내부에 자기가 왕이라고 여기는 썩은 권력이 있으며 정치는 이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빼어난 완성도까지 갖추고 패기있게 할 말을 하는 영화 <더 킹>은 어떤 권력도 한국영화를 길들일 수 없다고 외치는 일성으로 보인다.



PS) <더 킹>의 러닝타임은 2시간 14분이다. 애초 심의 신청 땐 2시간 37분이었는데 편집본의 반응이 더 좋아 23분을 잘라냈다. 영화가 손익분기점 350만명(총제작비 130억원)을 넘어 흥행에 성공한다면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처럼 감독판도 선보이지 않을까 싶다.


더 킹 ★★★★

패기있게 할 말 다 하는 영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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