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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006년에 쓴 글을 보완해서 다시 작성한 것입니다.






2000년 7월 7일 문화관광부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고시하면서 "현지 발음에 맞게"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덩샤오핑이니 청룽이니 류더화니 하는 중국어 이름이 등장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장국영을 장국영이라 부르지 못하고(장궈룽), 양조위를 양조위로 부르지 못하는(량차오웨이) 언어의 이중생활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죠.


그런데 이 시기는 공교롭게도 유럽 축구가 한국에서 슬슬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시점과도 겹칩니다. 그때까지 유럽축구는 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멈춰 있었고 일부 마니아들만이 위성 안테나를 통해 세리에A나 프리미어리그를 시청하는 정도였죠. 그때 축구를 좋아하던 저는 당시에 신문 한귀퉁이에 유럽 챔피언스리그 소식이 나오면 마냥 좋아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어쨌든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에서도 축구 관련 소식이 계속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유럽과 남미의 축구 스타 이름이 신문과 방송에서 불리워졌는데요. 문제는 2000년에 표기법이 바뀌면서 스타들의 이름도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반 니스텔루이는 판 니스텔로이가 됐고, 호날딩요는 호나우지뉴가 됐습니다. 또 재미있게도 호나우두는 그냥 호나우두인데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는 호날두가 됐어요. 둘다 스펠링 똑같은 포르투갈어인데 브라질과 포르투갈에서 발음이 달라서 그렇다나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합니다. 왜 한글이 현지 발음 그대로를 존중해 주면서 외국어를 표기해야 하나요? 동방예의지국이라서 그런가요? 현지 발음이라는 게 지역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른데 그것도 다 존중해줘야 하나요? 호나우두와 호날두의 구분은 저에겐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식이라면 사람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한글표기법을 지정해줘야 할 지도 모릅니다.


영어를 포함해 전세계 어떤 언어도 그 발음을 우리말로 100% 정확히 대응시키기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한글로 표기할 때도 100% 현지 발음에 가깝게 표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외국어표기법은 불가능에 도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현지 발음에 맞게"라는 원칙이 얼마나 웃기는지 지금부터 런던의 영어와 축구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프리미어리그엔 Tottenham이란 팀이 있습니다. 북런던을 연고지로 하는 팀이고 Arsenal과 가까워서 라이벌 구도가 형성돼 있습니다. 표기법이 고시되기 전에는 '토튼햄'이라고 불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이렇게 부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 '토트넘'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정 이유는 현지에서 이렇게 발음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지 발음이라는게 대체 어떤 건지 살펴볼까요?


런던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영어가 있습니다. 퀸즈 잉글리시(Queen's English)와 코크니(Cockney) 방언입니다. 퀸즈 잉글리시는 교육 수준 높은 중상류층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미국인들이 지적으로 보인다며 좋아하는 발음이 바로 이거죠. 그에 반해 코크니는 17세기 런던 이스트엔드 노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해 중산층 이하 서민들로 퍼진 말입니다. 현재 런던 인구 대비 약 60% 정도가 사용중이라고 합니다. 제이미 올리버, 데이비드 베컴 등의 발음이 바로 코크니 사투리입니다.


'토트넘'이란 표기는 런던 코크니 사투리의 발음을 그대로 한글로 옮겨 표기한 것입니다. 코크니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단어 처음에 오는 H 발음을 탈락시킨다

Harry -> Arry, Hartford -> artford


2) 엉뚱한 곳에 H 발음을 집어넣는다

대표적인 예가 ham and egg => am an hegg


3) /ei/ 발음을 /ai/로 발음한다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마이 페어 레이디>로 영화화 됨)에서 둘리틀(영화 속 오드리 헵번)이 코크니 출신의 여자로 등장하는데 Spain을 /spain/, Rain을 /rain/으로 발음한다.


4) /ai/ 발음을 /oi/로 발음한다

일인칭 주격 대명사 'I'를 /oi/로 발음한다.


5) /θ/를 /f/로 발음한다

thin -> fin, three -> free


6) 단어 끝에 오는 L 발음을 W 발음으로 대체한다

Millwall -> Miw-waw



Tottenham의 연고지가 런던이라는 이유로 현지 발음에 가까운 '토트넘'을 한글 표기로 채택했지만 사실 코크니 사투리는 영국 내 다른 지방 사람들도 알아듣기 힘든 경우가 많을 정도로 독특하게 변질된 사투리입니다. 비영어권 국가에서 온 사람들은 더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한편, Arsenal의 코크니 발음은 /아ㄹ서ㄴㄹ/에 가깝습니다. 영국에서는 대체로 r 발음을 생략하는 편이기 때문에 영국 현지 발음으로는 /아서ㄴㄹ/ 정도가 되는데요. 이를 한글로 표기하자면 (실제 발음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만) '아서늘' '아서널' 정도로 표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현지 발음대로 하려고 했다면 '아스널'이 아닌 '아서널'로 했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지역 방언(런던 이스트엔드) 혹은 사회 방언(노동자 계급)으로 간주할 수 있는 코크니를 그대로 한글표기법으로 채택한 것은 사실 '경상남도'를 현지인인 일부 경상도 사람들이 '갱상남도'로 발음한다하여 이를 'Gaengsangnamdo'로 표기하는 것과 진배없는 삽질에 불과합니다.


영어에는 표준어가 없습니다. 영국식 영어를 표준이라고 하면 미국 사람들이 화내겠죠. 또 미국도 영국말을 빌려쓰는 마당에 표준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겁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쓰는 영어, 뉴욕에서 쓰는 영어, 호주에서 쓰는 영어, 스웨덴에서 쓰는 영어, 필리핀에서 쓰는 영어, 케냐에서 쓰는 영어 등 수많은 영어들이 사회와 관습에 따라 전부 다르지만 어떤 영어를 표준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한국에서 영어를 쓰면 그것은 (콩글리시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어쨌든) 한국식 영어가 됩니다. 그 안에서 로마자 표기법을 만들어 한국어 안으로 흡수했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현지 발음을 따르겠다고 규정해 놓으면 우리는 이 모든 영어들을 다 따져봐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발음하는지 일일이 따져보고 지명과 인명을 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습니다. 발음은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지에서 발음하는 방식이 바뀌면 우리는 또 표기법을 변경해야 하는 걸까요? 어쩌면 이는 또하나의 언어 사대주의가 아닐까요?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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