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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수입배급사가 한 영화의 재개봉을 놓고 갈등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한 배급사는 영화에 묘사된 살인사건 묘사 때문에 그 사건의 모티프가 된 사건 피해자의 유족과 법적 분쟁에 휘말렸습니다.
두 사건은 분명 별개의 사안입니다만 그동안 문제시되던 것들이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한꺼번에 터져버린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이고 누구의 책임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영화 '암수살인'
‘암수살인’ 피해자 명예훼손 공방
[사건개요]
9월 13일 영화 ‘암수살인’이 언론에 공개된 뒤 영화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모티프가 된 2007년 부산 살인사건의 유가족이 9월 20일 서울중앙지법에 영화 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법원은 10월 1일 이를 판결할 예정입니다. 영화는 3일 개봉예정이지만 판결 결과에 따라 개봉을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사(제작사 필름295와 배급사 쇼박스) 측은 제작 과정에서 유가족에게 동의를 구하는데 소홀했다고 밝혔습니다. 유가족 측은 영화가 다 만들어진 뒤인 지난 8월 영화의 홍보 자료를 보고 영화가 해당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유가족 측은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영화 속에 똑같이 그 사건이 묘사되고 피해자 신분이 그대로 나와서 유족들에게 상처를 줬다”는 입장입니다. 영화사 측은 뒤늦게 “유가족 동의를 구하는 과정에서 부족했던 부분이 있었다”며 사과했지만 유가족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누구 잘못인가]
한국에서 영화의 명예훼손 사건은 2010년 대법원이 판결한 '실미도 사건'을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판결은 창작의 자유를 폭넓게 해석해 보장하고 있습니다. 즉, 영화가 허위의 사실을 적시해 개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도 그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상업영화는 의도적 악의만 없다면 상업적 흥행을 위해 역사적 사실을 각색할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일반 관객 역시 모든 내용이 실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영화를 관람한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판례에서 보면 법원은 유가족 측의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기각할 확률이 높습니다.
‘암수살인’과 경우는 다르지만 미국에서 최근 벌어진 영화 속 명예훼손 관련 소송의 경우에도 법원은 모두 영화사 측 표현의 자유 주장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하나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2014년작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에서 조던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회사 동료 니키 코스코프의 실제 모델이라고 주장하는 앤드류 그린이 제기한 소송이었고, 또 하나는 캐스린 비글로우 감독의 2008년작 ‘허트 로커’의 실제 인물인 이라크전 참전 베테랑 제프리 사버 병장이 제기한 소송이었습니다. 전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법정에 서는 등 우여곡절 끝에 앤드류 그린이 영화 속 인물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없다는 판결이 나왔고, 후자는 수년 동안 9번에 걸친 순회 끝에 기각됐습니다. 두 영화 모두 법정에서 이기긴 했지만 금전과 시간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평판도 잃었습니다.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에단 수플레가 연기한 닉키 코스코프. 앤드류 그린은 코스코프라는 인물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다.
법이 영화 속 표현의 자유를 인정하는 이유는 영화가 그만큼 대중에게 순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기능이란 공공의 이익입니다. ‘표현의 자유’라는 표현에서 보듯 영화를 언론과 같은 미디어의 하나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권력의 압박에 굴복해 영화를 만들지 못하는 사태를 막기 위한 것이죠.
하지만 ‘암수살인’의 경우에는 법적인 책임이 아무리 면제되더라도 도의적 책임마저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영화사 측은 유가족 측의 피해자의 인격권, 명예권 침해 주장에 대응해 “묻지 마 범죄는 빈번하게 발생하는 범죄 유형이므로 이를 재구성하는 것은 창작의 자유”라고 맞섰는데 만약 그것이 흔한 묻지 마 범죄의 한 유형을 그린 것이었다면 굳이 디테일에서까지 2007년 부산 사건을 떠올리게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 사건을 묘사했다면 당연히 유가족에게 동의를 구했어야 합니다.
