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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세의 피오나 메이(에마 톰슨)는 영국 고등법원 가정부 판사다. 밤새 고심해 샴쌍둥이를 분리하라는 판결을 내렸는데 사람들은 그녀를 살인자라며 손가락질한다. 한 아이라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지만 언론은 그녀가 한 아이를 죽이라는 판결을 내렸다며 비판한다.
영화의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는 앞으로 메이에게 닥칠 일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장고 끝에 어떤 결정을 내리지만 그 결과는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것으로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사건은 전화 벨소리처럼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살인자라는 손가락질에 의기소침할 시간도 잠시, 메이는 계속해서 법정에 들어가 판결을 해야 한다. 일중독자인 아내를 보다 못한 남편은 메이에게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겠다는 선전포고를 한다. 하지만 메이는 남편과 말다툼할 여유조차 없다. 주말을 반납하고 판결문 작성에 매달려야 한다. 그때 긴급한 전화가 걸려온다. 수혈을 받아야 하는 소년이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 신자라는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이는 즉시 재판 일정을 잡고 병원과 환자 측에 통고한다.
1989년 제정된 영국의 아동법(The Children Act: 어린이들이 가족의 품에서 보호받아야 하며 만약 가족이 법에 비협조적일 경우 아이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내용)에 따라 판사들은 법적 미성년자인 소년에게 병원이 수혈을 강제 집행하라고 판결해왔다. 하지만 메이는 순교를 불사하겠다며 완강하게 버티는 소년의 부모를 보며 즉석 제안을 한다. "제가 직접 소년을 만나보고 나서 판결하겠습니다."
아마도 샴쌍둥이 판결로 의도와 달리 살인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은 상처 때문이었을 것이다. 메이는 소년이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병원을 찾아 애덤(핀 화이트헤드)을 만난다. 준비되지 않았던 이 만남은 그러나 애덤뿐만 아니라 메이의 인생마저 뒤흔들어 놓는다. 애덤은 메이를 윤리적 딜레마에 빠뜨리고 메이는 애덤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영국 연극무대에서 연출가와 극작가로 잔뼈가 굵은 리차드 에어 감독이 영국문학의 거장 이안 매큐언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로 만든 '칠드런 액트'는 중년 여성 판사의 흔들리는 마음을 세심하게 담아낸 수작이다. 훌륭한 평판을 유지하며 살아온 메이는 법복을 입고 있을 땐 스스로에게 한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명망가다. 존경받는 직업, 피아노 치며 공연하는 취미생활, 자상한 남편에 귀여운 조카들까지 겉으로 드러난 그녀의 인생은 아주 순탄해 보인다. 정재계 파티에서 그녀는 화려한 '인싸'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하지만 법정 뒤 그녀의 일상은 불안함의 연속이다. 그녀는 일에 파묻혀 정작 자기자신을 돌보지 못한다. 동료 판사가 때때로 그녀에게 썰렁한 농담을 던지지만 그녀는 받아줄 여유가 없다. 거울에 비친 주름살 팬 얼굴은 체념을 익숙한 습관으로 만든다. 왜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느냐며 불만을 토로하는 남편과도 굳이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남편이 외도 선언을 하고 집을 나가자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마음 한구석이 공허해진 순간 애덤의 불덩이 같은 열정이 그녀의 마음 속 빈 자리를 파고든다.
메이의 눈에 비친 애덤은 아주 특별한 소년이다. 죽기를 각오할 만큼 신념에 가득 찬 표정 뒤엔 때묻지 않은 순수한 열정과 재능이 감춰져 있다. 메이는 애덤의 장점을 끄집어내 준다. 이는 분명 선의에 의한 것이었지만 애덤은 메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알게된 뒤 신앙에 쏟았던 맹목적 열정을 메이에게로 옮긴다. 메이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던 일이 애덤에겐 인생을 바꿀 사건이 됐다. 애덤은 메이에게 이렇게 하소연한다. "왜 제 인생에 개입해서 저를 흔들어 놓으셨나요?"
우리는 인생에서 때때로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마주한다. 어떤 선택은 의도와 전혀 달리 의외의 곳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 무방비 상태에 직면한 순간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가면을 벗는다. 공적인 삶과 개인의 삶 사이 괴리감이 클수록 자신의 진짜 모습을 마주하는 일은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쏟아지는 일과 불안정한 사생활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던 메이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애덤의 등장으로 인해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영화의 원작자이자 각본도 직접 쓴 매큐언은 '칠드런 액트'를 비롯해 '속죄' '암스테르담' '토요일' 등 의도와 다른 선택의 결과가 만들어내는 인생의 딜레마에 천착해 윤리의식에 대한 고정관념을 흔드는 날카로운 작품을 써왔다. 영화는 베테랑 배우 에마 톰슨과 '덩케르크'에서 깜짝 주연에 발탁된 뒤 라이징 스타로 떠오른 핀 화이트헤드의 열연에 힘입어 베스트셀러인 동명 소설의 먹먹한 느낌을 시각적으로 잘 살려냈다.
여성 판사를 주인공으로 한 흔치 않은 영화로 영국 법정의 뒷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영화만의 특징이다. 나이든 남자 서기 폴링(제이슨 왓킨스)이 메이에게 커피를 나르고 상사 눈치를 보느라 우왕좌왕하는 모습에는 성역할 전복에서 오는 쾌감도 따라붙는다.
칠드런 액트 ★★★☆
의도하지 않은 결과에 당황하는 중년 여성과 믿음이 깨져 방황하는 소년의 기이한 앙상블.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s://www.mk.co.kr/premium/life/view/2019/07/26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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