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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깨어나서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고 알아차리게 될 것만 같다. 모든 장비가 다 부서지고, 케이터링 트럭이 불에 타고 난 울부짖는 그런 상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지금 모든 것이 완벽하고 난 매우 행복하다."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후보 지명을 받은 지난 13일 봉준호 감독이 밝힌 소감은 매우 영화적이다. 학창 시절부터 ‘씨네키드’로 ‘아카데미 O개 부문 노미네이트’라는 광고 카피가 적힌 미국 명작을 거듭 관람하며 영화감독을 꿈꾼 봉 감독이기에 그의 소감이 더 감격적으로 다가온다. ‘기생충’은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미술상, 국제영화상(옛 외국어영화상) 등 무려 6개 부문에서 후보 지명을 받았다.
2019년 10월 8일 뉴욕의 한 스크리닝 룸에서 포즈를 취한 봉준호 감독
3000만명이 시청하는 아카데미 시상식
아카데미 영화상은 연말부터 시작되는 할리우드 한해 결산의 대미를 장식하는데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리는 시상식은 3천만명가량 시청하며(아카데미 영화상의 절정은 ‘타이타닉’이 휩쓴 1998년으로 이때 시청자 수는 5500만명이었다) 수상자들은 평생 ‘아카데미 위너’로 불리고 몸값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 지난 91년 역사를 감안하면 최근 아카데미 영화상의 기세는 비록 절정기에는 못 미치지만 여전히 세계 영화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압도적이다. 프랑스 칸영화제가 그해 출품된 비개봉작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카데미 영화상은 훨씬 더 심사 범위가 넓고 경쟁도 치열하다.
그동안 한국영화는 1962년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외국어영화상 한국영화 대표로 첫 출품한 이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춘향뎐'(2000) '오아시스'(2002)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왕의 남자'(2006) '밀양'(2007) '마더'(2009) '피에타'(2012) ‘사도’(2015) '택시운전사'(2017) '버닝'(2018) 등이 문을 두드렸지만 한 번도 후보작 지명의 문턱을 넘지 못해왔다.
‘기생충’은 칸영화제 만장일치 황금종려상이라는 영예를 등에 업고 수많은 영미권영화들 틈바구니에서 비영어권 영화로는 유일하게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훗날 한국영화 역사의 자랑스런 한 페이지가 될 것이 확실하다.
제77회 골든글로브에서 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영화 '기생충'의 배우 송강호, 봉준호 감독, 곽신애 대표, 배우 이정은, 한진원 작가(왼쪽부터). /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칸 황금종려상과 오스카 작품상 동시 수상 가능할까
‘기생충’이 한국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후보에 오르면서 수상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아카데미의 꽃인 작품상을 받는다면 유럽 최고 영화상에 이어 미국 최고 영화상까지 휩쓰는 셈이라 ‘기생충’은 명실상부 전세계에서 인정한 ‘2019년의 영화’가 된다. 지금까지 칸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에 받은 영화는 델버트 만 감독의 미국 멜로영화 ‘마티’(1955)가 유일하다.
오스카 트로피의 주인공은 할리우드 전현직 영화인들로 구성된 9000여명의 아카데미 위원들의 투표로 결정되는데 영화사들은 위원들을 향해 온갖 구애 작전을 펼친다. 경쟁작에 대한 치열한 눈치작전이 대통령 선거에 버금갈 정도다. 선거전이 매년 과열돼 올해 아카데미는 이례적으로 시상식을 앞당겨 2월 9일(현지시간) 시상식을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통상 아카데미 시상식은 2월 말 혹은 3월 초에 열려왔다. 후보 지명부터 시상식까지의 기간을 6주에서 4주로 좁혀 아카데미 위원들이 투표에 집중하도록 돕겠다는 것이 이유다.
지난 13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아카데미 박물관에서 한국계 배우 존 조(왼쪽)가 제92회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 ‘기생충’을 발표하고 있다. / 사진=오스카 공식 홈페이지 영상 캡처
기생충은 작품상 후보에 오른 역대 두 번째 아시아 영화
아카데미 91년 역사에서 비영어권 영화가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은 총 10차례에 불과하다(일본어 대사 100%인 미국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포함하면 11차례로 늘어난다). 이중 수상으로 이어진 것은 2012년 프랑스어 자막의 무성영화 ‘아티스트’가 유일하다. 유성영화 중엔 아직까지 수상작이 없다. 아시아 영화로 한정하면 ‘기생충’은 2001년 ‘와호장룡’에 이은 두 번째 작품상 후보작이다.
