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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공원을 도시로부터의 탈출구로 여기지만, 하이라인은 결코 뉴욕에서 벗어나지 않는데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자동차 경적음을 들을 수 있고 지나가는 차와 택시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이 실처럼 짜여 뉴욕을 이룬다. 그리고 혼자만이 아니다. 다른 뉴요커들과 함께 하이라인을 걷고 있다.” - 책 [하이라인 스토리] 중



발밑으로 도심을 내려다보며 걷는 기분은 얼마나 짜릿할까? 그것도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라면? 고가도로 아래로 자동차와 사람들이 지나가고 고층빌딩엔 긴장감이 흐르는데 필자가 서 있는 이곳은 한가로운 공원이다. 열차 선로 위 벤치엔 뉴요커들이 누워서 책을 읽고 있고, 그 옆엔 정성스레 심은 꽃과 나무가 녹색을 내뿜는다.


센트럴 파크가 도심 한복판을 막아놓고 강제로 산소를 공급해주는 심장이라면 하이라인 파크는 도심을 따라 흐르는 혈관이다. 마천루를 바라보며 한숨 돌리는 휴식공간으로서의 기능은 비슷하지만 이곳은 삭막한 아스팔트 거리, 수많은 자동차와 행인, 숨막히는 고층빌딩 등 도시의 모든 것들을 내팽개치지 않고 끌어안는다. 지상 9m 높이에 길이 2.3km에 이르는 고가공원을 따라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도시의 역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마주하게 된다.





서울역 고가의 롤모델, 하이라인 파크


하이라인 파크는 2009년 개장하자마자 뉴요커들이 사랑하는 뉴욕의 새로운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했다. 빈티지한 첼시 건물의 마천루와 공원 아래로 달리는 자동차를 바라보면 낭만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힌다. 작년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많이 포스팅된 뉴욕 명소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최근엔 영화 속에서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헨리 제임스의 소설을 2012년 영화화한 <메이지가 알고 있었던 일>에서 바람난 부모에 맞서 당당하게 독립을 선언하는 6세 소녀(오나타 에이프릴)가 새 아빠(알렉산더 스카스가드)를 만나는 장소도 바로 하이라인 파크의 전망대다.


맨해튼 서쪽에서 첼시와 미트패킹 지역을 관통하고 있는 하이라인 파크는 고가 철로를 변형해 만든 공원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서울역 고가도로를 철거하는 대신 공원으로 조성하는데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겠다고 해서 주목받고 있다. 박 시장은 최근 하이라인 파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서울역 고가 공원 조성을 통해 서울역, 한양도성, 숭례문, 남산공원, 남대문시장, 서소문역사공원 등을 한데 묶는 관광구역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공모를 통해 설계안을 확정하고 2016년 완공할 예정이라고 한다.





30년간 쓰레기 더미가 랜드마크로 변신하기까지


하이라인 파크의 탄생 스토리는 드라마틱하다. 이 지역은 150여년 전부터 화물 철로가 놓여 있던 곳이다. 1847년 뉴욕시는 화물운송을 위해 철로를 개설했다. 그러나 자동차, 사람에 이어 열차까지 길을 나눠쓰다 보니 사고가 빈번해져 ‘죽음의 거리’로 불렸다. 사고를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뉴욕시는 1934년 고가선로를 짓는다. 화물열차가 짐을 싣고 내리기 편하도록 철로를 도로 위가 아닌 건물 안쪽을 직접 관통하도록 설계했다. 하지만 이 투자는 뒤늦은 것이었다. 오래지 않아 미국은 열차 시대를 접고 아스팔트 시대로 접어들었다. 1950년대 들어 아스팔트가 확장되면서 트럭이 보급됐고 화물의 철도 운송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결국 1960년대 일부 구간이 철거되더니 1980년을 끝으로 운행이 전면 중단됐다. 이후 고가선로는 야생식물이 멋대로 자라고 쓰레기가 버려진 도심 흉물로 방치됐다.


1999년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시장은 고가도로를 철거하기 위한 주민 공청회를 연다. 철로 주변 땅을 소유한 지주들은 흉물을 없애면 주변 땅값이 오르겠다고 생각해 1980년대부터 고가를 철거해달라는 로비를 해왔던 터다. 그러나 공청회에 참석한 마을 주민 조슈아 데이비드와 로버트 해먼드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하이라인은 쓸모없다고 버려야 할 낡은 유산이 아니었다. 용도를 바꿔 재활용하면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세상에 하나뿐인 고가도로였다. 이들의 주장에 영화배우 에드워드 노턴, 기업가 마사 스튜어트 등 유명인사들도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하이라인을 지켜내기로 결심하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그해 비영리 시민단체 ‘하이라인의 친구들’을 결성한다. 하이라인 파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공원이 개장하기까지는 만 10년이 걸렸다. 이 기간 동안 개발 방안에 대해 경제적, 생태학적 연구가 이루어졌고 설계와 디자인을 거쳐 마침내 2009년 6월 9일 일부 구간이 대중에게 개방됐다. 설계 과정에서 한국인 건축가 황나현이 디자인을 총괄했다는 점도 기억할 만하다. 두 젊은이들은 일방적으로 철거론자들을 몰아내면서 공원을 기획하지 않았다. 이들은 공원화에 따른 경제적 가치를 증명해 뉴욕시장을 설득했고, 개발권 이양제도를 보완해 부동산 지주들과 보존론자 양측 모두에게서 지지를 얻어냈다. 하이라인의 성공은 전세계 도시재개발 기획의 전환점이 됐다.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올리는 게 전부가 아니라 수십년간의 역사를 최대한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다.



