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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 3회에서는 비교적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의 여성 감독 3인을 꼽아봤습니다. 앤 헤서웨이 주연의 <하복>을 만든 바바라 코플, <허트 로커>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캐스린 비글로우, <셀마>를 만든 흑인감독 에버 두버네이입니다.
7. 바바라 코플
<할란 카운티, USA> 촬영장에서 바바라 코플(왼쪽)과 촬영감독 하드 페리.
194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난 바바라 코플은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코플은 아카데미 다큐멘터리상을 두 번 받았습니다. 한 편은 켄터키 광산 노동자들의 파업을 다룬 1976년작 다큐멘터리 <할란 카운티, USA>, 또 한 편은 1985~86년 사이 오스틴에 위치한 호멀 푸드사의 파업을 다룬 1991년작 <아메리칸 드림>을 통해서입니다. 그녀는 TV드라마 <살인사건: 거리의 인생> 중 일부 에피소드를 연출해 미국감독조합상을 수상한 적도 있습니다.
코플 하면 연상되는 이름 중 하나는 우디 앨런입니다. 그녀가 우디 앨런과 순이 프레빈이 함께 딕시랜드 재즈 투어에 참가하는 내용을 다큐멘터리로 만든 적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를 비롯해 그녀는 그레고리 펙과의 인터뷰를 편집해 <그레고리 펙과의 대화>를 만들었고, 마이크 타이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만든 적도 있습니다.
<할란 카운티, USA>
이렇게 다큐멘터리에서 자기 영역을 구축한 코플은 2005년 처음으로 장편 극영화에 도전합니다. 앤 헤서웨이, 비주 필립 주연의 <하복>입니다. 10대들의 성장통을 그린 영화였는데요. 아쉽게 극장 개봉하지 못하고 곧장 DVD로 출시됐습니다.
이후 다큐멘터리로 다시 돌아간 그녀는 2006년 미국 여성 뮤지션으로 사상 최고의 음반 판매량을 기록한 딕시 칙스가 조지 부시 대통령을 공격하는 이야기 <딕시 칙스: 셧업 앤 싱>을 만듭니다. 그녀의 정치적 스탠스를 보여주는 영화였죠. 2012년에는 헤밍웨이의 손녀에 관한 영화 <러닝 프럼 크레이지>를 만들었습니다.
아직까지 코플에게 있어 최고의 작품은 <할란 카운티, USA>입니다. 2014년 영국의 [사이트 앤 사운드]지는 이 영화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다큐멘터리' 순위에서 24위로 꼽았습니다.
8. 캐스린 비글로우
<제로 다크 서티> 촬영장의 캐스린 비글로우
오스카 감독상 트로피를 거머쥔 캐스린 비글로우
195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카를로스에서 태어난 캐스린 비글로우의 아버지는 페인트 공장 매니저였고 엄마는 노르웨이 혈통의 사서였습니다. 어릴적 그녀는 아버지의 페인트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자연스럽게 미술이 그녀의 진로가 되었습니다.
비글로우는 1970년 샌프란시스코 미술학교에 진학해 1972년 예술 학사학위를 받은 뒤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합니다. 중간에 특이한 이력이 하나 있는데 맨해튼에서 부동산 사업을 한 것입니다. 이때도 물건을 사고팔기보다는 다운타운 아파트를 개조해 수익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콜럼비아대 대학원에 들어가 이론과 비평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이때 그녀를 가르친 교수 중에는 비토 아콘치, 실베르 로트링거, 수잔 손탁, 앤드류 새리스,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대가들이 있었습니다.
졸업 후 그녀는 캘리포니아 예술학교와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강의를 합니다. 어찌보면 완전히 학자가 될 운명이었습니다만 그녀는 여기서 새로운 도전을 합니다.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녀가 만든 20분짜리 단편 <셋업>(1978)을 마침 거장 밀로스 포만 감독이 봤고 그는 좋은 평가를 해줍니다. <셋업>은 폭력의 해체를 이미지로 표현한 영화로 내용은 이렇습니다. 두 남자가 싸우는 동안 기호학자 실베르 로트링거와 마샬 블론스키가 목소리 출연해 이미지를 해체합니다. 약간 실험영화일 것 같습니다. 비글로우는 두 남자 배우들에게 실제로 치고받고 싸울 것을 주문했는데요. 첫 영화부터 비글로우의 폭력적인 스타일을 드러낸 셈입니다.
이후 그녀는 드디어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첫 영화는 <러브리스>(1982)로 윌렘 데포가 주연한 오토바이 영화입니다. 몬티 몽고메리와 공동연출했습니다.
<러브리스>의 평가가 나쁘지 않았고 그녀는 두번째 영화 <니어 다크>(1987)를 만듭니다. 이어서 영국 록밴드 뉴오더의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감각을 익힙니다.
캐스린 비글로우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린 작품은 이후 그녀가 연출한 세 편의 액션 영화입니다. <블루 스틸>(1989), <포인트 브레이크>(1991), <스트레인지 데이스>(1995)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할리우드에서 통한다는 것을 입증했습니다. 특히 <포인트 브레이크>는 그녀가 만든 영화 중 가장 높은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린 영화입니다. 이제 그녀는 마치 남자같은 액션 영화를 만드는 여성 감독으로 주목받습니다.
