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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체제에 대한 비판으로 영화가 시작한다고 솔직하게 밝히고 촬영 허가를 받았습니다. 몰래 카메라가 아니라 진짜 카메라를 들고 북한 영화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습니다. 서양에서 북한 영화산업에 접근한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사례입니다.”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개봉을 맞아 한국을 찾은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은 10일 오전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0일 오전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안나 브로이노스키 감독이 김정일의 영화연출서를 들어보이며 연출의도를 설명하고 있다.


영화는 호주의 영화감독 안나가 대규모 탄층가스 채굴사업에 반대하는 내용의 영화를 북한의 선전영화 기법으로 찍기 위해 직접 북한을 찾는 내용을 그린 코믹 다큐멘터리다. 북한의 영화인들을 만나 교류하는 과정이 블랙코미디 방식으로 그려진다.


“처음엔 북한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 못했어요. 그래서 남한에서 탈북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프로젝트를 진행했죠. 2년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북에서) 허가가 나서 찾아갔더니 박정주, 리관암 같은 북한의 유명 감독들이 영화를 가르쳐주겠다고 했어요.”



영화에서 안나는 21일 동안 방북해 원로 영화감독 박정주와 우정을 쌓고, 리관암 감독이 연출 중인 영화 촬영 현장에 찾아가 직접 단역 배우로 출연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지난 1968년 나포해 대동강변에 전시된 것으로 알려진 푸에블로호도 스크린에 공개된다.


“저도 처음엔 북한을 독재 정권, ‘악의 축’ 같은 이미지로만 생각했어요. 하지만 북한 영화인을 만나면서 영화라는 공통점을 갖고 가족처럼 교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느꼈어요. 이 영화를 만들 때도 혹시나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게 하려고 조심했어요. 영화가 공개된 후 그들 모두 무사히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어서 다행이에요.”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 출연한 북한 공훈예술가 박정주 감독 / 사진제공=독포레스트


영화 속에서 박정주 감독은 안나에게 고전 할리우드 영화 예찬을 늘어놓고 좋아하는 미국 영화로 '쉰들러 리스트' 등을 꼽기도 한다. 또 옛 조선, 일본, 중국뿐만 아니라 6.25전쟁 이전 서울 거리 등을 재현해 놓은 대형 세트가 있는 평양의 조선예술영화촬영소를 방문해 북한 영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간접체험한다.


안나는 영화 편집 과정에서 초기에 촬영했던 탈북자 인터뷰를 모두 버려야 했다. 북한이 탈북자들과 한 영화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다. 또 유명배우 윤수경의 인터뷰 장면에서 가슴에 부착한 배지 속 김정일 얼굴이 대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도 지적당했는데 결국 이 문제는 후반작업 때 컴퓨터그래픽으로 처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영화 속에는 조선인민군4.25예술영화촬영소 등 북한의 영화 관련 시설이 대부분 포함돼 있지만 딱 한 곳 북한이 보여주기를 꺼려한 곳이 있다.


“영화 제작소를 찍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디지털이 아닌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아직까지 영화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듯했어요. 제가 갖고 간 소니 디지털 카메라에 대해서도 많이 물어보더라고요. 21일 동안 저를 따라다니면서 찍지 말아야 할 곳을 지정해주고, 앵글을 통제한 사람이 있었어요.”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에서 '북한의 올리버 스톤'이라 불리는 리관암 감독의 영화 촬영 현장에 간 안나 / 사진제공=독포레스트


북한 영화인들은 안나에게 어떻게 해야 진실하게 보이도록 촬영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데 이 과정에서 리관암 감독은 연기가 미흡한 배우에게 한 바퀴 뛰고 오라고 시키는 등 촬영 현장이 수직적 명령 관계로 이루어져 있음이 드러난다. 김정일의 영화연출서에 명시돼 있는 것처럼 북한에서 영화감독은 왕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안나는 김정일이 직접 쓴 영화연출서를 바탕으로 북한의 선전영화를 정의하는데 이에 따르면 북한영화의 특징은 대지주 자본가 등 악당에 맞선 노동자의 대결 구도(이때 여성이 주연인 경우도 많다), 감동적인 연설, 봉기, 승리한 노동자들이 춤추고 노래하는 엔딩 등으로 이루어진다. 안나는 이러한 기법들을 활용해 가스채굴 반대 선전영화 ‘가드너’를 만드는데 이 단편은 영화 말미에 삽입되어 있다.



주체사상과 선전영화 기법을 배워오겠다는 영화의 의도가 짓궂은 장난처럼 보이다가도 안나가 호주인 배우들을 데리고 진지하게 촬영에 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그 속에서 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서구인 안나의 시선으로 베일에 가려졌던 북한 사회를 엿본다. 영화 속에 비친 북한 영화계는 1950~60년대 어디쯤에서 시간이 멈춘 듯하고 그 모습이 신기함과 동시에 가끔 웃음을 자아낸다. 하지만 호주인 안나와 달리 한국인 관객 입장에선 분명 웃음을 유도한 장면에서도 마냥 웃을 수만은 없어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의 한 장면 / 사진제공=독포레스트


안나라는 한 개인의 집요한 호기심이 빚어낸 영화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는 올해 들어 찾아온 남북한 평화무드로 인해 수월하게 개봉할 수 있었다. 우리에게 조금씩 친숙하게 다가오고 있는 북한 사회와 북한 영화계에 호기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일람을 권한다. 북한 영화인들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 서양인들이 북한에 대해 느끼는 감정 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조금 마음을 열어놓고 극장을 찾으면 꽤 이색적인 세상을 보게 될 것이다.


안나 평양에서 영화를 배우다 ★★★

마음을 열고 보면 이색적인 블랙코미디



Youchang
저널리스트.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세상에 없던 생각]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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