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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리디아나는 12세기 이탈리아 카톨릭 성인의 이름입니다. 그녀는 산티아고로 성지순례를 떠났다가 한 수도원에 정착했습니다. 평생을 독방에 갇혀 살다가 사후에 성인으로 추존됐습니다.


영화가 성인의 이름을 제목이자 주인공의 이름으로 택한 것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수녀가 되고 싶었던 여자, 평생 신에게 기도하고 싶었던 여자, 수녀원을 떠나고 싶지 않았던 여자, 성경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싶었던 여자가 반대로 '속세 순례'를 떠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반어법인 셈입니다.



영화는 비리디아나가 오래 간직해온 믿음이 깨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녀가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 없기 때문에 의지할 곳이 마땅히 없는 것도 한 이유였겠죠.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꿈꾸는, 모두가 잘 사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아름다운 세상은 현실에선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그런 세상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거장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1961년작 ‘비리디아나’는 1시간 30분 동안 비리디아나가 속세에서 겪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며칠 전 영국 BBC가 선정한 ‘비영어권 영화 100편’에서 48위를 차지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수도원을 나온 그녀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비리디아나(실비아 피날)는 정식 수녀가 되기 전 어느날 원장 수녀의 호출을 받습니다. 그녀의 삼촌 하이메(페르난도 레이)가 수녀원에 거액을 기부하고 있는데 조카를 집으로 초대했으니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그녀는 내키지 않았습니다. 삼촌이지만 한 번 본 것이 전부이니까요. 하지만 원장 수녀는 강압적이었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떠납니다.


비리디아나와 하이메의 첫 만남.

하이메의 부탁에 의해 웨딩드레스를 입어본 비리디아나.


하이메는 작은 마을의 영주입니다.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살고 있습니다. 그는 비리디아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합니다.


“너 숙모랑 많이 닮았구나.”

"큰 돈을 기부해주시고 수업료를 내준 것은 고맙지만 사실 전 삼촌을 잘 몰라요.”


이 대화에서 알 수 있듯이 비리디아나는 직설적인 사람입니다. 속내를 감출 줄 모르는 사람이고, 하고 싶은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이후에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꿈꾸는 대로 실행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하이메는 비리디아나가 배은망덕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꿈틀거리는 욕망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죽은 아내의 유품 중 하이힐을 신어보면서 비리디아나를 생각합니다. 급기야 그녀에게 아내의 웨딩드레스를 입어보게 하더니 청혼까지 합니다. 비리디아나는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인생에 더 이상 들어오지 마세요."


죽은 아내의 하이힐을 신어보는 하이메.


하지만 욕망에 눈이 먼 남자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녀 라모나(마가리타 로자노)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여자 대 여자로 말 좀 해달라고요. 도와주면 라모나와 그녀의 딸을 잘 돌봐주겠다면서요. 라모나는 승낙하고 비리디아나에게 삼촌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냉담해 하자 아예 커피에 수면제를 타버립니다.


하이메는 잠든 비리디아나를 안고 침실로 갑니다. 반듯하게 누운 아름다운 그녀를 바라보며 망설입니다. 결국 본능을 이기지 못하고 조카의 옷을 벗기려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닙니다. 포기하고 돌아선 그는 다음날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합니다.


비리디아나를 겁탈하려는 하이메.


여기까지가 영화의 전반부입니다. 이 영화는 비리디아나가 겪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돼 있습니다. 전반부는 감독의 유작인 ‘욕망의 모호한 대상’(1977)과 유사하게 보입니다. 한 부르주아가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갈망하다가 파멸하는 스토리가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두 영화가 만들어진 16년 동안 ‘부르주아/남성의 위선’이라는 브뉘엘의 관심사는 바뀌지 않았나 봅니다.


