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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패션 디자이너에서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톰 포드의 두번째 영화가 11일부터 관객을 만나고 있다. 전작 <싱글 맨>(2009)에서 동성 연인을 잃은 중년 남성의 내면을 레트로한 화보 같은 영상에 담아내 호평받았던 그는 이번엔 모든 것을 가졌지만 꿈꿔온 인생에서 도피한 중년 여성의 내면에 천착한다. 물려받은 본성을 거부하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그녀를 영화는 '야행성 동물'에 비유한다. 호기심 끄는 제목 만큼 도발적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하게 만드는 히치콕 스타일의 스릴러 <녹터널 애니멀스>를 파헤쳐 보자.


톰 포드 감독


(이 글에는 영화의 후반부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는 적나라한 나신을 드러낸 채 육중한 몸을 흔드는 여성의 슬로모션으로 시작한다. 섹슈얼리티가 제거된 이 여성은 시종일관 환희에 차 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LA의 고급 갤러리 한복판. 전시상품이 된 그녀의 나체는 타이트한 검정색 정장을 입고 전시를 지켜보는 수잔(에이미 아담스)과 대비를 이룬다. 갤러리를 운영하며 사업가 남편과 함께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수잔은 그러나 매일밤 불면증에 시달린다.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자신의 인생을 자책하며 괴로워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수잔이 소설가인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가 보낸 우편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우편물 속에는 에드워드가 새로 쓴 소설의 초고가 들어 있다. 소설의 제목은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녹터널 애니멀스'. '수잔에게 바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을 수잔이 읽어나가면 영화는 액자구성으로 소설 속 이야기와 수잔의 에드워드에 관한 회상을 교차해 보여준다. 소설의 내용은 한밤중 인적 드문 텍사스 도로에서 아내와 딸을 지키지 못한 나약한 남자 토니의 복수극. 소설이 파국으로 치달으면서 에드워드를 떠난 수잔의 비밀도 드러난다.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수잔과 토니의 관계, 그리고 수잔과 19년전 헤어진 에드워드의 관계다. 처음에 수잔은 토니에게 감정이입한다. 토니가 다급한 상황에 처할 때 몸서리치고 토니가 형사 바비(마이클 섀넌)와 함께 범행 현장을 찾아나설 땐 피해자의 심정에 공감한 나머지 새벽에 딸에게 안부전화를 걸기까지 한다.



하지만 소설이 진행될수록 수잔은 에드워드의 집필 의도를 알아차려간다. 토니가 처하는 상황들은 수잔의 기억력을 회복시키는 방아쇠가 된다. 피해자는 결코 잊지 못하지만 가해자는 까맣게 잊어버린 기억이 돌아온다. 용의자 레이(아론 테일러 존슨)는 범행을 잡아떼면서 토니에게 나약하다고 손가락질하고, 총을 쏠 줄도 모른다며 핀잔을 주는데, 이는 모두 수잔이 19년 전 에드워드를 떠나며 했던 말들이다. 수잔은 에드워드가 로맨틱하지만 나약하다고 말했었고, 그가 쓴 첫 소설을 읽고는 글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른다며 상처를 주었다.


마치 <올드보이>(2003)에서 혀를 잘못 놀린 오대수가 이유도 모르고 15년 동안 고통받은 것처럼, 혹은 <나를 찾아줘>(2014)에서 바람핀 남편 닉이 결혼 5주년 기념일에 복수당한 것처럼, 수잔은 19년만에 느닷없이 날아온 전남편의 소설로 인해 묻어뒀던 자신의 과거와 마주한다.



토니와 에드워드는 제이크 질렌할이 1인 2역하는데 이 캐스팅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소설을 읽기 전 수잔은 전남편 에드워드에게 젊은 시절의 좋은 감정만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겪고 있는 불면증과 삶의 공허함을 극복하는데 어쩌면 그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잔은 소설을 읽으면서 토니를 에드워드로 상상하며 감정이입했고, 에드워드에게 이메일을 보내 소설 출간을 축하하며 저녁에 만나자는 제안을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수잔의 착각이었다. 토니는 더 이상 사람 좋고 로맨틱한 젊은 날의 에드워드가 아니었다. 총도 쏠 줄 모른다고 구박받던 토니는 소설 속에서 레이를 한 방에 보내버린다. 이 장면은 이렇게 다가온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피해자는 잊지 않는다. 진정한 사과와 단죄 없이는 화해도 없다. '복수'는 오로지 피해자만이 할 수 있는 의식이다. 가해자인 수잔은 심지어 자신의 갤러리에 '복수'라는 미술 작품이 전시돼 있던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현재의 에드워드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복수를 완성한다. 수잔이 소설을 다 읽는 순간 그의 복수는 완성된다. 19년간 복수의 펜을 갈아온 현재의 에드워드는 에드워드 호퍼의 유명한 그림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에서 뒷모습을 보이며 홀로 앉은 남자를 떠오르게 한다. 영화의 제목이 '야행성 동물들'이라는 복수형인 이유는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비단 수잔뿐만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에드워드를 기다리는 수잔의 모습이다.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수잔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이 선택한 인생을 후회하고 있을까. 혹은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며 속물근성 가득한 엄마에게 물려받은 천성을 탓하고 있을까. 마지막 클로즈업에서도 그녀의 화장과 헤어스타일은 여전히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오스틴 라이트가 1993년 발표한 소설 '토니와 수잔'을 영화로 옮긴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가는 영화는 아니지만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강렬한 이미지와 전개를 추측하기 힘든 이야기로 관객을 현혹하는 영화다. 설득당하든 그렇지 않든 숨죽이고 끝까지 보게 만드는 몰입도 만큼은 대단하다. 작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돼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아메리칸 허슬>에서 팜므파탈 사기꾼, <빅 아이즈>에서 재능있는 화가였던 에이미 아담스는 이 영화에서 아이섀도를 진하게 칠한 서늘한 분위기의 수잔으로 색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제이크 질렌할


<데몰리션>에서 아내를 잃은 뒤 마음이 분해된 남자, <사우스포>에서 재기에 도전하는 권투선수였던 제이크 질렌할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묻는 문학청년 에드워드와 복수심에 불탄 토니를 동시에 연기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느낌이 점점 비슷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론 테일러 존슨


<엘비스와 대통령>에서 거만한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 <로렐>에서 시한부 인생 동료를 돕는 경찰이었던 마이클 섀넌은 토니의 듬직한 우군 보안관으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시간을 멈추는 슈퍼히어로 퀵 실버였던 아론 테일러 존슨은 토니를 시종일관 위협하는 위험한 남자 레이를 연기하는데 껄렁껄렁한 모습이 영락없는 건달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얼마 전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녹터널 애니멀스 ★★★★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함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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