‘기생충’은 미국에서 열리는 각종 비평가협회상에서 미국영화들을 제치고 작품상을 휩쓸고 있다. 올해 아카데미는 후보작 발표 행사 사회를 한국계 배우 존 조와 세네갈계 배우 이사 레이에게 맡길 정도로 한국을 배려하고 있어 조짐도 좋다. 비영어권 영화 10편 중 4편이 21세기 영화라는 점에서 최근 들어 아카데미는 비영어권 영화에 더 문을 열고 있다. 만약 ‘기생충’이 작품상을 받는다면 보수적인 아카데미에 파격의 역사가 쓰여지게 된다.
2월 9일 열릴 시상식을 기다리면서 그동안 아카데미 작품상에 도전한 비영어권 영화들의 역사를 살펴보자.
1939년 제11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위대한 환상'
오스카 작품상 후보 첫 비영어권 영화는 프랑스 ‘위대한 환상’
비영어권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것은 1939년 제1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초청된 프랑스 장 르누아르 감독의 전쟁 소재 영화 '위대한 환상'(1937)이 처음이다. 시상식은 그해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2월 열렸다. 1939년은 ‘오스카’라는 단어가 아카데미의 별칭으로 공식 사용된 첫 해이기도 하다.
‘위대한 환상’은 아카데미 시상식 이전 뉴욕비평가협회상 등 각종 시상식에선 외국어영화상을 석권했다. 당시 아카데미엔 외국어영화상 부문이 없었기에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외국어영화상 부문은 1947년 신설됐다).
영화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가 탈출하려는 프랑스 군인들을 그렸다. 유럽 국가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전쟁은 헛된 환상일 뿐이라고 비판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휴머니즘적 관점으로 독일군을 선하게 그렸다는 이유로 프랑스에선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재평가받아 현대에도 ‘세계영화 걸작 100선’을 꼽을 때 늘 상위권에 위치하는 영화다.
‘위대한 환상’은 작품상 수상에 실패했다. 작품상은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 스타일 로맨틱 코미디 '우리들의 낙원'(1938)이 받았다.
1970년 제42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수상작 'Z'
1970년 프랑스-알제리 정치 스릴러 ‘Z’
두 번째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비영어권 영화를 만나려면 ‘위대한 환상’에서 31년을 더 지나야 한다. 전후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새로운 영화실험에서 비롯된 황금기가 있었지만 아카데미는 철저히 미국만의 행사를 고집했다.
1970년 프랑스와 알제리 합작영화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정치 스릴러 'Z'(1969)가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편집상, 외국어영화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유럽 영화를 외면하던 아카데미가 ‘Z’를 작품상 후보로 선택한 배경에는 이 영화의 메시지가 미국이 추구하는 국제질서와 맥을 같이 한다는 이유도 있다. 군부 독재정권 그리스에서 민주 진영 정치인의 암살을 둘러싼 음모를 그린 영화 ‘Z’는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실화 바탕 정치 영화들의 효시가 됐다.
‘Z’는 편집상과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작품상은 존 슐레진저 감독의 ‘미드나잇 카우보이’(1969)가 받았다.
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이민자들'
1973~1974년 두 편의 스웨덴 영화
1973년과 1974년엔 두 편의 스웨덴 영화가 연달아 작품상 후보에 올랐다.
얀 트로엘 감독의 '이민자들'(1971)은 1972년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른데 이어 이듬해인 1973년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색상 후보에 올랐다. 한 영화가 2년 연속 아카데미 후보가 된 이유는 미국 개봉이 1년 늦었기 때문이다.
‘이민자들’은 19세기 중반 미국으로 이민 간 스웨덴 이민자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영화로 막스 폰 시도우, 리브 울만 등 스웨덴 명배우가 총출동하는 3시간 11분짜리 대작이다.
영화는 2년 동안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음에도 한 개의 트로피도 받지 못했다. 1973년 작품상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대부’(1972)가 차지했다.
1974년 제46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오른 '외침과 속삭임'
1974년엔 스웨덴 거장 잉마르 베르이만 감독의 19세기 시대극 '외침과 속삭임'(1972)이 작품상, 감독상, 촬영상, 음악상, 의상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특이하게도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영화는 세 자매의 내면의식을 섬세하게 묘사해 영상 미학에서 탁월한 성취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는 베르이만 감독 최고 걸작 중 하나다. 촬영감독 스벤 니크비스트가 촬영상을 받았다. 작품상 수상작은 조지 로이 힐 감독의 ‘스팅’(1973)이었다.