1990년에 그녀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만약 여성이 영화를 만드는데 어떤 장애가 있다면, 난 다음 두 가지 이유로 그것들을 무시할 것이다. 첫째, 나는 내 성을 바꿀 수 없다. 둘째, 나는 영화 만들기를 멈출 수 없다. 영화를 볼 때 누가 만드는지를 누가 신경 쓰나. 중요한 것은 관객이 응답하는지 안하는지다. 여성 감독은 더 많아져야 한다."
비글로우는 액션영화를 통해 스타를 발굴한 감독이기도 합니다. <블루 스틸>은 제이미 리 커티스, <포인트 브레이크>에선 키아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지를 캐스팅했고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세 편의 액션영화 이후 비글로우는 침체기를 걷습니다. <물의 무게>(2000) <K-19: 위도우메이커>(2002) 등은 흥행성적도 평단의 평가도 그저그랬습니다. 그러나 절치부심하던 그녀는 2008년 한 편의 영화를 내놓으면서 세상을 뒤흔들고 커리어 반전을 이룹니다. 그 영화가 바로 <허트 로커>입니다.
<허트 로커>
이라크 전쟁 이후의 이라크에서 폭탄 제거 과정을 그린 <허트 로커>는 2008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인 후 2009년 미국에서 개봉했습니다. 유럽의 평가를 등에 업고 미국으로 유턴한 것이죠. 평단은 열광했고 로튼 토마토에선 97%의 신선도 지수를 받으며 '물건'임을 입증합니다. 드디어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비글로우는 감독상과 작품상을 받으며 무려 80년간 지속된 아카데미상 금녀의 벽을 깨뜨립니다. 그녀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으로 역사에 남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감독상 후보에 비글로우의 전남편 제임스 카메론 역시 <아바타>로 후보에 올랐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트로피는 비글로우의 것이었지만요. 비글로우는 1989년 카메론과 결혼했지만 1991년 이혼했습니다.
이후 비글로우는 비슷한 컨셉트의 영화 <제로 다크 서티>(2012)로 <허트 로커>의 영광을 재현하려 합니다. 오사마 빈 라덴을 추격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히로인 제시카 차스테인은 이 영화로 스타로 발돋움합니다. 이 영화 역시 호평받아 그녀는 뉴욕평론가협회상 감독상을 2회 수상하는 기록을 남깁니다.
9. 에바 두버네이
1972년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태어난 두버네이는 교육자인 엄마와 사업가인 아빠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앨러배마주 몽고메리와 셀마 사이의 헤이네빌이라는 작은 마을 출신으로 두버네이는 아버지의 고향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곤 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그녀가 나중에 영화 <셀마>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어릴 때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의 행진을 직접 봤다고 조언해 주었거든요.
그녀는 UCLA에서 영어와 아프리칸 아메리카를 복수전공합니다. 대학 시절 그녀는 방송 저널리즘에 관심을 가졌고 CBS 뉴스에서 인턴을 하며 O.J. 심슨 재판을 취재했습니다. 이때 그녀는 저널리즘에 환멸을 느껴 광고로 전향합니다.
두버네이는 졸업 후 폭스, 사보이 픽처 등에서 일하며 홍보 업무를 맡습니다. 이후 그녀는 1999년 두버네이 에이전시를 차려 독립했는데 100편의 영화와 TV 프로젝트에 전략을 제공하며 승승장구합니다. 그 영화들은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이클 만, 로버트 로드리게즈, 케빈 스미스, 빌 콘돈, 라울 펙, 게린더 차다 같은 특급 감독들이 참여한 프로젝트였습니다.
2008년 그녀는 드디어 직접 영화 만들기에 도전합니다. 첫 번째 영화는 다큐멘터리 <디스 이스 더 라이프>로 LA의 굿 라이프 카페의 예술운동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었습니다. 그녀가 데뷔작으로 장편 극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택한 이유는 더 적은 예산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적 있습니다.
2011년 두버네이는 첫번째 내러티브 장편영화를 만듭니다. 제목은 <아이 윌 팔로우>. 그녀 자신이 직접 예산 5만 달러를 전액 투자해 15회차 동안 한 장소에서 촬영했습니다. 평론가 로버 이버트는 이 영화를 본 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다룬 영화 중 내가 본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극찬했습니다.
그해 여름, 두버네이는 두번째 영화 <미들 오브 노웨어> 제작에 착수합니다. 2012년 선댄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두버네이는 감독상을 수상합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 이 상을 받은 것은 그녀가 처음입니다.
<셀마>
그녀의 세번째 영화는 2천만 달러 예산의 <셀마>(2014)입니다. 브래드 피트의 플랜B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1965년 셀마 행진이 영화의 테마입니다. 이 영화로 그녀는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작품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첫번째 흑인 여성 감독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린든 B. 존슨을 왜곡해 묘사했다는 이유로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존슨 측은 FBI를 마틴 루터 킹에게 보내지 않았다며 감독에게 항의했습니다. 이에 대한 두버네이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에요.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스토리텔러입니다."
어쨌든 <셀마>는 2015년 아카데미 작품상, 주제가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감독상 후보에서는 제외돼 아카데미가 인종차별하고 있다는 논란을 촉발하는 계기가 됩니다.
>> 기억해둘 여성 영화감독 20인 (4) 리나 베르트뮐러, 제인 캠피언, 소피아 코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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