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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미국 크리틱스초이스에서 ‘기생충’과 함께 외국어영화상을 겨룬 영화. 조용하고 섬세하고 차분한 영화. 음악이 거의 등장하지 않다가 마지막 장면 비발디 사계 중 여름이 흘러나올 때 전율하게 되는 영화. 파스텔톤으로 촬영한 두 여배우의 절제된 미를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는 영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와는 다른 방식의 감성 로맨스.
영화의 배경은 18세기 중반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전 계급사회를 살아가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메랑)는 학생들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직접 모델이 되어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그녀는 한 학생이 참고하겠다며 그림 한 점을 꺼내놓은 것을 발견한다. 오래 전 자신이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라는 작품이다. 마리안느는 그림 속 여인을 회상한다.
마리안느가 그림 속 주인공 엘로이즈(아델 아에넬)를 처음 만난 것은 백작부인인 그녀의 어머니(발레리아 골리노)로부터 초상화 의뢰를 받고 저택을 찾아갔을 때였다. 수녀원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자유롭게 살던 엘로이즈는 저택에서 살던 언니가 자살한 이후 엄마의 부름을 받고 수녀원을 나와 외딴 저택으로 왔다. 그녀에겐 밀라노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정혼자가 있어 곧 저택을 떠날 예정인데 엄마는 딸을 기억하기 위해 초상화가를 부른 것이다.
백작부인은 마리안느에게 작업이 쉽지 않을 거라고 말해준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는 것을 거부해 몰래 관찰하면서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산책 친구로 소개되어 있다. 엘로이즈를 처음 만난 날 마리안느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느낀다. 엘로이즈는 수영할 수 있는지 자체를 모르면서 무작정 바다로 가고 싶어하는 여성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해 조금씩 초상화를 완성해간다. 필요할 땐 어린 하녀 소피(루아나 바야미)가 드레스를 입고 대역을 해준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만날수록 동질감을 느낀다. 그림을 완성하고 저택을 떠나기 전 마리안느는 백작부인에게 제안을 한다. 초상화를 엘로이즈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자신이 온 이유를 솔직히 밝히고 그림을 보여주지만 엘로이즈는 그림이 자신을 전혀 닮지 않았다고 혹평을 늘어놓는다. 자존심이 상한 마리안느는 그림을 새로 그리겠다고 선언한다. 엘로이즈가 포즈를 취하겠다고 말하면서 두 사람은 화가와 모델로 새롭게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을 시작한다. 서로 시선을 마주보면서 두 사람의 감정은 더욱 친밀해진다.
일방적 시선에서 동등한 시선으로
엘로이즈가 본격적으로 모델이 된 순간 두 사람의 시선 관계는 바뀐다. 그전까지 마리안느는 일방적으로 엘로이즈를 훔쳐봤다. 하지만 이제 훔쳐보기의 대상이었던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와 동등한 시선을 주고받는다. 엘로이즈는 마리안느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나를 보고 있을 때 나도 당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요. 당신의 습관을 나도 알아요. 당신은 할 말 없으면 손으로 이마를 만지고 당황하면 입술을 깨물죠.”
시선은 곧 권력이다. 지켜보는 자가 지배자의 위치에 있다. 파놉티콘(원형감옥), CCTV 등 감시망은 권력자가 더 편리하게 지배하기 위해 만든 장치들이다. 옛 서양 미술에 벌거벗은 여인을 그린 그림이 많은 이유도 남성이 다수인 귀족들의 쾌락과 무관하지 않다. 권력자들은 높이 솟은 빌딩을 선호하는데 이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도 시선 관계는 권력 관계와 동일했다. 기존 멜로드라마 시대극에서 시선을 가진 쪽은 주로 귀족 남자였고 시선의 대상은 가난한 여자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시선이 곧 권력이라는 보편적 명제를 역이용한다. 훔쳐보기의 대상인 엘로이즈가 더 높은 신분인 귀족이고 훔쳐보는 마리안느는 신분이 낮은 화가다. 사회적 약자에게 시선 권력을 줌으로써 영화는 두 사람을 처음부터 평등한 위치에 놓고 영화를 시작한다. 그래서 두 사람 사이 계급 차이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전반부엔 이 차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리안느가 훔쳐보며 처음 그린 그림은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지만 후반부에 서로 동등한 시선 교환 끝에 완성한 그림은 모두에게 칭송받으며 생명력을 얻는다. 예술은 동등한 감정의 산물이어서 두 사람의 사랑은 경직돼 있던 엘로이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게 만들고 이는 예술로 승화된다.
