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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초겨울 2개의 영화상 시상식이 열린다. 상을 주는 분야도, 수상 후보에 오른 작품과 인물도 엇비슷하다. 그런데 하나는 폐지 위기에 몰릴 만큼 추락했고, 다른 하나는 영화인들이 앞다퉈 참여해 열기가 뜨겁다. 두 개의 상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작 시기는 비슷했다. 대종상은 1959년 교육부의 전신인 문교부의 ‘우수 국산영화상’으로 출발했다. 청룡영화상은 1963년 조선일보 주최로 시작했다. 대종상은 관 주도, 청룡영화상은 민간 주도였다. 대종상은 올해로 52회, 청룡영화상은 36회를 맞았다. 시작 시기가 비슷한데 횟수 차이가 큰 이유는 청룡영화상이 1974년부터 1989년까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3년 영화법 개정으로 스크린쿼터를 노린 수준 이하의 한국영화들이 다량으로 제작되면서 상 줄 영화가 없다고 판단해 상을 폐지했다.
썰렁했던 제52회 대종상 영화제
청룡영화상이 없을 때 대종상은 반공영화에 상을 줬다. 상 이름 중 우수 반공영화상, 중앙정보부장 각본상이 있을 정도니 군사정권 시절 대종상의 노림수는 영화를 통한 국민계도에 있었다.
대종상은 1992년 민간에 이양됐다. 하지만 계속해서 잡음이 나오는 이유는 운영의 불투명성 때문이다. 한동안 심사위원이 누구인지 공개하지 않았고, 운영진이 정부 지원금을 착복한다는 뒷말이 나오면서 신뢰를 잃었다. 올해 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들이 전원 불참한 사건은 대종상에 대한 영화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반해 청룡영화상은 1990년 재개한 이래 계속해서 영향력을 확장해가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절엔 조선일보에 반감을 가진 이창동 감독을 비롯한 몇몇 영화인들이 출품 자체를 거부해 한국영화를 대표한다는 상의 명분에 타격을 주기도 했으나 이젠 그런 잡음은 들려오지 않는다. 정치적인 부분을 떠나서 청룡영화상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때 MBC에서 안성기, 송윤아의 사회로 ‘대한민국 영화대상’을 만들기도 했지만 이젠 추억의 이름이 됐다.
나는 올해 처음으로 청룡영화상을 경희대 평화의 전당에서 직관했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시상식을 보면서 세 번 놀랐다. 첫째,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진행, 둘째, 배우들의 놀라운 참석률, 셋째, 납득할 만한 수상결과가 그것이다.
먼저, 청룡영화상은 김혜수가 주는 상이라고 할 정도로 그녀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무려 22년 동안 MC를 맡고 있는 그녀는 능숙하게 시상식의 완급을 조절할 줄 안다. 자화자찬에 홍보 멘트를 날리는 시상자들의 모습은 다른 시상식과 큰 차이가 없지만 유일하게 청룡영화상에만 있는 것은 김혜수의 존재다. 그녀는 실수 한 번 없이 2시간의 생방송을 이끌어간다. 이번 시상식을 보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대본에 어디까지 있는지 모르지만) 대리수상자가 수상하러 나올 때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이름과 직함을 정확히 불러준다는 것이었다. 이는 오랜 경험과 친분이 없으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남녀 주연상을 수상한 유아인과 이정현
둘째, 연기상 후보가 호명되면 중앙의 스크린에 후보 다섯 명의 얼굴이 뜨는데 부재한 배우가 거의 없었다. 다섯 중 넷은 빈 손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자리를 지켰다. (물론 1부에 상을 받고 떠난 배우들도 있긴 하다.) 대종상에 갖가지 이유를 들어 오지 않았던 배우들도 청룡영화상엔 왔다. 대리수상을 남발한 대종상과 달리 청룡영화상의 배우들은 (감독상을 받은 류승완을 제외하고) 아무도 대리수상하지 않았다.
셋째, 추락하는 대종상에 비해 청룡영화상이 영향력을 확장한 가장 큰 비결은 비교적 공정한 수상 결과에 있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어서 화제작인 <국제시장>, <암살>, <베테랑>, <사도>에 골고루 상을 나눠준 것뿐만 아니라, <소수의견>,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거인>처럼 작품성을 갖춘 소규모 영화까지 두루 챙겼다.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소수의견>
대종상이 2012년 <광해>에 15개, 올해 <국제시장>에 10개의 트로피를 몰아줄 때 청룡영화상은 빈 손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는 영화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대종상의 선택이 <광해>, <관상>, <명량>이었던 반면, 청룡영화상의 선택은 <피에타>, <소원>, <변호인>이었다. 2012년 <피에타>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받고 금의환향한 김기덕 감독은 그해 대종상 시상식에선 철저히 외면 당해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청룡영화상에선 당당히 작품상을 거머쥐었다.
또, 작년 김희애, 전도연, 손예진 등 쟁쟁한 후보들을 제치고 <한공주>의 천우희에게 여우주연상을 주며 다양성영화를 응원했던 청룡영화상은 올해 역시 김혜수와 전지현 대신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정현에게 트로피를 주며 이 영화를 재발견했다. 즉, 청룡영화상은 잡음이 나오지 않도록 대작들에 상을 안배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으면서도 한 두개의 트로피는 모험적인 선택을 하며 작은 영화를 응원한다. 이렇게 영리한 시상 전략과 김혜수의 능숙한 시상식 진행이 곁들여져 청룡영화상은 대종상이 욕 먹을 때마다 그 빈 자리를 채우며 스스로의 가치를 높여왔다.
제36회 청룡영화상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암살>
연말이 되면 다양한 분야에서 시상식이 열린다. 수상자가 간절히 원하는 노벨상 같은 상이 있는 반면, 어떤 상은 도대체 누가 왜 주는지 모르는 상도 있다. 사실 그런 상이 부지기수다. 상을 제정하고 주는 사람 혹은 조직의 입장에선 상에 권위가 서기를 바라겠지만 권위라는 게 내가 이만큼 돈 내고 공 들였다고 해서 생기는 게 아니다.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공정하다고 평가하고, 그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의 시스템으로 유지되는 것을 지켜본 후에야 만들어지는 것이 권위다.
대종상은 관치로 길들인 권위의 밑천을 너무 쉽게 드러냈고, 청룡영화상은 대종상에 가려 빛을 못 보다가 몇 년 전부터 차곡차곡 명성을 쌓아나가고 있는 중이다. 매년 초겨울 열리는 두 개의 영화상의 10년 후 모습은 어떨까? 아니, 10년 후 과연 영화상 시상식이 2개나 열리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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