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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루이스 브뉘엘 감독이 거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매번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29살에 초현실주의 단편영화 <안달루시아의 개>를 시작으로 무정부주의 영화 <황금시대>, 전투적 다큐멘터리 <빵 없는 대지>, 멕시코 빈자들의 이야기 <잊혀진 사람들>, 반종교영화 <비리디아나>, 계급사회 풍자영화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 등 그가 만든 영화들은 대부분 문제작이거나 에너지가 가득한 영화들입니다.
1900년에 태어난 브뉘엘 감독은 83살을 일기로 생을 마감했는데 그가 만든 마지막 작품은 77살이던 1977년에 만든 <욕망의 모호한 대상>입니다. 제목부터 무척 라캉적이고 철학적이고 혼란스러운 이 영화는 그러나 아주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주제로 한 어른들을 위한 우화같다고 할까요? 노감독의 지혜가 담겨 있으면서도 메시지가 분명하고 힘이 넘칩니다. 이 영화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
영화는 액자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프랑스 파리행 열차에 올라 탄 50대 남자 마티유는 자신을 따라온 한 젊은 여자에게 양동이에 담긴 물을 쏫아붓고는 객실로 들어갑니다.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승객들에게 그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교양있는 말투와 세련된 매너로 들려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사람들은 귀를 쫑긋 세웁니다. 지금부터는 그가 들려주는 그의 이야기입니다.
아내와 사별한 후 파리에서 혼자 살던 마티유는 어느날 자신의 집에 들어온 콘치타라는 젊은 하녀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구애합니다. 콘치타 역시 자기는 나이 든 남자가 좋다면서 그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마티유는 젊은 콘치타와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침실을 새로 꾸미는데 정작 그녀는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사라집니다. "내 마음은 당신을 원하는데 당신은 나를 돈으로 사려고 했군요."
상심한 마티유는 며칠 후 친구를 만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식당에서 콘치타가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오해를 풀고 다시 만납니다. 마티유는 그녀와 동거하며 첫날 밤을 보낼 기대에 부풀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녀가 입고 온 속옷이 가관입니다. 도저히 벗길 수 없는 정조대를 입고 있었던 거죠. 좌절하고 있는 마티유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모든 것을 주면 당신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거예요."
이런 식의 만남과 헤어짐이 반복됩니다. 마티유는 그녀를 쫓고 그녀는 그에게 섹스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조관념이 투철한 여자인가 싶었지만 어느날 마티유는 그녀가 세비야의 한 술집에서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모습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그녀에게 당장 그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고는 그녀가 지낼 집을 한 채 사줍니다. 하지만 그날 밤 콘치타는 마티유 앞에서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입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마티유에게 콘치타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사랑을 시험해보기 위한 연극이었어요." 하지만 도저히 그녀를 용서할 수 없었던 마티유는 그녀에게 물을 뿌리고 열차를 탄 것이었죠.
우연을 가장한 욕망
이 영화에는 우연이 참 자주 나옵니다. 마티유는 콘치타를 식당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세비야에서 길을 걷다가 또 우연히 만납니다. 보통 스토리 작법에서 우연이 너무 잦으면 잘된 스토리라고 할 수 없지만 이 영화의 우연은 전혀 다릅니다. 이 영화의 우연은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우연'이 우연히 일어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우연이 누군가의 욕망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어떤 대상을 너무 갈구한 나머지 마치 우연인 것처럼 꾸며내는 것이죠. 이때 우연은 우연을 가장한 욕망입니다.
콘치타가 마침 마티유가 자주 가는 그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또 세비야의 거리에서 마티유가 지나가는 길에 그가 철문 사이로 그녀를 발견하게 한 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닌 욕망의 발현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콘치타의 욕망은 무엇일까요? 이는 마티유의 욕망과 어떻게 다를까요?
도달할 수 없는 욕망, 드러나는 결핍
자크 라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에겐 메워지지 않는 텅 빈 구멍이 있어서 욕망의 실재에 도달하지 못하고 다른 대상을 추구하기만 한다."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서 '욕망'은 성과 계급에 대한 욕망입니다. 남자는 여자의 성을, 여자는 남자의 계급을 갈구합니다. 남자는 젊은 여자와 섹스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여자는 남자를 통해 계층 상승을 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상대방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더 신경쓰느라 자신이 가진 욕망의 실재에 도달하지 못하고 계속 다른 대상을 추구하기만 합니다.
