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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상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상입니다. 영화인들이 함께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올해 5년째 대종상의 진행을 맡은 신현준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작품상 시상이 끝난 뒤 시상식을 마무리하며 한 발언이다. 1959년 시작된 대종상은 올해 52회를 맞았으니 가장 오래된 건 맞다. 그런데 그동안 이 상이 제정되고 상을 준다는 명목 하에 한국영화를 유린(?)해온 방식을 생각해보면 도대체 왜 56년이나 유지되고 있고 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대종상의 뿌리는 1959년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제정한 '우수 국산 영화상'이다. 할리우드 영화의 황금기였던 1950년대, 국산 영화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정부에서 우수 국산 영화상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영화는 태동기로 충무로의 국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던 시기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이전이고, 전쟁의 상흔에서 막 벗어나던 시기라 영화는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유일한 오락거리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인 것 같긴 하다.) 1960년대 들어서면 한 해 1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될 정도로 영화산업은 활황을 띠게 되니 이 산업을 정부 차원에서 '관리'할 필요성도 대두됐던 것 같다. (미국의 아카데미상 같은 걸 만들고 싶은 욕심도 있었을 게다.) 상을 만든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다만 상을 주는 주체가 바뀌면서 목적도 바뀌는 게 문제다.
제1회 우수 국산 영화상 작품상 <로맨스 빠빠>
1960년에 열린 제1회 우수 국산 영화상은 <로맨스 빠빠>(작품상, 감독상 신상옥, 남우주연상 김승호)와 <어느 여대생의 고백>(여우주연상 최은희)에게 돌아갔다. 두 작품 모두 신상옥 감독의 작품으로 당시 신 감독은 지금의 어떤 감독과도 비교하기 힘든 군계일학이었다. 이후 1960년말 제2회 우수 국산영화상에서는 당시 9살의 안성기가 김기영 감독의 <십대의 반항>으로 소년 연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면서 우수 국산 영화상은 주관 기관을 공보부(현 문화관광부)로 옮겨 '대종상'으로 이름을 바꾼다. 대종은 '에밀레종'을 뜻하는 것으로 트로피도 에밀레종을 두 남녀가 떠받치는 형상으로 되어 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담았다는 에밀레종의 전설을 떠올려 보면 이 상이 지금까지 문제가 되는 것은 어쩌면 이름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지도?) 1962년 제1회 대종상 시상식이 열렸고, 이때 수상작 역시 신상옥 감독 작품이었다. <연산군>이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신영균), 여우주연상(최은희) 등을 휩쓸었다.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 화면으로 만들어져 제1회 대종상 8개상을 휩쓴 <연산군>
1969년 상의 명칭이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으로 잠시 바뀐 적이 있지만 1971년 다시 대종상 명칭을 회복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997년에는 외환위기로 시상식이 1998년 4월로 연기된 적 있다.
군사정권이 서슬 퍼렇던 시절, 한국영화는 반공영화, 문예영화, 사극, 세 가지 뿐이었다. 리얼리즘 영화는 4.19 혁명과 5.16 쿠데타 사이에 개봉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 이후 사실상 자취를 감추었다. 대종상은 반공 메시지를 훌륭하게 포장한 영화들에 상을 주며 격려(?)했다. 1966년 '우수 반공영화상', '반공영화 각본상' 등의 분야가 만들어졌는데 이 각본상은 중앙정보부장상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한 마디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상을 준 것이다. 이 상들은 1985년까지 20년 동안 계속됐다.
영화사들은 반공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당시는 외화가 한국영화보다 더 흥행하던 시기였는데 대종상을 수상해야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분업화되어 있지 않던 당시의 영화사들은 제작, 배급, 수입을 한 회사에서 도맡았다.) 한 마디로 대종상은 국가가 반공 이데올로기를 영화산업에 전달하는 통로 역할을 했다. 지금 대종상의 일방통행식 운영의 모태는 군사정권 시절부터 오랫동안 뿌리내린 방식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나치를 지지한 독일인을 분석하며 이렇게 썼다. "개인은 독재자의 권위에 복종함으로써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 한다." 대종상의 역할이 딱 그랬다. 영화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반공영화가 국민들에게 어떻게 주입되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고, 기계적으로 그 일을 했다. 군사정권이 무너지며 영화인들은 눈을 떴고, 1990년대 들어 새로운 영화들이 우후죽순 나타나게 된다. 그때부터 대종상과의 마찰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아무도 본 적 없는 전설의 대종상 3관왕 <애니깽>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세상이 변했는데 대종상은 과거의 행태를 반복했다. 1992년 사단법인 형태로 민간 이양했지만 껍데기만 바뀌었을 뿐, 한동안 운영주체가 누구인지도 공개하지 않았다. 1996년 <애니깽> 사태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는 대종상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애니깽>은 개봉조차 하지 않아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데도 작품상을 비롯해 주요상을 받아갔다. 심지어 나중에 안기부가 제작을 지원한 영화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대중의 공분을 샀다. 당시 작품상 후보 중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꽃잎> 같은 작품이 있었지만 홀대당했다. 또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후보에조차 오르지 못했다.
이후 이름을 '대종상 영화제'(도대체 왜 '영화상'이 아닌 '영화제'인지는 아직도 이해 불가능하다)로 바꾸고 변신을 꾀하는 듯싶었지만, 대종상은 여전히 대종상이었고, 지금도 대종상이다. 2009년 <하늘과 바다> 사태(아무도 본 적 없는 영화가 4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에 이어 2015년엔 주연상 후보 전원 불참이라는 대참사에 이르기까지 대종상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영화가 한 발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마다 대종상은 항상 발목을 잡았다. 군사정권의 망령이 깃든 대종상은 상명하달식으로 자신들의 메시지를 주입하려고만 한다. 이번 시상식에서도 "대종상에 참가하지 않는 후보에겐 상을 주지 않겠다"는 일방통행식 운영방침 통보 역시 그런 유산이다.
제52회 대종상 10관왕 <국제시장>
2012년 <광해>에 15개 부문의 상을 몰아주고, 올해는 <국제시장>에 10개 부문의 상을 준 것 역시 지금까지 보여온 대종상의 획일적인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상을 안배하지 않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라 납득하기 힘든 결과가 나왔다는 게 문제다. (<광해>와 <국제시장>의 배급사는 모두 CJ다.) 2012년엔 <피에타>를 홀대해 김기덕 감독이 시상식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올해엔 <사도>와 <베테랑>을 빈 손으로 돌려보냈다. 그나마 시상식에 참석한 이준익 감독의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대종상은 56년의 역사를 가졌다. 그러나 역사가 있다고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권위는 내가 갖겠다고 선언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것이다. 대종상은 오랫동안 군사정부가 위에서 하명하듯 내려온 상이었고, 민간에 이양된 지금도 그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대종상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예전 글에서 나는 운영방식의 투명성, 심사위원 공개 등을 문제 제기했지만, 이젠 손가락만 아프다. '병든 우상'이 된 대종상이라는 억지 신화는 그냥 없애는 게 낫겠다. 내년부터는 더 이상 대종상 시상식이 열리지 않았으면 한다.
<로맨스 빠빠>부터 <국제시장>까지 52회 56년. 저 닮은꼴 영화 두 편의 엇비슷한 스틸 사진을 보라. 그래, 이만하면 됐다. 이제 종 칠 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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