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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남성의 판타지: 사회적으로 성공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언제든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모두 말장난에 불과할 뿐 보이지 않는 진실을 갈구하고 있다고 여기며, 상대방을 현혹하는 근사한 말솜씨까지 갖춘 남성이라면 나이 들고 올챙이 배가 나왔어도 젊은 여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의 판타지: 그 남자는 나이 들었지만 연륜만큼 다양한 경험을 쌓았고, 삶의 지혜를 단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했으며, 넓은 아량으로 보채거나 함부로 추근덕대지 않고, 안주하는 대신 언제라도 모험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 풋내기 같은 또래 남자들보다 자신을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해줄 거라고 믿는다.
우디 앨런 감독의 46번째 영화 <이레셔널 맨>은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두 판타지가 만나 충돌하는 이야기다. 급진적인 시각과 독특한 이론으로 철학계의 스타 교수가 된 에이브 루카스(호아킨 피닉스)는 시골 대학에 부임해 학생 질 폴라드(엠마 스톤)를 만난다. 지독한 염세주의자로 숨 쉬는 의욕마저 상실한 루카스는 폴라드를 거절하지만 그녀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마음을 연다.
신경증에 시달리는 지식인의 일탈이라는 점에서 루카스는 우디 앨런 영화의 단골 캐릭터다. 앨런은 가장 이성적이라고 칭송받아온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저지를 때를 포착해 이를 '삶의 아이러니'로 의미 부여한다. 철학과 문학을 섭렵한 앨런 특유의 지적인 유머가 곁들여져 스스로 지성을 갖췄다고 믿는 관객들(주로 미국 중상류층과 프랑스인)이 그의 영화에 열광한다. 앨런은 이러한 방법으로 거의 50년간 자기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왔다.
매사 까칠하면서 인간 관계에 예민한 루카스 역은 아마도 앨런이 더 젊었다면 조금 더 유머러스하게 바꿔 자신이 직접 연기했을 것이다. 그는 이런 배역을 많이 맡아 왔고 실제로도 이런 성격이라고 고백한 적 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루카스를 연기한 호아킨 피닉스를 보고 있으면 자꾸만 앨런 감독이 겹쳐 보인다. 게다가 상대 배우는 새롭게 우디 앨런의 세계에 합류한 엠마 스톤이다. 스칼릿 조핸슨과 키스 신을 찍고 싶어 <스쿠프>(2006)에서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직접 주연까지 맡았던 앨런 아니던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앨런이 아닌 피닉스가 루카스를 연기한 덕분에 엠마 스톤이 비이성적인 철학교수에게 빠져 하룻밤 자자고 졸라대는 장면을 보는 게 곤혹스럽지 않게 됐다.
<이레셔널 맨> 촬영장의 우디 앨런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른 사람이 더 있다. 앨런 만큼이나 자신만의 영화세계를 구축해온 홍상수 감독이다. 그는 영화 속 루카스처럼 스타 교수이고, 앨런처럼 지식인의 허리 아래 위선을 주제로 코미디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다. 또 비도덕적인 스캔들을 일으켰다는 점에서도 앨런과 닮았다. 김민희는 중년 남성이 내뿜는 이성적 허무주의에 반해 그를 보듬고 싶어한 젊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영화 속 폴라드 혹은 앨런의 입양딸에서 아내가 된 순이 프레빈을 떠오르게 한다.
김민희와 홍상수 감독(오른쪽)
두 감독의 영화는 그들의 삶을 닮았다. 주위 시선 아랑곳 않고 스스로 영화처럼 살고, 영화 속에 자신을 녹이는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사회라는 시스템에 가려진 인간의 본성을 판타지로 포장한 뒤 그것을 부수거나 혹은 판타지의 작동 원리를 폭로하며 인생은 거부할 수도 답할 수도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앨런의 영화를 보고 나면 모순덩어리인 인생의 한 측면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고,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나면 속마음을 들킨 듯 괜히 낯뜨거워 진다.
영화는 인생을 모방하고, 또 인생은 영화를 닮아간다. 두 예술가는 그들이 영화 속에서 희화화해 온 대상처럼 사는 삶을 택했다. 이런 그들에게 세속적인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디 앨런의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싶으면 그가 만든 영화 속 캐릭터를 보면 된다. 홍상수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그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불륜 감독이 된 자기 자신을 희화화해 언젠가 또다른 영화를 만들지도 모른다. 아마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이레셔널 맨>에서 루카스는 독일 철학자 칸트를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옳고 그름은 행위의 목적이 아니라 그 결과로 인해 사후 해석되는 가치일 뿐이라고. 이에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온갖 구실을 만들어 자신이 하게 될 행동을 합리화한다. 그도 분명히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지탄을 받을지 알고 있지만, 나쁜 결과보다 긍정적인 결과만을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면 할수록 지켜보는 관객은 그를 더 비이성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쩌면 이는 루카스, 우디 앨런, 홍상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아이러니일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판타지를 비웃지만 판타지는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삶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적으로 부서지기 쉬운 만일의 사태를 조건으로 살고 있다. 삶이 한 순간 부서져 버리는 것은, 거리에서 몸을 잘못 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디 앨런의 이 말은 두 예술가의 삶을 바라보는 데에도, 영화 <이레셔널 맨>을 해석하는 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레셔널 맨>은 앨런이 충분히 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결말로 마무리한다. 영화 속에서 비이성적인 자는 최악으로 치닫고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의 판타지는 산산조각난다.
사실 사람들은 무한히 상승하기만 하는 판타지보다 위대한 판타지가 파멸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남들이 잘 되는 건 배아프지만 망하면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끼지 않던가. 이야기는 사람들의 이런 보편적인 심리를 이용한다. 완벽해 보이는 사람의 음흉한 실체가 드러나고, 가장 믿었던 사람이 항상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하며, 총이 등장하면 언제나 그 총은 발사되고, 사랑의 징표가 그 사랑의 끝을 알리는 도구가 된다. 이 와중에 한눈 팔지 않고 기다린 사람만이 끝내 보상 받는다.
<이레셔널 맨> 속에는 이 모든 요소가 다 들어 있다. 비이성적인 사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 시도한 영화이면서 관객이 편안하게 느끼는 이야기의 법칙을 십분 활용해 그들이 도덕적인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영화다. 예전 우디 앨런 영화에서 곧잘 볼 수 있었던 엉뚱하고 날카로운 상상력은 부족하지만 루카스라는 비이성적인 캐릭터가 던지는 허무한 질문만큼은 오래 남는다. 인생과 사랑이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사람이라면 진득하게 극장에 앉아 루카스와 폴라드의 우스꽝스런 판타지를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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