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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를 봤습니다. 동명일보라는 신문사의 연예부가 영화의 배경입니다. 초반은 재미있었습니다. 인턴기자로 입사한 박보영이 어리바리하게 행동하면 부장 역할의 정재영이 불처럼 화를 냅니다. 뻔한 직장상사와 신입사원 구도지만 두 사람의 케미가 귀엽습니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박보영은 정재영을 호칭만 ‘부장님’이 아닌 ‘부장’이라고 부를 뿐 사실상 부장님 대하듯 어려워합니다. 아무래도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성격도 불같으니 쉬울 리가 없겠죠. 하지만 정재영은 보수적인 것 같으면서도 꽤 허당 캐릭터여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특히 박보영이 특종을 물어왔을 때 정재영이 근엄한 표정을 짓다가 볼펜을 일부러 떨어뜨린 뒤 고개를 숙이고 앉아 두 손을 불끈 쥐며 몰래 환호하는 모습에선 신나게 웃었습니다.


그런데요. 영화는 후반부로 가면서 실망을 안겨줍니다. 결말이 참 뜬금없는 판타지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한국영화에서 이 영화와 엇비슷한 결말을 많이 봤습니다. 언론의 구조적인 문제를 SNS 폭로로 덮으려는 영화들 말입니다. 뭐가 있었는지 살펴볼까요?



무능력한 언론 대신하는 SNS


우선 2015년엔 <베테랑>과 <내부자들>이 있었습니다. 2014년엔 <찌라시: 위험한 소문>이 있었고요. 2010년엔 이런 설정의 거의 원조격인 <부당거래>가 떠오르네요. 이 영화들에서 언론은 무능하거나 부당해서 진실을 전달하는 제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억울한 주인공 혹은 비중 있는 조연은 괴로워하다가 중요한 증거를 SNS에 올리는데 이를 통해 대중이 진실에 접근하면서 사건이 해결됩니다.


<베테랑>에선 경찰관이 재벌3세와 싸우는 도중 이를 촬영한 시민들이 동영상을 SNS에 올리면서 사건이 급반전되고, <내부자들>에선 정치-기업-언론 카르텔의 성접대 자리에 참석한 내부자 검사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리며 이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폭로됩니다. <찌라시: 위험한 소문>에선 전직 신문기자 출신 찌라시 유통업자를 돕는 도청 전문가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려 진실을 밝히고, <부당거래>에선 검사가 재벌에게 스폰을 받는 사실이 동영상을 통해 세상에 알려집니다.


마찬가지로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선 언론사의 사주가 광고주에 불리한 기사 보도를 막는 사이 동료들이 기사를 SNS에 올리는데 이것이 퍼지면서 소속 연예인을 협박한 연예기획사 대표는 여론재판을 받고 구속됩니다.


<내부자들>

<부당거래>


이처럼 최근 한국영화들에서 묘사된 언론과 언론인의 모습은 답답함 그 자체입니다. 불편부당한 공공기관으로써의 역할이나 진실을 밝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저널리스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능구렁이처럼 검찰과 재벌에 들러붙는 기자(<부당거래>), 재벌에 빌붙어 정치깡패를 수하로 부리는 논설주간(<내부자들>), 취재원에게 접대받는 데스크(<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룸살롱에서 찌라시 만드는 연예기자(<찌라시: 위험한 소문>) 등 하나같이 구악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비단 이 영화들 뿐만 아닙니다. <특종: 량첸살인기>의 방송 기자와 보도국장은 특종이 오보인 것을 알면서도 시청률 때문에 계속 거짓말을 하고, <더 테러 라이브>(2013)의 앵커 역시 시청률에 눈이 멀어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테러범과 단독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돌연변이>(2015)에선 기자들이 파업한 사이 시용기자로 채용된 청춘이 자괴감에 빠지고,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에선 우라까이(베끼기)하는 인턴기자가 등장해 우리 시대 언론인의 슬픈 자화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반면 SNS는 그 폐해를 소재로 다룬 <소셜포비아> 같은 영화가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언론의 대체제로 더 많은 역할을 부여받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억울한 사연을 가진 인물들이 언론에 보도되지 못한 내용을 SNS에 올리기만 하면 콘텐츠가 알아서 퍼져 나가고 여론이 형성돼 사건이 해결되는 식입니다.


<찌라시: 위험한 소문>

<특종: 량첸살인기>


한국 언론의 불편한 민낯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우리 주위에 제대로 된 언론이 많다면 이런 영화들이 환영받기 힘들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 언론은 겉으로는 번지르르 하지만 민낯은 참 못생겼고 영화는 그 민낯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 “아이들이 구조됐다”는 대형오보를 날리고도 사과하지 않은 지상파 방송, 인기검색어가 들어간 기사 베끼기 경쟁하며 출처가 불분명한 글을 쏟아내는 인터넷 언론사들, 여자연예인이 자살했는데도 비키니 사진을 올리는 도덕불감증 미디어, ‘정치인 이름 획수로 궁합 알아보기’ 같은 가십을 뉴스로 보도하는 종편, 돈 받고 정부 홍보 기사 써주는 신문사,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에 영합해 편파보도가 일상이 된 메이저 신문, 권력형 비리 고발하는 기자 한직으로 발령낸 방송사 등 창피한 한국언론의 민낯을 보여주는 예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인 ‘기레기’라는 단어가 기자를 지칭할 때 아무 거리낌없이 쓰인지 이미 오래고, 인터넷 언론사들의 범람으로 많은 뉴스 사이트들은 기사를 읽기 힘들 정도로 성형외과 광고와 야한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 지경까지 온 것이 언론만의 책임은 아닙니다. 콘텐츠 소비자들이 정성들여 만든 콘텐츠에 제값을 쳐주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광고로 먹고 살기 위해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게 된 것이죠. 결국 방송뉴스는 시청률경쟁, 인터넷뉴스는 포털 검색어 따먹기 경쟁, 신문뉴스는 광고주 충성경쟁 등 과당경쟁이 지금의 언론지형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들 중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보자>(2014)는 황우석 사건의 실체를 파헤친 PD가 주인공이었고, <소수의견>(2015)에선 국가상대 손배사건을 보도하는 기자가 중요한 역할을 했죠. 하지만 모두 흥행에선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소수의견>


