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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썸 오브 올 피어스(The Sum of All Fears)>는 톰 클랜시의 동명의 테크노 스릴러를 2002년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입니다. 테크노 스릴러란 정치, 군사, 외교, 첩보, 음모 등을 취급하는 스릴러를 말합니다. 2013년 타계한 톰 클랜시는 이 분야의 소설을 17편이나 써낸 대가죠. 쓰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돼 총 판매고는 수백만권에 달합니다. 그의 작품들은 주인공이 CIA 요원 잭 라이언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톰 클랜시의 소설들 중 영화화 된 작품은 총 다섯 편인데요. 한 편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붉은 10월>(1990)
<패트리어트 게임>(1992)
<긴급명령>(1994)
우선 <붉은 10월>(1990)은 1984년 소련의 핵잠수함이 미국의 동부 해안에 접근하면서 벌어지는 첩보 전쟁을 다루었고요. <패트리어트 게임>(1992)은 CIA를 퇴직한 잭 라이언이 아일랜드 독립군의 테러에 휘말려 CIA로 복귀하는 이야기, <긴급명령>(1994)은 CIA 국장을 대리하게 된 라이언이 대통령 가족의 죽음과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과의 관계를 파헤치는 이야기, <썸 오브 올 피어스>(2002)는 나치주의자의 볼티모어 핵폭발로 미국과 러시아가 핵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는 이야기, <잭 라이언: 코드네임 섀도우>(2014)는 주식 브로커로 위장한 라이언이 월스트리트 금융 사기단을 잡는 이야기입니다.
<잭 라이언: 코드네임 섀도우>(2014)
잭 라이언 캐릭터로 보면 <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은 2년 간격으로 제작돼 요원으로 시작해 국장 대리까지 진급하는 과정을 볼 수 있는데요. 이후 8년만에 나온 <썸 오브 올 피어스>는 일종의 리부트로 잭 라이언을 CIA 분석관으로 좌천(?)시킵니다. 12년 후 제작된 <잭 라이언: 코드네임 섀도우>는 두번째 리부트로 이 영화에서 라이언은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한 전직 해군인 CIA 분석관입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잭 라이언도 점점 다른 캐릭터가 되어 간 것인데 온갖 간계가 오가는 첩보전쟁에서 흔들리지 않고 오직 미국을 위해 일한다는 설정만은 변함이 없습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의 감독은 필 알덴 로빈슨입니다. 그의 대표작은 <꿈의 구장>(1989)과 <스니커즈>(1992)로 쫄깃쫄깃한 드라마가 강점이죠. 야구 팬들 중에는 <꿈의 구장>을 인생 영화로 꼽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과작을 하는 로빈슨 감독은 2013년 오랜 침묵을 깨고 <앵그리스트맨>이라는 영화를 내놓았는데 이 영화는 실제 우울증을 앓던 로빈 윌리암스가 조울증 환자로 출연해 더 안타까웠던 영화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썸 오브 올 피어스> 이야기를 해볼까요? (지금부터 스포일러 경고!)
<썸 오브 올 피어스>(2002)
개인적으로 잭 라이언 시리즈 5편 중 <썸 오브 올 피어스>가 2,3위 정도는 된다고 봅니다. 1위는 단연 <붉은 10월>이고요. 참, 이 영화는 1940년대 이후 할리우드 영화 중 사람이 가장 많이 죽는 영화 순위 3위에 랭크돼 있기도 합니다. ‘더 가디언’의 조사에 따르면 총 2,922명이 죽는다고 하네요. 영화 속에서 핵폭탄이 터지거든요. 1위는 단연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2014)입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의 플롯은 <붉은 10월>과 유사합니다. 두 강대국이 강대 강으로 맞부딪히고 중간에서 CIA 요원 잭 라이언이 중재 역할을 하는 것이죠. <붉은 10월>의 핵잠수함이 존재 자체로 공포였다면, <썸 오브 올 피어스>는 눈앞에 공포를 시전합니다. 볼티모어에 실제로 핵이 터져 도시가 초토화됩니다. ‘눈에는 눈’이라고 미국이 가만히 있을 리 없습니다. 핵 폭발을 러시아의 행위로 단정 지은 미국 대통령은 보복을 가하려 합니다.