1995년 제67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일 포스티노'
1995, 1999년 이탈리아 영화 두 편
다시 20년을 건너뛰어야 비영어권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를 볼 수 있다. 1980년대 컬러TV가 보급되면서 할리우드는 특수효과를 기반으로 한 대작을 양산하며 차별화했고 미국영화 축제인 아카데미는 자막이 필요한 비영어권 영화에 문을 열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이탈리아 영화 두 편이 아카데미의 높은 벽을 살짝 허물었다. 1995년 미카엘 라드포드 감독의 '일 포스티노'(1994)와 1999년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인생은 아름다워’(1997)가 주인공이다. 두 편 모두 정치적인 소재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휴머니즘 기반의 접근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50년대 이탈리아의 작은 섬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 관한 따뜻한 드라마인 '일 포스티노'는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는 못 올랐지만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색상, 음악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작곡가 루이스 바칼로프가 음악상을 수상했다. 작품상은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포레스트 검프’(1994)가 받았다.
1999년 '인생은 아름다워'로 제71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
나치 점령기 이탈리아 가족의 비극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인생은 아름다워'(1997)는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편집상, 음악상, 외국어영화상 등 7개 부문 후보에 올라 남우주연상, 음악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베니니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 위해 무대에 올라갈 때 객석 의자에 올라 번쩍 손을 들어올린 장면은 오스카 명장면 중 하나로 손꼽힌다. 작품상은 존 매든 감독의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가 받았다.
2001년 '와호장룡'으로 제73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이안 감독
2001년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른 ‘와호장룡’
비영어권 영화 중 아카데미 역사상 최다 부문 후보에 오르고 최다 부문 수상한 영화는 이안 감독의 중국, 대만, 홍콩, 미국 합작영화 '와호장룡'(2000)이다. 18세기 청나라를 배경으로 장대한 무협을 선보인 영화는 북미에서 1억3천만달러의 수입을 올려 비영어권 영화 최대 흥행작에 등극했고 이 기록은 19년이 지난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선악구도가 뚜렷해 다소 경직돼 보이는 기존 중국 무협영화와 달리 자유분방한 인물들이 펼치는 보편적인 드라마와 신비롭고 아름다운 와이어 액션이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2000년대 초반은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영화들이 약진해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가 새롭게 조명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와호장룡’은 2001년 제73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음악상, 의상상, 미술상, 편집상, 음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촬영상, 음악상, 미술상, 외국어영화상 등 4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작품상은 리들리 스코트 감독의 ‘글래디에이터’(2000)가 받았다.
2007년 제79회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 후보에 오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007년 일본어 미국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2007년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일본어로 만들어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국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음향편집상 등 4개 부문 후보에 올라 음향편집상을 수상했다. 일본 배우들이 일본어 대사를 하는 영화지만 미국 자본이 투입된 미국영화다. 이런 애매한 상황을 고려한 때문인지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다. 작품상은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디파티드’(2006)가 받았다.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아티스트'의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왼쪽 세번째)과 배우들
2012년 프랑스 무성영화 ‘아티스트’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선 미셸 아자나비시우스 감독이 만든 프랑스 영화 ‘아티스트’(2011)가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의상상 등 5개의 트로피를 받았다. 무성영화이기 때문에 완전한 비영어권 영화로 분류하기엔 애매하지만 영화 속 자막은 프랑스어로 등장한다.
2013년 '아무르'로 제85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미카엘 하네케 감독
2013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아무르’
2013년 오스트리아 출신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프랑스어로 만든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 합작영화 '아무르'(2012)가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등 5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아무르’ 역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라는 점에서 ‘기생충’과 비슷한 면이 있다.
80대 노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는 장루이 트랭티낭과 엠마뉘엘 리바 두 베테랑 노배우의 명연기로 차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그려 호평받았다.
‘아무르’는 외국어영화상만을 수상했다. 작품상은 벤 애플렉 감독의 ‘아르고’(2012)가 받아 이변을 연출했다.
2019년 '로마'로 제91회 아카데미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
2019년 넷플릭스 제작 멕시코 영화 ‘로마’
2019년 멕시코 출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스페인어로 만든 영화 ‘로마’가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본상, 촬영상, 미술상, 음향상, 음향편집상, 외국어영화상 등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와호장룡’과 타이 기록을 세웠다.
영화는 1970년대 멕시코시티 중심가의 로마를 배경으로 중산층 가정에 거주하는 하녀를 둘러싼 이야기를 그렸다. 쿠아론 감독이 자신을 키워준 가정부를 향해 보낸 자전적인 러브레터이기도 한 영화는 여성 인물들에 대한 섬세한 감정 묘사와 미학적 성취로 극찬받았다.
‘로마’는 감독상, 촬영상, 외국어영화상 등 3개의 트로피를 가져갔다. 작품상은 피터 패럴리 감독의 ‘그린북’(2018)이 받았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20/01/27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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