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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16번째 영화 <자유의 언덕>은 시간에 관한 영화입니다. <옥의희 영화> 등 이전의 홍상수 영화들에서도 곧잘 뒤틀린 시간이 등장한 적 있지만 <자유의 언덕>은 아예 본격적으로 시간을 테마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권(서영화)을 찾아 서울에 온 모리(카세 료)가 북촌에서 겪는 사건들을 뒤죽박죽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 모리가 쓴 편지를 권이 읽는 순서에 따른 것입니다. 마침 권은 편지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은 이 편지들의 순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몸이 좋지 않은 권은 편지 한 장을 떨어뜨립니다. 즉, 권과 관객은 모리가 쓴 편지 한 장의 내용은 끝까지 알 수 없습니다. 퍼즐의 한 조각은 기어이 맞출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이 영화에는 엔딩이 없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엔딩처럼 보이는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만 둘다 시간순서상 엔딩으로는 부적합합니다. 먼저 편지를 다 읽은 권이 모리의 민박집에 찾아와 모리를 만나고 두 사람은 일본으로 돌아가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결말은 그 다음 장면에서 모리가 자고 있다가 깨어나는 장면으로 이어지면서 사실 모리의 꿈이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장면에서 민박집 주인 구옥(윤여정)은 일본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로 "깨끗하고 예의 바르다"고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 장면에서 모리와 논쟁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장면은 그 논쟁 장면 앞에 붙어야 맞는 것이겠죠. 또 잠에서 깨어난 모리와 영선(문소리)은 아직 사귀기 전입니다. 즉, 이 두 장면은 시간 순서상으로는 거의 앞부분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짜맞추다보면 결국 사라진 편지지 한 장은 맨 마지막장이 아닐까 합니다. 시간순서상으로 가장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권이 편지를 읽는 액자구성 방식으로 전개되는 <자유의 언덕>은 시종일관 흥미롭고 지적인 유희로 가득차 있습니다. 러닝타임도 고작 67분으로 짧아서 간결하기까지 합니다. 영화는 모리가 쓴 편지를 토대로 하기 때문에 모리의 이야기는 모리의 주장임을 감안해 이야기를 되짚어봐야 합니다. 모리는 이미 영선과 있었던 일을 편지에 썼고 이는 사라진 편지의 마지막장이 결코 해피엔딩일 리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지 않는 관객도 있을 것입니다. 모리가 권에게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말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에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았다는 식의 유추도 가능합니다.
결국 해석은 관객마다 달라질텐데 재미있는 점은 영화의 결말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이유가 편지지 한 장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옥희의 영화>에서 그날 산에 올라간 일에 대해 주체에 따라 관점별로 해석이 달랐던 것처럼 <자유의 언덕>에선 그것이 주체가 아니라 시간 순서와 사라진 편지지 한 장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사라진 그 편지지 한 장 덕분에 영화는 다양하게 해석될 자유를 얻었습니다. 홍상수의 이야기 구조에 대한 실험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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