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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스텔라>는 사랑과 우주에 관한 에픽입니다. 앞으로 2회에 걸쳐서 영화가 그리고 있는 사랑과 우주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1) 사랑에 관한 긴 필름


<인터스텔라>에는 크게 두 가지 세계가 있습니다. 쿠퍼(매튜 매커너히)의 가족이 살고 있는 세계와 그외 모든 인류가 살고 있는 세계입니다. 비밀연구기지인 NASA의 세계는 쿠퍼의 세계와 통합니다. 영화 속 인물 누구도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인류가 지속해야 한다"는 대의는 갈등이 생길 여지를 줄여줍니다. 유일하게 적대적인 만 박사(맷 데이먼)의 경우 (다른 영화에서와 달리) 되레 큰 임팩트가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기이한 것은 멸망을 앞둔 인류가 대단히 평온하다는 것입니다. 통제된 미디어도 보이지 않고 마을을 접수한 군대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죽음을 기다리는 순교자들처럼 운명을 체감한 듯 사이렌 소리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대기근이 왔지만 학교도 마을도 적당히 규모를 줄여서 굴러갑니다. 약탈자들은 보이지 않고 니힐리스트들은 지하로 숨었는지 화면 속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들 하루하루를 걱정하며 근근히 살아가다가 어느날 조금이라도 날이 개면 아이들을 데리고 야구를 하러 밖으로 나옵니다. 이토록 평화롭고 순응적인 인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영화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인류가 지속해야 한다"는 명제에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류가 멸종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화엔 나오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적대적이었던 만 박사의 경우에도 인류가 우주에 식민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가정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목적이 분명한 서사는 영화의 플롯을 평면적으로 만듭니다. 다른 생각할 여지를 없애버리는 것이죠. 인류의 씨를 우주 어디엔가 뿌려서 문명을 계속해야만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 같다고 할까요?


그 대신 영화는 갈등을 플랜A와 B 사이에서 만듭니다. 인류를 지속시키되 현생 인류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과거 묵시록적 관점에서 보면 플랜A는 엑소더스이고, 플랜B는 순교입니다. 브랜드 박사(마이클 케인)는 B를 택했지만 쿠퍼(매튜 매커너히)와 머피(제시카 차스테인)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시공간을 넘어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플랜A와 B를 갈등의 중심에 놓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인류를 결속시키는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론 지나치게 숭고함을 강조한 나머지 감정과잉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인류애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내기 위한 과정이라는 점에서 납득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영화 속 배경을 보면 문명이 붕괴된 지 대략 10~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쿠퍼가 젊은 시절엔 우주로 가는 공공연한 시도들이 많았지만 어느 순간 오존층이 파괴되고 자외선에 노출된 농작물이 괴사하고 황사바람이 불면서 인류는 식량난에 봉착했습니다. 과학자나 인문학자보다 농부가 더 필요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쿠퍼의 아들과 딸은 그 이후에 태어났기에 문명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마치 요즘 세대들이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기에 과거 스마트폰 없던 시절을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혹은 6500만년 전 백악기에 공룡이 멸종했기에 과거 공룡이 살던 시절의 지구를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머피(맥켄지 포이)는 인간이 우주로 갔었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세대입니다. 심지어 "달 착륙은 냉전시대가 꾸민 조작이었다"는 음모론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교과서마저 수정되어 있습니다.


다들 바뀐 체제에 순응하며 생존을 위해 살아갈 때 NASA의 파일럿이자 엔지니어였던 쿠퍼는 머피에게 꿈을 심어줍니다. 이 꿈은 훗날 인류가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머피는 책장에서 떨어진 책 속에서 모르스 부호를 떠올리고 열린 창문에서 본 유령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어할 정도로 호기심과 실행력이 풍부한 아이입니다. 머피가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것은 쿠퍼의 가정교육 철학 덕분이었겠죠. 아무도 시도하지 않을 때 홀로 연구한 머피는 마침내 우주의 비밀을 풀어냅니다.



쿠퍼는 우주로 떠납니다. 사랑하는 머피를 남겨두고 떠납니다. 쿠퍼가 결심한 이유는 먼 우주에서 누군가 자신을 선택해 불렀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NASA의 브랜드 박사는 토성 근처에 생긴 웜홀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누군가 인간을 구원해주고 있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머피의 책장에 빛과 먼지를 통해 이진법으로 NASA의 위치를 알려준 것도 그 미지의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소명을 받고 모험을 떠나는 남자의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습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로 대표되는 그리스 영웅신화의 서사가 원형입니다. 누군가의 소명을 받고 모험을 떠난 자는 자신은 영웅이 될 그릇이 아니라며 끊임없이 회의하지만 결국 모험의 끝에 이르러서는 강력한 적을 무찌르며 스스로 영웅이 되어갑니다. <스타워즈>부터 <반지의 제왕>까지 많은 영웅서사가 이 원형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험을 떠난 영웅이 미션을 채 완료하기도 전에 자신이 떠나온 것을 후회하며 돌아오고 싶어하는 서사는 흔하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은 길었지만 후회를 동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쿠퍼는 후회합니다. 5차원 공간에서 머피를 바라보며 왜 자신을 붙잡지 않았느냐고 외칩니다. 그가 후회하는 것은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나버렸다는 자괴감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버린 시간들에 후회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그 후회 속엔 머피에 대한 지독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철학자 강신주는 [감정수업]에서 후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후회에는 모든 불운을 자기 탓으로 돌리는 정신적 태도, 다시 말해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는 의식을 전제한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는 것은 거대한 착각이자 오만"이라며 "결국 후회는 강한 자의식을 가진 사람에게 자주 찾아오는 감정"이라고 일갈했습니다. 쿠퍼는 자신이 소명을 받고 자유로운 선택을 했다고 믿어왔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고 결국 소명의 주체는 다른 미지의 존재가 아닌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누군가 불러서 갔는데 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후회가 밀려올 수 밖에요. 이만큼 강력한 자의식을 보여주는 서사가 또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거대한 후회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면입니다.


영화는 쿠퍼와 머피의 부녀간 사랑을 인류애로 승화시킵니다. 쿠퍼는 군사용 로봇 타스에게 아멜라(앤 해서웨이)가 에드문드와 가까운 사이였는지 묻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 관객은 쿠퍼가 아멜라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 이후 영화는 쿠퍼와 아멜라의 사이에 애정이 싹트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쿠퍼와 머피의 관계에 집중하느라 아멜라는 멀리 떨어뜨려 놓습니다. 왜냐하면 영화가 주장하는 거룩한 인류애는 필시 갈등을 동반할 삼각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집중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끝없이 광활한 우주에서 외로움에 지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머피와 쿠퍼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아멜라와 (이미 죽은) 에드문드 역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되지 않은 자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합니다. 브랜드 박사가 노환으로 죽고, 만 박사가 욕심 부리다가 죽습니다. 그들은 우주 속에서 누군가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에 죽어도 후회가 없습니다. 후회가 있는 자들은 끝까지 살아남아서 사랑의 힘으로 인류를 위기에서 구합니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감독과 작가가 믿고 있는 사랑의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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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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