영화 '암수살인'
미국 영화학교에서는 역사 속 사건에 관한 영화를 만들 때 사건 당사자가 영웅이든 악당이든 그의 친척까지 조사해 고소당할 가능성이 없는지를 미리 파악하라고 가르칩니다. 만약 당사자를 찾게 되면 허락을 받고 반드시 사례비를 제공하라고까지 말합니다. 허락이 필요 없는 경우는 아주 오래전에 죽은 사람 뿐입니다. 실화에 기초한 영화들은 관객이 명백히 그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살짝 바꾸는데 이 역시 훗날 고소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영화는 파급력이 큰 매체이기 때문에 창작 과정에서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창작의 자유를 누려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창작은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고, 또 언제든 고소당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행위라는 것을 무엇보다 창작자들이 명심해야 합니다. 정당한 비판으로 인해 권력자에게 당한 고소는 명예가 될 수 있겠지만, 그밖의 고소는 명백히 불찰이고 낭비죠. 최근 ‘김광석’ ‘더 플랜’ 같은 영화들이 표현의 자유를 누리며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틀린 것으로 밝혀진 내용으로 인해 비판받았던 것을 상기해 보세요. ‘표현의 자유’는 그것을 인정할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만 대중의 응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영화 '청설'
‘청설’ 진진 vs 오드 갈등
[사건개요]
장애인 소녀와 비장애인 소년의 첫사랑을 그린 대만영화 ‘청설’(2009)은 2010년 개봉 당시 큰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네티즌 사이 입소문이 퍼지면서 제2의 ‘플립’이 될 수 있다는 기대에 수입배급사들끼리 경쟁이 붙었습니다. 영화사 진진이 먼저 대만 영화사 트리아그램과 재개봉을 위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영화사 오드(AUD)가 이후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고, 트리아그램은 진진과 계약을 해지하고 오드와 계약해버렸습니다.
2016년 10월 국내 수입배급사끼리 과당경쟁 방지를 위해 설립된 영화수입배급사협회는 올해 10월 영화 ‘청설’ 재개봉을 앞두고 9월 28일 오드에 개봉 철회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습니다. 영화가 이중계약되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진진은 수입배급사협회에 소속되어 있지만 오드는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수입배급사협회는 진진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겠죠. 해당 영화가 이중 계약인지 아닌지 여부에 대해서는 진진과 오드 사이에 이견이 있습니다. 진진은 적법하게 계약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고, 오드는 저작권자에게 확인해보니 진진과의 계약이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그래서 지난 7월 20일 최종 계약했다고 주장합니다.
[누구 잘못인가]
진진과 오드 모두 그동안 좋은 외국영화를 한국에 소개해온 수입사입니다. 진진은 ‘블루 발렌타인’, ‘문라이즈 킹덤’, ‘프랭크’, ‘나, 다니엘 블레이크’, ‘걸어도 걸어도’ 등을 국내에 소개했고, 오드는 '킬링 디어', '모어 댄 블루', '안녕, 나의 소녀', '플로리다 프로젝트', '아이 앰 히스 레저', '내 사랑', '언노운 걸' 등을 들여왔습니다. 영화 고르는 눈이 어느 수입사보다 탁월한 두 회사 사이에 갈등이 벌어져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갈등은 아직 법적인 단계까지 간 것은 아닙니다.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 들어간 것은 아니고 진진 측에서 오드에게 상영금지를 요구한 것이어서 원만한 해법을 찾을 시간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영화 '청설'
1차적인 책임은 대만 영화사 트리아그램에 있을 것입니다. 이미 진진과 계약을 했으면서도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진진과 계약을 취소하고 오드와 계약을 해버렸으니까요. 앞으로 어떤 수입사가 트리아그램과의 거래를 믿을 수 있을까요. 2차적인 책임은 (현재까지 보도된 내용을 종합하면) 진진에게 있는 듯합니다. 대만회사가 상도의에 어긋나게 계약을 해지해버렸다면 이는 대만회사에게 문제 제기할 일이지 영화를 가로채간 오드의 사업을 막을 사안은 아닙니다. 3차적인 잘못은 과당경쟁을 벌인 오드에게 있습니다. 대만회사가 비상식적인 일을 하는데 그걸 알고서도 웃돈을 주고 판권을 사와서 갈등을 자초했으니까요.
이번 사건의 원인은 결국 수입사의 과당경쟁입니다. 제살 깎아먹기식 경쟁에 수입사들은 한때 자정 의지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이 사건은 자정기능에 허점이 있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 허점을 막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청설’이 과연 과열경쟁을 벌일 만한 영화인지 의문이네요. 영화수입이라는 게 도박 같은 면이 있어서 언제 뭐가 터질지 모른다지만 왜 굳이 이 영화가 타깃이 되었을까요?
제 해석에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정보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향후 사건의 전개를 보면서 이 글을 업데이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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