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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두 번째로 다룰 여성감독은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독립영화계에서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세 사람입니다. 레니 리펜슈탈은 영화를 정치 선전도구로 만들었다는 오명을 쓰면서까지 테크닉과 미학적인 시도에 심취했던 감독이고, 마야 데렌은 1950년대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미국 실험영화계의 대모입니다. 셜리 클라크는 데렌과 비슷한 시기에 미국 독립영화계의 문제작을 내놓으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4. 레니 리펜슈탈



레니 리펜슈탈은 여성 영화감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녀는 나치에 부역하며 영화감독, 제작, 각본, 편집, 촬영, 연기까지 직접 했습니다.


원래 댄서였던 그녀는 1924년 영화 <운명의 산> 포스터를 본 뒤 연기로 방향을 전환해 5편의 영화에 출연합니다. 1932년에는 감독이 되기로 결심하고 <푸른 빛>이라는 영화를 만듭니다.


1932년 레니는 처음으로 히틀러의 연설을 듣습니다. 히틀러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에 대해 그녀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날 나는 절대 잊을 수 없는 계시적인 비전을 받았다. 지구의 표면이 바로 내 앞에서 갈라져 거대한 물줄기를 내뿜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히틀러는 그녀에게 1933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담은 1시간짜리 선전영화 <신념의 승리>를 만들 것을 제안했고 레니는 승낙합니다. 이 영화에 감명받은 히틀러는 두번째 영화를 제안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의지의 승리>(1934)입니다. 역시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다룬 선전영화인데 백만 명이 넘는 독일군이 사열해 있는 장광은 이후 많은 나치 관련 영화들과 독재자를 다루는 SF 영화들에 차용되며 클리셰가 됩니다.



이후 그녀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기념해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만듭니다. 기술과 미학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 영화로 레니는 이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습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 레일을 설치해 트래킹 쇼트를 최초로 찍었고, 다이빙하는 장면에선 육체를 아름답게 표현하기 위해 슬로 모션을 사용했습니다. 또 극단적인 앙각과 부각, 파노라마 쇼트 등 현대에 널리 쓰이는 기법들의 창시자가 바로 레니 리펜슈탈입니다.


<의지의 승리>와 <올림피아>는 그녀의 대표작이자 역사상 가장 효과적이고 혁신적인 선전영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영화들을 보신 분은 많지 않을지라도 이 영화의 스틸사진은 다들 한번쯤 접해보셨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히틀러를 더 위대하게 보여줄까, 어떻게 하면 아리안족의 육체를 더 근사하게 표현할까를 고민한 그녀는 이 영화들을 통해 나치의 메시지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이는 히틀러가 원하던 영화의 선전기능을 120% 구현한 것이었습니다. 아우라 개념을 처음으로 영상에 접목한 발터 벤야민조차 그녀의 영화를 보고 스스로 책망하며 위험성을 경고할 정도였습니다.


<의지의 승리>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녀는 체포되었지만 '전쟁범죄자'로 분류되지는 않았습니다. 직업에 충실했을 뿐 적극적인 의지가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히틀러와의 관계가 순수한 우정이라고 알려지긴 했지만 추잡한 소문도 많았습니다.


2003년 101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홀로코스트를 몰랐다고 부인했습니다. 어쩌면 정말 몰랐을 수도 있지만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이 이룬 업적을 방어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녀의 양심의 눈을 멀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말년의 그녀는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수단의 누바족에 관한 책 몇 권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5. 마야 데렌


세번째 남편이자 작곡가 이토 데이지와 함께


마야 데렌은 미국 실험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1940~50년대 아방가르드 영화를 주도했습니다. 그녀는 영화감독이자 댄서, 안무가, 영화이론가, 시인, 교수, 작가, 사진가 등 다방면에서 다재다능하게 활동했습니다. 미국, 캐나다, 쿠바에서 영화를 강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엘레노라 데렌코프스카야로 러시아 키에프에서 태어나 5살 때 뉴욕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아버지가 성을 데렌으로 부르기 쉽게 바꾸면서 그녀도 데렌이 되었습니다. '마야'라는 이름은 훗날 1943년 그녀가 할리우드로 이주했을 때 부처의 어머니 이름이자 그리스 신화 속 여신 헤르메스의 어머니 이름 'Maia'에서 동시에 따와서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린 시절 마야는 러시아, 유럽, 미국 등 다양한 곳에서 교육받았습니다. 데렌은 파리로 간 엄마를 따라 스위스에서 국제학교를 다닌 뒤 뉴욕으로 돌아와 시라큐스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고, 졸업한 뒤 다시 뉴욕대학교에 입학해 문학을 전공합니다. 그동안 그녀는 젊은 트로츠키스트들의 사회주의 연맹에 참여했는데 여기서 그레고리 바다크를 만나 18세에 결혼합니다. 이후 몇 년만에 이혼한 그녀는 스미스 대학에 들어가 영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데렌은 사진으로 영상 매체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항상 자신이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뉴욕에서 유럽 이민자 예술가들을 위한 잡지에 편집 조수 겸 프리랜서 사진가로 일을 시작합니다. 당시 그녀는 유럽 스타일 수제 의상, 곱슬머리, 사나운 인상으로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스타일을 갖고 있었습니다.