아쉬운 점은 영화의 주인공은 비리디아나이지만 정작 비리디아나에 대한 심리 묘사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대상으로만 대하고 있습니다. 남자들의 대상, 모순된 세상의 대상, 기독교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비리디아나는 가련한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감정이입하기 힘듭니다. 이는 브뉘엘의 관심사가 그녀보다는 그녀를 둘러싼 세상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계속 이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이면서도 자꾸만 관심에서 멀어지는 그녀가 안쓰러웠습니다.


이제 영화의 후반부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비리디아나’에서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이 후반부 때문에 영화는 스페인에서 상영금지 됐습니다.


비리디아나와 호르헤의 첫 만남.


자살한 삼촌은 재산 절반을 비리디아나에게 남겼고, 나머지 절반은 혼외 사생아인 호르헤(프란시스코 라발)에게 남겼습니다. 호르헤는 여자 친구와 함께 하이메의 유산을 받기 위해 찾아옵니다. 이제 영화는 하이메와 비리디아나의 대립 구도에서 호르헤와 비리디아나의 구도로 바뀝니다. 두 사람의 구도는 좀더 복잡합니다.


비리디아나는 수녀원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새롭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삼촌이 자신에게 준 막대한 유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녀원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실질적으로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그녀는 믿습니다.


노숙자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비리디아나.

노숙자들과 농장을 함께 일구려는 비리디아나.


비리디아나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숙자들, 거지들, 장애인들을 불러 모아 삼촌이 남긴 저택 별장으로 초대합니다. 그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고, 적성에 맞는 일거리를 줍니다. 또 다 함께 모여 농장을 일구자고 제안합니다.


호르헤는 그녀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잘 되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는 고통받는 개를 돈을 주고 사버리는 남자입니다.



이쯤에서 눈치 챌 수 있듯이, 비리디아나가 집단분배와 집단노동의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면 호르헤는 자본주의를 상징합니다. 비리디아나는 호르헤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하지만 호르헤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결국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품 안에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영화도 그렇습니다. 이 영화가 1961년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때 감독이 공산주의의 종언을 이야기한 것은 대단히 시니컬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등장할 차례입니다. 비리디아나와 호르헤가 유산 상속 문제를 처리하러 시내로 외출한 사이 부랑자들은 집 안에서 파티를 벌입니다. 할렐루야를 틀어놓고 춤을 추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고, 난교를 벌입니다. 바티칸에 의해 신성모독이라는 평가를 받은 문제의 그 장면입니다.


지금 다시 보면 이 장면이 왜 문제가 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카톨릭의 기준으로는 파격적이었나 봅니다. 뭐든 시대가 허용하는 기준이 있고 그걸 넘어서게 되면 혁신가가 되거나 혹은 핍박을 받게 되는 법이죠. 브뉘엘은 언제나 선동가였고, 혁신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칭찬과 비난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이때 비난을 뚫고 전진하는 자가 결국 예술가로 이름을 남깁니다.


'최후의 만찬' 구도로 음식을 탐하는 노숙자들.


영화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요? 비리디아나와 호르헤는 당초 예정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집이 엉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합니다. 그러자 부랑자들이 떠나는데 이때 두 남자가 남습니다. 그중 한 명은 비리디아나를 겁탈하려 합니다. 구해주려던 호르헤는 다른 남자에게 뒤통수를 맞고 쓰러집니다.


전반부에 이어 비리디아나는 또 한 번 강간당할 위기에 놓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호르헤는 꾀를 냅니다. 부랑자 중 한 명을 돈으로 매수해 강간범을 죽이게 한 것입니다.


비리디아나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꿨지만, 그 이상을 파괴한 것은 또다시 인간의 본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 비리디아나를 구한 것은 결국 돈이었습니다.


노숙자에게 겁탈 당하기 직전의 비리디아나.


