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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영화 <파수꾼>에 비견될 만한 장편 애니메이션의 걸작 <돼지의 왕>. 연상호라는 감독이 서른 네살에 홀로 이 모든 작업을 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다. 거칠고 냉소적이고 차갑지만 비수를 꽂는 듯 날카로운 애니메이션.


2. 배경은 학교라는 계급사회. 전복을 꿈꿨으나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버린 돼지들. 남을 위해 스스로를 살찌우는 돼지처럼, 그들은 맞설 용기도 없고 무시해버릴 자만심도 없다. 그저 뒤에 숨어서 세상이 바뀌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



3.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교실 내 모습은 80,90년대에 학교를 다녔던 남성들이 떠올리는 학창시절과 아주 흡사하다. 단순히 괴롭히고 괴롭힘 당하고의 구도 뿐만 아니라 이쪽저쪽으로 동조하는 친구들, 어차피 쟤네들은 졸업하면 안볼 사람이라며 애써 무시하려는 친구들까지. 영화를 보는 남성들은 분명 스스로 네 부류 중 하나였던 자신을 돌아볼 것이다. 단지 그 정도로 심했냐 아니냐의 문제였을 뿐. 결국 그런 우리의 모습이 지금의 우리 사회를 만들었다. 계급사회 꼭대기의 소수가 지배하고, 누군가는 처절하게 당하고, 누군가는 기회주의적으로 처신하고, 대다수는 방관한다. 특히 대사에 굉장한 리얼리티가 있는데 예를 들어 "쟤는 주위가 너무 산만해" "니들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하는거야" "학교 분위기 망치지 마라" 등 군대인지 학교인지 헛갈릴 대사들이 난무하는데 가슴이 시릴 정도로 사실적이다.



4. 영화는 15년이 지난 후 황경민과 정종석이 학창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지금의 시점에서 그 시절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때의 비겁했거나 혹은 괴물 같았던 자신의 행동이 15년 후인 지금 정종석의 나레이션으로 회상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때 허세 완장을 차며 세상을 다가진 듯 행동했던 아이들은 15년 후의 모습이 나오지 않는 반면, 그때 괴롭힘 당하던 두 친구들은 학창시절을 마치 판도라의 상자처럼 감금해놓은 채 살아왔다는 게 밝혀진다. 학교와 군대 시절에 가해자였거나 혹은 피해자였던 기억을 나중에 아름다운 한때였다는 무용담으로 술안주로 꺼내놓는 사람들. 영화는 그 사람들에게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5. 돼지들이 꿈꾸는 체제 전복은 성공할 수 있을까? 자신들을 구원해줄 메시아적 존재인 김철을 따르던 황경민과 정종석. 하지만 그들은 새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고 무서운 현실에 굴복하고 김철을 고발하거나 등떠밀어 배신할 수 있는 유약한 하층민이었다. 김철 역시 메시아라기 보다는 악당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악인이 되고 더 나아가 괴물이 되고자 하는 또하나의 돼지의 왕일 뿐이었다. 영화는 시대상황을 반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15년 후의 정종석이 황경민의 추락을 목격하고 좌절하는 모습이 노무현의 이미지와 참 닮아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6.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다. 유년기의 김철, 황경민, 정종석은 모두 여배우(김혜나, 박희보본, 김꽃비)가 성우를 맡고 있다. 감독은 변성기 이전의 어린 소년의 목소리를 염두에 두었다지만 거친 중학생을 그리기에는 약간 싱크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괴물이 되어버린 김철의 이미지에 김혜나의 깨끗한 목소리는 어색하다. 하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도이기도 하다. 충분히 어린 남자 배우를 쓸 수도 있었을텐데도 불구하고 여배우의 목소리를 캐스팅한 것은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지배-피지배의 구도와도 관계가 있다. 여배우가 목소리를 맡은 캐릭터는 영화 속에서 모두 피지배 계급에 속하는 아이들이다. 현실에서의 남성-여성의 불편한 계급적 관계가 은연중에 캐릭터에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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