한국영화 속 언론인들이 전반적으로 비뚤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해 미국영화 속 언론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작년 가을에 개봉한 <스포트라이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한국에선 2월 25일 개봉 예정) 저는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만, 2002년 가톨릭교회 아동 성추행 스캔들 보도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신문사 보스턴 글로브의 스포트라이트팀 기자들이 주인공이라고 합니다.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2009)라는 영화도 떠오르는데 이 영화는 워싱턴 글로브의 기자가 온라인 신입 기자와 함께 차기 대권주자와 거대 기업 사이의 스캔들을 파헤치는 이야기입니다. 또 미드 <뉴스룸>에는 매번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 고민하는 베테랑 앵커와 열정 넘치는 기자들이 등장하죠.


이들은 우리가 '저널리스트'라는 단어를 쓸 때 생각하는 그런 용기있고 정의감 넘치는 인물입니다. 모두들 크고 작은 고민에 빠져 있지만 결국엔 위험을 무릎쓰고 기사를 보도해 정의를 실현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한국영화 속 언론인들과 다릅니다. 한편으론 너무 전형적이어서 스테레오타입형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오히려 그렇기에 관객 입장에선 뒤통수 맞을 걱정 없이 안심하고 그들에게 감정이입해 사건에 몰입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선 언제쯤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또 환영받을 수 있을까요?


<스포트라이트>

<스테이트 오브 플레이>


SNS 폭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한국에도 분명 저널리스트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명감 투철한 언론인들이 있습니다. 또 이제 막 언론인이 된 많은 수습기자들은 검색어 따먹기나 하자고 기자가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경쟁과 경제에 종속된 언론을 둘러싼 환경이 자꾸만 그들을 옥죄어 그렇게 영혼없는 기사 작성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죠.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영화 속 언론인들은 계속 조롱받거나 악의 집단으로 남아 있어야 할까요? 아니, <내부자들>에 대해 일갈한 홍준표 지사의 지적처럼 영화에서 언론인을 나쁘게 그리지만 않으면 희망이 생기는 걸까요?


영화를 좋아하고 만들고 싶어하는 한 사람으로서, 한국영화에서 더 이상 클라이막스의 문제해결 방식이 SNS를 통한 폭로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해서 짜임새 있는 방식으로 해결해주기를 바랍니다. SNS 폭로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연상시킵니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 연극에선 골칫덩어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신이 기중기를 타고 내려와 질서를 잡았는데요. 이를 ‘기계 장치로 내려온 신’ 즉,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불렀습니다. 지금 한국영화에서 SNS 폭로가 딱 그 모양입니다.


SNS는 불특정 대중에게 뒷처리를 맡긴다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로마 연극의 신처럼 극중에서 '해결사' 역할을 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을 향해 “이거 너희들이 해결해”라고 떠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부당거래> 때는 이 방식이 처음이어서 신선했지만 이게 반복되다보니 플롯의 짜임새를 망칩니다. <내부자들>은 그 절정에 있는 영화였고,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는 아예 플롯을 포기한 것처럼 보여 안타까웠습니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


지금과 다른 결말을 위하여


한국영화의 결말이 바뀌려면 우선 영화가 반영하고 있는 현실, 즉 언론이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영화에서 SNS가 아닌 언론이 제대로 된 추적자가 되려면 현실에서도 언론이 진실 감시의 보루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한국언론은 여러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얼키고설켜 있는데 그 지저분한 구도를 어떻게 깨냐고요? '오컴의 면도날' 아시죠? 복잡하게 보일 땐 가장 간단한 게 답이라는 원리죠. 해법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습니다. 딱 두 가지만 이루어지면 됩니다. 첫째, 언론인들이 스스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으면 됩니다. 둘째, 뉴스 소비자들이 좋은 콘텐츠에 돈을 쓰면 됩니다. 그러면 언론은 본연의 역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문제는 다 부수적입니다. 이처럼 해법은 알고보면 참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길 원하는 사람보다 지금 이 상태에 만족하는 소수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세상은 잘 바뀌지 않습니다.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의 판타지가 가미된 결말은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어차피 현실에선 일어나기 힘든 마무리입니다. <내부자들>과 <베테랑>의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대리만족이나 얻으라는 건데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나고 나면 별로 위안도 되지 않고 여운이 오래 남지도 않습니다. 언제까지 이런 결말을 보고 있어야 할까요? 언론을 위해서도, 영화를 위해서도 이젠 바뀌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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