데렌은 춤, 아이티 부두교, 초현실주의 등을 흑백화면으로 표현했습니다. 다중초점, 점프컷, 슬로모션 등 다양한 테크닉으로 분절된 공간에서 연속된 동작을 표현하는데 능했고, 의식의 흐름에 따른 영상 만들기를 즐겼습니다.


<오후의 그물>의 장면들


그녀의 대표작은 알렉산더 해밋과 공동작업한 <오후의 그물>(1943), <땅에서>(1944), <카메라를 위한 안무 연구>(1945) 등입니다. 데렌은 이 세 편을 묶어 1946년 '세 편의 버려진 영화들'이라는 타이틀로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녀는 '버려진'이라는 단어를 기욤 아폴리네르의 글에서 가져왔습니다. "예술은 결코 완성되거나 버려지지 않는다"는 문장입니다. 제목은 아이러닉하지만 전시회는 대박이었습니다. 행사는 완전 매진됐고 아모스 포겔의 'Cinema 16'이라는 1950년대 실험영화 집단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1944년 그녀는 마르셀 뒤샹, 앙드레 브르통, 존 케이지, 아나이스 닌 등 예술가들과 어울립니다. 1944년에는 구겐하임의 미술관에서 뒤샹과 함께 <마녀의 요람>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그녀는 몇몇 작품에 직접 출연까지 했지만 크레딧에 배우로는 이름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1940~50년대에 걸쳐 데렌은 미국영화를 독점하고 있는 할리우드와 각을 세웠습니다. 그녀는 "나는 할리우드가 립스틱 살 돈으로 영화를 찍는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항상 예술의 자유를 추구했던 그녀는 독립영화에 필요한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예술적인 자유는 아마추어 영화인들이 자신의 비전을 희생하기를 강요당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추어 프로덕션은 90분 동안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붙잡기를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 대신, 바람, 물, 아이들, 사람들, 엘리베이터, 공 등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치 시가 이들을 노래하듯 말이다."



6. 셜리 클라크



미국의 실험영화 감독 셜리 클라크의 본명은 셜리 크림버그로 뉴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폴란드 이민자로 제조업으로 돈을 벌었고, 어머니는 백만장자 유대인 발명가의 딸로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에서 댄스 수업을 받던 그녀는 아버지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트 클라크라는 남자와 결혼한 뒤 뉴욕 아방가르드 신에서 댄서로 예술 활동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춤와 안무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에 방향을 영화로 변경합니다. 첫번째 영화는 춤을 담은 영화로 제목은 <태양의 춤>(1953)입니다. 뉴욕댄스영화협회는 이 영화를 그해 최고의 댄스영화로 선정했고 이에 그녀는 본격적으로 영화를 공부하며 영화제작에 도전합니다.


그녀는 마야 데렌, 스탠 브래키지, 요나스 메카스, 라이오넬 로고신 등과 함께 독립 영화인들 모임의 회원이 됩니다. 그녀는 <스카이스크래퍼>(1959)로 아카데미상 단편영화 부문 후보에 오릅니다. 이 영화는 1957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5번가 666번지의 건축과 록시 극장의 폐관을 동시에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1959년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에서 골든게이트상을 수상합니다.


1961년에 클라크는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위한 성명'에 서명하고 1962년에는 뉴욕의 영화인조합을 공동설립할 정도로 활발한 대외활동을 했습니다.


1960년대 들어 그녀는 장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1961년 <커넥션>은 잭 겔버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히로인에 중독된 재즈 뮤지션의 이야기입니다. 흑백으로 영화적 리얼리즘을 추구한 이 영화는 새로운 스타일을 구축한 뉴욕 독립영화 운동의 이정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칸 영화제에 초청됐습니다.


클라크의 영화들은 심의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뉴욕주로부터 상영 금지되었는데 <커넥션>은 제한적으로 상영되었습니다. 그나마 포르노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다는 이유로 논란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커넥션>


다음 영화 <쿨 월드>(1964)는 할리우드 스타일이 아닌 방식으로 흑인 갱을 최초로 담은 영화입니다. 할렘을 배경으로 워렌 밀러의 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 세상과 싸우는 연인>(1963)은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가 직접 출연하며 그해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습니다.


클라크는 페미니스트적인 주제를 영화 속에 담지는 않았지만 여성 감독으로서 투쟁하며 영화를 만드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힌 적 있습니다.


"내가 성공한 이유가 몇 가지쯤 있다. 하나는, 내가 먹고 살 만큼 충분한 돈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계속해서 유지하고 싶은 분야를 선택했고 거기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여성들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아니다. 나는 흑인들의 문제를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느낀 감정이 그들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내가 마약쟁이들에 관한 영화인 <커넥션>을 완성했을 때 나는 마약쟁이에 대해 잘 몰랐다. 그것은 아웃사이더에 대한 상징이었다. 나는 늘 혼자라고 느꼈다. 내가 속해 있는 문화에서 아웃사이더였다. 나는 여성들이 활동하기 힘든 시대를 살았다. 그런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 기억해둘 여성 영화감독 20인 (3) 바바라 코플, 캐스린 비글로우, 에바 두버네이



참고 사이트:

Leni Riefenstahl Wikipedia

Maya Deren Wikipedia

A Life of Choreographed for Camera by Mark Alice Durant

Shirley Clarke Wikipedia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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