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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고 얇다. 장편소설이라고 적힌 표지가 무색할 만큼. 그러나 한 번 잡은 책을 놓을 수 없었고, 일부러 느리게 읽어야 했으며, 다 읽은 뒤엔 다시 읽고 싶어졌다. 짧지만 굵고 얇지만 강렬하며 넓은 여백은 묵직한 쉼표다. 게다가 재생지의 냄새마저도 좋은 책이다. 최근 김영하 소설들 중 월등하게, 가장 좋다. 개인적으로는 김영하 최고 작품이 아닐까 생각하는 그런 책.


주인공은 철학책을 읽는 칠십대 살인범 김병수다. 70대 노인이 등장하는 낯선 이야기가 술술 읽히는 것은 그가 70대인 것이 노인들의 생활을 주제로 하기 위함이 아니라 치매를 미스터리 이야기의 구성 방식으로 쓰기 위해 만든 설정이기 때문이다. 마치 영화 <메멘토>처럼 주인공은 자꾸만 잊어버리고 그래서 메모하고 녹음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잊어버리는 것은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바로 어제와 '미래 기억'이라는 것. 오히려 30년 전 과거는 더 생생하기만 하다. 작게는 식후 30분에 약을 먹어야 한달지, 크게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목표 같은 것을 미래 기억이라고 하는데 주인공에게는 그게 없다. 김영하는 특유의 유머를 담아 연쇄살인범의 치매를 묘사한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궃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P.35


주인공은 박정희 시절, 정권 탈취를 위해 사람 죽이는 게 예사였던 시절, 연쇄살인범이라는 개념도 없던 시절, 아버지를 죽인 것을 시작으로 30년간 수십 명을 살해해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25년 전부터 살인을 그만두고 평범하게 살아온 남자다. 그가 알츠하이머에 걸린다. 그에게는 김은희라는 의붓딸이 있다. 어느날 딸이 결혼할 남자를 데려오는데 그 남자의 인상이 낯익다. 족제비 같은 눈매에서 자기와 비슷한 부류임을 즉시 깨닫는다. 언젠가 부인을 죽일 남자. 지프 트럭에 시체를 싣고 다닐 것 같은 남자. 그래서 주인공은 결심한다. 딸을 위해 마지막으로 그 남자를 죽여버리기로. 25년 전 살인이 충동에 의한 것이었다면 이젠 누군가를 위해 감행하기로.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 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P.115


책은 기막힌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마지막 10페이지의 반전을 읽고 나면 조금 어리둥절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모두 망상이었다니 허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책 앞부분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작가가 숨겨놓은 장치들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선사시대 유골을 조사해보면 태반이 살해당한 것이라 한다. 두개골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뼈가 예리한 것으로 잘려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연사는 드물었다. 치매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P.39


예전 김영하 소설들에 비하면 확실히 문장이 짧고 묵직해졌다. 빈 여백들 사이에서 큰 울림을 준다. 동서양의 철학책을 읽고 문학을 공부하는 70대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는 살인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구축했으며 그로 인해 시종일관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가 쓰는 '진짜 죽이는' 시는 기존 프로 문학을 조롱하고, 공소시효가 지난 그의 25년 전 완전범죄들은 법질서를 조롱하며, 치매에 걸린 탓에 기억이 사라져버려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는 범죄자는 마침내 인간 윤리마저도 조롱한다.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파렴치함에 대한 비유로 읽히고, 더 넓게는 인간의 근원에 대한 질문으로도 보인다. 언젠가 독백 형식의 연극으로 만들어진다면 재미있을 소설이다.


그러므로 공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P.11, 148




살인자의 기억법
국내도서
저자 : 김영하(Young Ha Kim)
출판 : 문학동네 201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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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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