올해 9월 하이라인 파크는 3단계 구간이 개통되면서 15년 만에 전체 모습을 드러냈다. 뉴욕시가 소유하고 ‘하이라인의 친구들’이 운영하는 하이라인 파크 조성에 소요된 예산은 1억 5천만 달러로 그중 뉴욕시가 5천만 달러를 지원했고 나머지는 '하이라인의 친구들'이 모금을 통해 마련했다. 그러나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 하이라인 파크의 성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2011년 8월 5일자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마이클 블룸버그 당시 뉴욕시장은 “하이라인 파크가 20억달러(2조750억원)의 경제 효과를 창출했다”고 말했다.


연간 500만명이 하이라인 파크를 방문하고 있고, 그 덕분에 인근에 호텔, 레스토랑, 부티크들이 새로 들어섰다. 8000개의 건설 관련 일자리를 비롯해 총 1만2000개의 새 일자리가 생겼고, 인근 아파트는 가격이 두배나 올랐다. 뉴욕시는 앞으로 20년 동안 하이라인 파크 인근에서 약 2700억원의 세금을 더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하이라인 파크에서 바라본 허드슨 야드 조감도


하이라인 파크의 끝자락에 조성될 허드슨 야드는 애초 열차 차량기지가 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뉴욕에서 가장 많은 공사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다. 고층건물 조감도가 곳곳에 펼쳐져 있는데 몇몇 건물은 엠파이어 스테이트보다 높다. 몇 년 뒤 허드슨 야드가 완공되면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은 지금과 전혀 다른 형태로 바뀔 것이다.


이처럼 하이라인 파크는 뉴욕이라는 도시 전체를 재정의하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스페인 빌바오라는 도시를 건축 명소로 완전히 탈바꿈시킨 것처럼 맨해튼 서부는 하이라인 파크로 인해 전혀 다른 지역이 되어가고 있다. 그전까지 뉴욕은 현대 자본주의 랜드마크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재활용으로 탄생한 새로운 랜드마크는 그런 새침한 이미지를 많이 희석시켜줬다.





3시간 코스 하늘의 올레길


하이라인 파크는 고가로 길게 늘어서 있는 만큼 중간에 합류할 수 있도록 구간별로 9개의 입구가 있다. 육교를 오르듯 올라가 걷기 시작하면 된다. 미트패킹 지역의 Gansevoort Street에서 시작해 14번가, 16번가, 23번가 등 주요 도로에 입구가 있고 34번가까지 이어진다. 전 구간을 걷기 위해서는 3시간 정도를 예상하면 된다.


고가공원이라고 해서 단순히 철로 옆에 벤치를 놓고 나무를 심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이라인 파크가 경관을 꾸민 원칙은 폐쇄된 철로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생태계를 조성한 것이다. 잔디, 관목, 다년생 식물과 나무들이 색의 조화를 이루며 심어져 있고, 곳곳에 얇게 흐르는 물의 공원, 형형색색 꽃길 등 구간마다 색다른 테마가 있어 걷는 재미가 쏠쏠하다. 의자 하나, 나무 한 그루 모두 디자인 감각이 살아 있어 얼마나 공을 들여 조성했는지 걸을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하이라인 파크는 고층건물을 우회하지 않는다. 애초에 철로가 건물 안쪽으로 화물을 직접 운반할 수 있도록 설계된 덕분에 건물 내부를 그대로 통과한다. 그 구간에는 배를 채울 수 있는 각종 음료와 과자, 그리고 기념품을 파는 간이상점이 있다.


잘 생긴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블루바틀 커피를 사들고 잠시 철로 위 나무 벤치에 누워보자. 오늘따라 하늘이 더 평온해보인다. 그런데 가만, 하늘이 움직인다. 알고 보니 벤치가 철길을 따라 슬슬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마치 기차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신기한 체험에 한동안 일어나기 싫어질 것이다.



1구역과 2구역이 미트패킹과 첼시의 빈티지한 건물 사이를 통과하는 구간이라면 3구역은 허드슨강을 향해 걸으며 노을을 바라보는 로맨틱한 구간이다. 한 방향으로 목적지가 정해진 이 독특한 공원을 계속 걷다보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꼭 잡거나 혹은 옆에 없다면 당장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질 것이다.