비리디아나는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여자였지만, 그녀의 믿음은 그가 사랑을 쏟았던 사람들에 의해 배반당했습니다. 그녀는 노숙자들을 평등하게 대했지만, 걸인들은 나병 환자(혹은 하지정맥류 환자)를 내쫓으면서 자기들끼리 차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부르면서도 그녀가 없을 때 집을 망가뜨린 것도 모자라 강간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성경 속 예수는 나병 환자를 치료하고, 오른쪽 뺨을 때리는 이에게 왼쪽 뺨을 대주고, 자신을 배반한 제자를 용서한다고 했지만, 비리디아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는 성인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을 배반하는 믿음으로는 더 이상 살 수 없습니다.


머리카락을 푼 비리디아나.


영화의 엔딩은 굉장히 뜻밖이고 또 파격적입니다. 시간이 흐른 후 비리디아나는 호르헤를 찾아갑니다. 감싸고 있던 베일을 풀어서 찰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자유로워진 그녀의 마음 상태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호르헤는 그녀를 집으로 들이는데 집 안에는 라모나가 있습니다. 삼촌의 하녀가 어느새 호르헤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죠. 호르헤는 비리디아나에게 카드 게임을 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지. 결국 나와 카드놀이를 하게 될 거라고.”


자본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듯한 이 마지막 대사는 굉장히 상징적이면서 또 의미심장합니다.


비리디아나에게 카드 게임을 제안하는 호르헤.


당초 영화가 처음 완성됐을 때는 이런 엔딩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비리디아나가 호르헤의 방으로 들어가 천천히 문을 닫는 것을 카메라가 그녀의 뒤에서 지켜보는 것이 마지막 장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페인 검열당국이 엔딩을 문제 삼자 브뉘엘 감독은 아예 더 파격적인 엔딩으로 바꿔 버립니다. 세 명이 카드 게임을 하는 이 장면은 쓰리섬까지 떠올리게 합니다. 두 번의 겁탈당한 위기를 넘긴 비리디아나의 인생이 예측할 수 없게 변해버린 것이죠.


영화는 1961년 칸 영화제에 출품돼 황금종려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에는 당시 프랑코 독재정권 치하였던 스페인의 영화 검열에도 불구하고 창작 의욕을 꺾지 않은 루이스 브뉘엘 감독을 응원하려는 영화제의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브뉘엘 감독은 그동안 멕시코에서 활동하다가 20년 만에 스페인으로 돌아와 영화를 만들었는데 첫 작품부터 이처럼 공산주의와 기독교에 대한 냉소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이 영화는 상영금지 처분을 받아 개봉을 못하다가 프랑코 사후인 1977년에야 개봉할 수 있었습니다. 브뉘엘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든 뒤 박해 받는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와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브뉘엘이 만든 영화들은 이 영화처럼 풍자극도 있고, 범죄극, 서부극, 뮤지컬, 멜로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습니다. 그런데 브뉘엘이 대단한 것은 어떤 영화를 봐도 한 눈에 이것이 브뉘엘 영화라는 것을 알아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만의 색깔이 분명하다는 것이죠. 존 휴스턴도 잉마르 베르이만도 “브뉘엘은 언제나 브뉘엘 영화를 만든다”고 할 정도로 그의 독창성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영화는 아방가르드적이고 시니컬하고 어떤 우상도 파괴해 버립니다. 이러한 브뉘엘만의 분명한 특징이 그를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남게 해준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브뉘엘이 세상에 대한 자신의 냉소를 표현하기 위해 만든 여자인 비리디아나(영화는 베니토 페레스 갈도스의 소설 ‘할마(Halma)’를 원작으로 하지만 원작과 많이 다릅니다)의 속세 순례는 그녀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12세기 성녀 비리디아나가 아닙니다. 두 번의 시련을 거친 비리디아나는 앞으로 이상주의에 빠져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호르헤, 라모나와 함께 카드 게임을 하기 위해 자리에 앉습니다. 도박이 상징하는 자본주의는 그녀에게 새로운 도전입니다.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비리디아나 ★★★☆

시니컬한 브뉘엘. 지나치게 분명한 상징은 그러나 요즘 시선에선 올드하다.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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