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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당초 영화의 제목은 ‘여교사’였다. 이후 ‘불량소녀’로 바뀌었다가 ‘행복이 가득한 집’이었다가 최종적으로 ‘비밀은 없다’로 확정됐다. 네 가지 서로 다른 제목이 영화의 비밀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행복이 가득한 집의 엄마가 여교사와 불량소녀의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다. 23일 개봉한 영화 <비밀은 없다>에 담긴 비밀을 하나씩 살펴보자.



▶비밀 하나. 홍당무 세계의 친절한 금자씨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에는 박찬욱 스타일이 공존한다. 마치 <미쓰 홍당무>(2008)와 <친절한 금자씨>(2005)를 합쳐 놓은 듯하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여교사와 여학생들 사이의 섬세한 감정과 유머는 영락없는 <미쓰 홍당무>고, 강한 의지를 가진 여주인공이 꼼꼼하게 사건을 파헤쳐가는 방식은 <친절한 금자씨>를 닮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비밀은 없다>는 <미쓰 홍당무>로 호평 받으며 데뷔한 이 감독의 두 번째 영화다. 무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는 ‘여교사’라는 가제의 시나리오를 고치고 또 고쳤다.


한예종 영상원에서 두각을 나타낸 뒤 단편영화 <잘돼가? 무엇이든>으로 박찬욱 감독의 눈에 띈 이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의 스크립터로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는 첫 영화 개봉 이후 박찬욱의 차기작 시나리오를 쓰며 시간을 보냈지만 좀처럼 두번째 영화를 만들 기회를 잡지 못했다. 이때 박찬욱이 ‘여교사’ 중 정치인 부부와 딸의 이야기를 메인 플롯으로 바꿔볼 것을 제안했고 두 사람의 공동작업으로 막힌 고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박찬욱 스타일을 흡수한 이경미 감독의 결과물은 낯설다. 그런데 그 낯섦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기운이 시종일관 영화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비밀은 없다>는 이 감독이 보낸 8년이라는 시간이 눈에 보일만큼 꼼꼼하게 만들어진 영화다. '홍당무 세계의 금자씨'를 따라 감독이 이끄는대로 가다보면 어느새 놀라운 반전과 마주하게 되는데 반전의 결과보다 과정이 더 흥미진진하다.


이경미 감독


▶비밀 둘. 우리가 처음 보는 손예진


첫사랑의 아이콘 손예진은 지난 10여년 간 연기 변신을 위해 다양한 배역을 맡아 왔다. 불륜에 빠진 유부녀(<외출>), 아이를 유산한 이혼녀(<연애시대>), 두 남자와 결혼하는 당찬 여성(<아내가 결혼했다>)을 거쳐 소매치기(<무방비도시>), 방송기자(<스포트라이트>), 해적 두목(<해적: 바다로 간 산적>)까지… 소위 ‘대박’은 없었지만 어느 한 작품도 큰 실패 없이 신뢰를 쌓아왔다. 덕분에 수많은 여배우들이 등장했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때에도 대표 여배우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비밀은 없다>는 손예진의 연기 폭이 계속해서 확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손예진은 사랑스런 아내와 복수의 화신을 넘나든다. 살랑살랑 눈웃음치며 남편(김주혁)을 껴안을 땐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남편(역시 김주혁)에게 다른 남자와도 결혼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주인아처럼 보였다가 딸의 실종을 알게 된 뒤 비닐옷을 입고 집요하게 추적하는 장면에선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가 겹쳐 보인다. 이는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손예진의 모습이다.


중3 딸을 둔 엄마를 연기하는 것도 낯설지만 후반부에서 보여준 강렬한 모습은 손예진이어서 반전에 더 힘이 들어간다. 아마도 (공효진이나 문소리처럼) 이런 역할에 으레 더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배우가 연기했다면 호기심이 덜했을 것이다. 모성애와 증오 사이, 어려운 감정을 표정으로 소화하는 연기력에서 수년 간 쌓아온 필모그래피의 저력이 느껴진다.



▶비밀 셋. 기존 틀을 깨는 독창성


국회의원 선거 유세 첫날, 유력 후보 김종찬(김주혁)의 딸 민진(신지훈)이 실종된다. 선거운동을 강행하는 남편에 실망한 아내 연홍(손예진)은 홀로 딸의 행방을 쫓다가 딸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모성애, 왕따, 동성애, 정치, 불륜, 배신과 복수 등 이 영화의 소재는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런데 영화는 연관성 없어보이는 소재들을 한줄로 꿴다. 그것도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둘러가는 게 아니라 직선으로 달려 속도감이 대단하다.


때론 수박 겉핥기처럼 보이고, 어떤 장면들은 맥락없이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의 소재들은 철저한 계산에 의해 쓰였다. 가령 딸이 다니는 학교에 종찬이 일일교사를 맡는 장면에선 그가 목소리로만 등장하는데도 복선이 되고, 연홍이 딸의 이메일을 확인하는 장면은 인물의 집요함을 설명해주는 역할과 후반부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기능을 동시에 한다.



영화는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카메라 앵글이나 편집을 거부한다. 생략해도 되는 부분은 강조하고, 으레 있어야할 장면들은 건너뛴다. 사운드는 나와야 할 자리에서 침묵하고, 쓰이지 않을 것 같은 곳에 등장한다. 이렇게 진행해도 괜찮나 싶은데 어느새 이야기는 증폭되어 내달리고 있다. 여기에 클로즈업과 과감한 점프컷, 그리고 과정을 통해 결과에 도달하는 귀납적 편집이 아닌 결과를 선언하고 과정으로 돌아가는 연역적 편집이 인물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어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또 홀리듯 반복되는 영화 속 Joan Faye의 노래 ‘Wild Rose Hill’(실제로는 민진 역을 맡은 SBS ‘K팝스타’ 출신 배우 신지훈이 부른다)는 영화의 톤과 감성을 일정하게 유지해준다.



이처럼 세 가지 요소들로 인해 <비밀은 없다>는 아주 독특한 스릴러가 됐다. 디테일과 유머가 살아 있으면서 때론 당혹스러울 만큼 몰아치며 긴장감을 유지하는 영화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다. 근래 나온 한국영화들 중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비밀은 없다 ★★★★

수백 개의 스팸메일들 속에서 찾아낸 보석.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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