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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배는 헌 벽지를 뜯어내고 새 벽지로 집을 단장하는 행위다. 새 벽지를 바르면 옛 흔적은 보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꼼꼼하게 바르지 않은 벽지는 금세 갈라지거나 울어난다. 그러면 거기 과거 집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인테리어 도배업자인 성철(최무성)과 그의 아내이자 동업자인 미숙(김여진)은 아들 은찬을 잃고 괴로워하고 있다. 은찬은 학교 친구 기현(성유빈)을 구하려다가 물에서 나오지 못했다. 의사자로 인정받고 보상금도 받게 됐지만 성철과 미숙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하다. 성철은 잘 마무리된 거라며 아내를 위로해 보지만, 미숙은 북받혀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다. 두 사람은 다시 아기를 갖기 위해 인공수정을 시도해 보지만 마음 한 구석의 빈 자리는 채울 길이 없다.
성철은 아들이 목숨 바쳐 구했다는 기현을 찾아가본다. 어떤 아이인지 궁금해서였을 것이다. 구할 만한 아이였는지 아닌지 내심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들 몫만큼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기현은 학교를 그만 두고 치킨집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대화를 나눠보니 아빠는 집을 나갔고 엄마는 기현을 방치해놓고 있었다. 성철은 오갈 곳 없는 기현에게 마음이 쓰인다. 그래서 도배 일을 배워보라고 권한다. 남편이 아이를 조수로 고용한 것을 안 미숙은 당황하지만 그녀 역시 성철처럼 기현에게 점점 마음을 연다. 기현 역시 조심스럽게 이들 부부에게 다가간다.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물에 빠져 죽은 아이의 유가족과 살아남은 아이가 함께 도배 일을 한다. 의뢰인의 집이 깨끗해질수록 세 사람이 간직한 서로 다른 상처들도 아물어간다. 모처럼 웃는 순간도 생긴다. 세 사람이 함께 있으면 가족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영화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은찬의 빈 자리를 기현이 완벽하게 메꿔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복에 죄책감을 느낀 기현이 은찬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털어놓으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한 아이의 죽음 뒤에 남겨진 자들이 그 죽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세 사람은 상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또 죽은 아이에게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도배’라는 직업은 세 사람의 노력을 상징하듯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노력의 절정은 기현이 그날 일을 고백한 것이다. 이 지극히 윤리적인 태도로부터 두 번째 드라마와 새로운 질문이 시작된다. 완벽하게 마무리된 줄 알았던 죽음 뒤에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진실을 밝혀낼 것인지 묻어둘 것인지, 만약 밝혀내기로 했다면 얼마나 최선을 다할 것인지, 혹은 묻어두기로 했다면 그 책임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영화는 수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누구도 그 상황이 되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용서는 결코 다짐으로 되는 일이 아니고, 감정은 결코 자유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유가족이고, 누군가의 죽음 덕분에 살아남은 자들이지만, 대부분 그 자명한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그래서 죽음은 나에게는 닥쳐오지 않을 남의 일이라고 단정해 버리고, 너무나도 쉽게 당위적인 판단을 해버린다. 하지만 나의 피해가 당신의 권리에 우선한다는 강력한 억울함이 마음을 지배할 때 윤리적 태도는 무너진다. 감정은 상대적이어서 슬픔에도 크기가 있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억울한 자의 몫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껏 유지해온 흐름과 결이 조금 다르다. 포인트 벽지를 붙인 것처럼 톤이 변한다. 영화는 아이가 물에 빠져 죽은 뒤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에서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결말 부분은 신동석 감독이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드러내고 싶었던 폭발하는 감정을 담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이 엔딩은 대단히 모험적이다. 은찬이 죽은 상황과 비슷한 상황을 설정해 갈등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너져가는 마음을 도배로 새단장했지만 벽지가 찢어지는 바람에 황폐해진 마음이 드러나버린 유사 가족. 이들은 노력했지만 그 노력은 보상받지 못했다. 앞으로 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이들의 재결합을 바랄 수도, 바라지 않을 수도 없는 애매한 지점에서 영화는 답을 주지 않고 끝난다. 남은 것은 숨턱까지 차오른 각자의 슬픔 뿐이다.
살아남은 아이 ★★★★
찢어진 벽지 같은 슬픔. 용서는 마음만으로 되지 않는다.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3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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