남자는 젊은 여자의 성에 닿으려 할 때마다 매번 벽에 부딪히고, 여자는 물질적인 부를 원하면서도 자신이 그것만 원하는 속물처럼 보이기 싫어 그를 떠납니다. 여자는 남자를 안달나게 함으로서 그의 욕망을 제어하려 하고, 남자는 속물처럼 보이기 싫어하는 그녀의 욕망을 배려하지 못해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놓칩니다.
영화는 이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합니다. 마티유와 콘치타는 마치 톰과 제리처럼, 쫓아가면 달아나고, 쫓아오지 않으면 다시 쫓아오게 한 뒤 달아납니다. 이 과정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됩니다. 그래서 모호한 욕망을 좇는 두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가 보게되는 것은 그들이 갖지 못한 것, 즉 '결핍' 그 자체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서로 욕망의 민낯만 드러내 물을 뒤집어쓸 정도로 피폐해진 와중에도 두 사람은 웃으며 파리 시내를 활보합니다. 두 사람에게 결핍된 것은 사랑이라는 감정 그 자체라는 것을 반증하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카롤 부케
안젤라 몰리나
모호한 대상을 표현하는 더블캐스팅
이 영화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젊은 여자 콘치타 역할을 맡은 배우가 두 명이라는 것입니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두 배우가 번갈아가며 콘치타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한 신에서 프랑스 출신 카롤 부케가 자신을 콘치타라고 소개하면, 다음 장면에서 스페인 출신 안젤라 몰리나가 태연하게 자신이 콘치타라면서 마티유의 품에 안깁니다. 콘치타 주위의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 이는 이 영화가 마티유가 과거를 회상하면서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기억 속 그 사람의 얼굴은, 듣는 사람에 따라, 혹은 화자가 떠올리는 순간의 기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화자가 좇은 것이 대상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였다면, 그 대상은 어떤 때는 카롤 부케처럼 보이고, 또 어떤 때에는 안젤라 몰리나처럼도 보일 것입니다. 누가 연기하든 욕망의 실재는 매번 변해서 잡을 수 없다는 점은 같습니다. 이런 설정은 완벽히 독창적이어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루이스 브뉘엘 감독은 1983년에 출판한 자서전 [My Last Sigh]에서 콘치타 역할에 두 젊은 여배우를 더블캐스팅한 과정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1977년 마드리드에서 한 여배우와 격렬한 논쟁 끝에 영화가 엎어질 위기에 처했다. 자금 사정이 안좋기도 했다. 슬픔에 빠져 프로듀서 세르주 실버맨과 술 한 잔을 하다가 문득 한 역할에 두 여배우를 쓰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농담삼아 실버맨에게 이야기했는데 그는 그 아이디어를 너무 좋아했다. 덕분에 영화가 완성될 수 있었다."
무의식 속에 드러나는 위선
계급 위선을 다룬 브뉘엘 감독의 전작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처럼 이 영화 역시 계급의 위선을 폭로하는 설정이 있습니다.
마티유가 열차 안에서 이야기를 들려주기 전 승객 중 자신을 심리학 교수라고 소개하는 한 왜소증 남자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심리를 잘 알아요. 당신의 모습으로 보건데 당신은 신사니까 분명히 그렇게 젊은 여자에게 무례한 일을 할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마티유는 세련된 어휘를 구사하고, 신사처럼 차려입었고, 중산층 이상처럼 보이니 분명히 젊은 여자에게 물을 들이붓는 이상한 짓을 할 때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는 이 말은 무의식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가진 욕망의 한 형태를 드러냅니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공손함은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일은 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하지 않으려는 욕망이다."
사람들에게 공손하게 대한다는 것 역시 욕망의 발현이라는 것인데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판단할 때 실제보다는 그 사람의 어투, 목소리, 태도, 옷차림, 외모 등에 더 영향받기도 합니다. 이 역시 무의식 중에 우리의 욕망이 드러난 경우라고 볼 수 있겠지요. 영화는 성욕과 물욕 등 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욕망에 더해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위선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PS)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페르소나 페르난도 레이가 마티유 역을 맡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어 목소리는 미셸 피콜리가 더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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