<붉은 10월>이 핵잠수함의 실제 의도를 알아내기 위한 긴박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썸 오브 올 피어스>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죄수의 딜레마’, ‘확증 편향’ 등 곱씹어볼 만한 주제로 이야기를 확장시킵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2002)
잭 라이언(벤 애플렉)은 CIA 러시아 정보 담당 분석관입니다. 러시아 대통령이 갑작스레 병사하면서 네메로프(키어런 하인즈)가 대통령직을 승계하자 라이언은 CIA 국장 캐봇(모건 프리만)을 따라 미국 안보회의에 참석하게 되는데요. 네메로프 전문가인 라이언은 파울러 대통령(제임스 크롬웰)에게 네메로프가 합리적 온건파라는 평소 소신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발언은 이후 그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에 강경으로 맞서야 한다는 강경론자들이 라이언을 배척하려 하거든요.
미지의 인물 네메로프의 성향에 대해 미국 내에서 정보전이 벌어질 때 네오 파시스트 집단은 암시장에서 조달한 소형 핵폭탄을 이스라엘에서 미국 볼티모어로 옮기고 있었습니다. 마침 파울러가 볼티모어 미식축구 경기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을 때 핵폭탄이 터집니다. 파울러는 구사일생으로 대피하지만 캐봇은 사망하고 맙니다. 에어포스원에 오른 파울러는 비상회의를 소집해 네메로프에게 메시지를 보냅니다. 핵폭탄이 러시아의 것인지 간접적으로 묻습니다. 네메로프는 부인하지만 그가 장악하지 못한 강경파 군대가 미국 항공모함을 공격하면서 미국 내에선 러시아에 핵을 발사해야 한다는 각료들의 의견이 우세해집니다. 이제 두 나라는 일촉즉발 핵전쟁의 위기에 처합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2002)
‘죄수의 딜레마’란 1950년 미국 경제학자 메릴 플로드와 멜빈 드레셔가 연구한 이론으로 양측이 협력하면 가장 좋은 결과를 얻지만 서로 불신한 나머지 결국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게임이론의 한 모형입니다. 이 영화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를 믿으면 핵전쟁은 발생하지 않지만 정보가 차단되어 있어 양국은 서로를 믿을 수 없습니다. 러시아에서 핵을 터뜨렸다고 믿는 파울러는 핵폭탄 발사 코드를 입력하고 네메로프 역시 미국이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이 핵폭탄을 준비합니다.
‘확증 편향’은 심리학에서 인지적 편향의 일종으로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려는 경향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라이언은 네메로프가 온건파라는 확신을 갖고 이를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체첸 수도 그로즈니를 폭격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각료들은 라이언을 무시합니다. 반면 라이언은 폭격은 네메로프가 한 것이 아닐 것이라고 믿는 확증편향을 보입니다. 라이언과 각료들, 양쪽 모두 확증편향을 갖게 된 것이죠.
<썸 오브 올 피어스>(2002)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라이언은 네메로프와 교신을 시도합니다. 그는 미국을 설득할 수 없으면 러시아를 설득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미국과 똑같은 공포를 갖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공포란 내 생각이 틀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대한 공포입니다. 지금까지 내 생각이 맞다고 생각해왔다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라이언은 그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고요. 파울러는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아니, 각료들에 막혀서 라이언과 대화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네메로프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요?
톰 클랜시 소설 특유의 극사실주의, 그러니까 CIA, 백악관, 펜타곤 등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돋보여 빨려들어가는 영화입니다. 또 전혀 예상치 못한 핵폭발 장면의 특수효과도 굉장히 사실적입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2002)
영화는 원작 소설의 설정 중 한 가지를 바꿨습니다. 영화에서 핵폭탄을 터뜨리는 네오 파시스트는 소설에선 원래 아랍의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항간에는 2001년 911 사태로 인해 설정을 바꿨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영화 촬영은 2001년 6월에 이미 종료되었거든요. 각본가인 댄 파인은 아랍 테러리스트가 점점 클리셰가 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던 차에 네오 파시스트가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미국의 이슬람 관련 단체들이 무슬림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것을 멈춰달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기도 했고요.
벤 애플렉과 모건 프리먼의 브로맨스와 브리짓 모나한의 리즈 시절을 볼 수 있는 영화이고요. 제임스 크롬웰, 리브 슈라이버, 필립 베이커 홀, 브루스 맥길 등 연기 잘하는 중년 배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영화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썸 오브 올 피어스 ★★★☆
때때로 영화는 현실보다 더 냉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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