오르페우스 신화의 재해석
영화에서 중요한 모티프는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 이야기다. 신화 속에서 죽음의 신 하데스가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케를 살릴 수 있는 기회를 주면서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고 말했지만 오르페우스는 결국 돌아봤고 에우리디케는 지옥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엘로이즈는 세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저녁 책에서 이 부분을 읽는다. 소피는 “오르페우스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며 격분하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아내 대신 시인으로써의 삶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엘로이즈는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아내가 불러서 돌아봤을지도 몰라.”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오르페우스를 바라본 관점은 영화 속 두 사람의 관계에 고스란히 대입 가능하다. 마리안느는 사랑은 의지라고 말한 것이고 엘로이즈는 사랑은 배려라고 말한 것이다. 마리안느는 결혼을 앞둔 엘로이즈가 자신의 의지로 밀라노의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 수 있지 않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고 엘로이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이해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알면서도 사랑을 시작한 두 사람은 이렇게 오르페우스에 대한 해석에 자신의 감정을 대입시킨다.
동성애는 지금도 사회적 시선이 온전히 곱지 않은데 18세기 중반이라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스스로 사라졌다고 말함으로써 자신도 스스로 사라지는 쪽을 택하고, 홀로 남은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처럼 외로운 사랑을 예술로 승화시키면서 에우리디케의 선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마지막 장면 콘서트홀에서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이 흘러나오고 마리안느가 멀리 떨어진 엘로이스를 바라보고 엘로이스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오르페우스를 떠올리는 에우리디케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포기하고 불행을 택한 것이 자신의 선택이기에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의 미련과 회한이 가득 담긴 눈물이다.
영화는 이처럼 오르페우스 신화를 두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했다. 기존 오르페우스 신화 속에서 여성 에우리디케는 스토커에게 죽음을 맞이하고 지옥에서 자신을 찾아온 남편을 따라가다가 다시 남편의 의지 부족 혹은 미필적 고의에 의해 지옥으로 돌아가는 비운의 운명이었는데 영화는 이 남성 위주 서사를 전복시킨 것이다.
에우리디케가 된 엘로이즈는 스스로 소멸되는 것을 택하고 오르페우스로 남은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그리워한다. 만약 두 사람이 지옥에서 다시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엘로이즈는 자신의 해석대로 마리안느와 자발적인 이별을 할까? 마리안느는 이를 대비해 미리 그림을 그려두었다. 영화 후반부에 한 미술관에서 그녀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출품한 오르페우스 그림이 그것이다. 그림 속에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있다. 이는 엘로이즈가 말한 배려의 사랑을 마리안느가 뒤늦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는 증거다.
이 도발적이고 그러면서도 놀라울 만큼 차분한 영화를 만든 감독 셀린 시아마는 10대 여성들의 다양한 첫경험을 그린 데뷔작 ‘워터 릴리즈’, 남자 같은 10살 소녀가 여자 아이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톰보이’, 자유를 갈망하는 흑인 여고생을 다룬 ‘걸후드’ 등 줄곧 여성 영화를 만들어온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프랑스 영화계에서 젠더 평등을 주장하는 ‘5050 운동’을 이끌고 있기도 하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시아마의 다섯 번째 영화다. 영화에 남자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18세기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러닝타임 2시간을 가득 채운다. 여성화가에겐 소재가 제약돼 유령화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마리안느의 직업적 한계, 낙태를 선택한 소피의 고난, 귀족이면서도 꽉 막힌 삶을 사는 엘로이즈,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에게 찾아온 사랑의 해방감 등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차분하지만 급진적인 여성영화. 감정의 미세한 떨림까지 전달되는 마지막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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