하이라인 파크는 뉴요커와 함께 하는 공간인 만큼 곳곳에서 여러 프로그램이 운영중이다. 아침엔 요가, 태극권 강습이 펼쳐지고, 점심땐 콘서트도 열린다. 운 좋으면 유명 아티스트의 공연을 무료로 볼 수 있다. 또 수시로 미술전이 열리고, 아이들을 위한 공작교실, 기차 체험 공간도 있으니 미리 알아보고 가면 좋다.


그냥 걷기만 하는 게 밋밋하다면 하이라인의 역사와 디자인, 뒷이야기를 가이드에게 들으며 함께 걸을 수 있는 워킹투어 프로그램도 있다. 1시간 가량의 투어는 5월 6일부터 9월 23일까지 여름 시즌 매주 화요일에 무료로 진행한다. 만약 회사나 단체에서 그룹투어를 기획하고 있다면 유료 투어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도 있다. 3주 전에 신청하면 공원 측에서 가이드를 배정해 준다. 가이드 유료투어는 75분 가량 진행된다.





공장지대에서 핫플레이스가 된 미트패킹


하이라인 파크에서 내려왔다면 이번엔 미트패킹 지역을 둘러볼 차례다. 버려진 철길이 공원이 된 것처럼 이곳 역시 원래는 삭막한 공장지대였던 곳이 지금은 뉴욕의 셀레브리티들이 즐겨찾는 가장 핫한 명소로 탈바꿈했다.


미트패킹은 '정육포장'이라는 뜻으로 이곳은 한때 250여 개의 도살장 및 육가공 공장이 모여 있던 지역이다. 서울로 치면 마장동 쯤 될까. 공장이 문을 닫거나 옮겨가면서 방치된 이 지역에 소호의 치솟는 임대료를 피해 이주해온 아티스트들이 먼저 아지트를 만들었고 이후 각종 클럽과 크리스찬 루부탱, 알렉산더 매퀸, 스텔라 메카트니 같은 디자이너 부티크들이 들어섰다. 미트패킹 지역은 역사보존지구여서 공장 외관을 허물 수 없었고 그래서 겉은 허름해 보이지만 내부를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건물들이 많다.


먼저 첼시 마켓으로 가보자. 외관은 그저 통통한 붉은 벽돌 건물이다. 내부로 들어가면 더 가관인데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벽돌과 파이프 배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숍 내부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날 수 있다. 잡화점, 베이커리, 주방용품점, 서점, 수산시장, 레스토랑 등이 각자의 개성에 맞게 인테리어를 꾸몄다.


이곳은 100년 전 오레오 쿠키를 만들던 The National Biscuit Company 공장이 있던 곳이다.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이 건물에 1997년 유명 식품업체와 레스토랑이 입주하면서 현재는 트렌디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는 복합 음식공간으로 변신했다. 특히 '팻위치 베이커리'의 브라우니가 유명해 아예 선물용 매대가 따로 차려져 있고, '랍스터 플레이스'에선 랍스터를 1인당 4만원대에 먹을 수 있어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다.



브런치를 즐기고 싶다면 <섹스 앤 더 시티> 덕분에 대표적 브런치 명소가 된 '사라베스'나 뉴요커들에게 최근 각광받는 '스탠더드 그릴'에 들러 에그 베네딕트, 오믈렛, 크리미 폴렌타 등을 먹으며 친구들과 맘껏 수다를 떨어도 좋겠다.


특히 스탠더드 그릴은 하이라인 파크와 연결된 스탠더드 호텔 아래층에 위치하는데 전 층이 통창으로 된 스탠더드 호텔은 사생활을 엿볼 수 있어 인간의 관음증과 노출증을 자극해 기이한 명소가 되기도 했다. 호텔 맨꼭대기층에는 천정부터 바닥, 심지어 화장실까지 통유리로 된 클럽 '붐붐룸'이 있는데 마돈나, 린지 로한, 니키 힐튼 등 할리우드 트렌드세터들이 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섹스 앤 더 시티>의 인기 레스토랑 '부다칸'이 근처에 있고, 골드만삭스 등 금융맨들이 자주 가는 스테이크하우스 STK, 미슐렝 3스타를 받은 스타 셰프 장 조지의 퓨전 타이 레스토랑 '스파이스 마켓', 할리우드 스타들이 자주 가는 프렌치 레스토랑 '파스티스', 미국 푸드채널 Food Network의 요리 대결 프로그램 <아이언 셰프>에서 요리 고수로 등장하는 마사하루 모리모토의 고급 퓨전 일식 레스토랑 '모리모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탈리아 셰프 마리오 바탈리의 고급 레스토랑 '델 포스토' 등이 미트패킹에 위치한다.





가는 법


미트패킹 지역은 Gansevoort Street부터 West 34th Street에 걸쳐 있다. 지하철 A,C,E,1,2,3 라인의 14번가역에서 내리면 된다. 하이라인 파크의 개장 시간은 오전 7시. 폐장 시간은 계절별로 다른데 12월부터 3월까지는 오후 7시, 6월부터 9월까지는 오후 11시, 그외 기간은 오후 10시까지 운영한다. 미트패킹의 레스토랑은 인기가 많아서 사전 예약은 필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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