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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예진(36)이 지금껏 영화와 드라마에서 맡아온 배역 이름이다. 열여덟살 때인 2000년 영화 ‘비밀’로 데뷔한 손예진은 ‘소예진’이라는 별명처럼 쉴 틈 없이 매년 작품을 남겼다. 지난 18년 동안 21편의 영화와 9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는데 영화 ‘비밀’(목소리 출연)과 ‘취화선’을 제외한 28편에서 주연급 배역을 맡았다. 단순 계산으로 1년에 1.5편. 작품당 촬영에 소요되는 기간과 무대인사 및 홍보에 나서는 시간을 감안하면 거의 매순간 현장에 있었던 셈이다.



18년간 30편이라는 기록은 동시대의 배우들 중에서도 압도적이다. 작품을 양으로만 따질 수는 없겠지만, 최고의 남자배우 중 한 명인 송강호의 경우 22년 동안 영화 28편(주연급 24편)에 출연했고, 송혜교는 22년간 27편(드라마 18편, 영화 9편 중 주연급 18편)에 출연했다.


영화 21편 중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 흥행 실패작은 '외출'(67만명),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95만명), '나쁜놈은 죽는다', '비밀은 없다'(25만명) 등 4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소위 '대박' 작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200만~300만명을 불러 모으며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타워'(518만명), '해적: 바다로 간 산적'(866만명), '덕혜옹주'(559만명) 3편뿐이다).


손예진의 출연작을 연기의 결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보면, 첫 주연을 맡은 ‘맛있는 청혼’(2001)부터 ‘연애시대’(2006)까지 로맨스 위주로 연기력을 다진 시기, ‘무방비도시’(2007)부터 ‘공범’(2013)까지 연기 변신을 꾀한 시기,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이후 지금까지 연기력에 물이 오른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손예진이 지금껏 출연해온 작품의 장르는 드라마, 사극, 로맨틱 코미디, 멜로, 범죄, 액션, 스릴러 등 다양하다. 필모그래피가 쌓인만큼 손예진은 계속 성장해왔고, 또 성장하고 있다. 중간중간 쉬어가는 작품도 있었지만, 느슨해질 때마다 모험적인 시도를 했고, 매번 작품에 매진하는 모습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언젠가부터 손예진 기사에는 ‘믿고 보는 배우’라는 댓글이 따라붙는다. 데뷔 이래 끈질기게 따라붙던 악성 댓글도 이젠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손예진은 안티를 팬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엄청나게 파격적인 변신보다는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선택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온 것이 아마도 롱런의 비결일 것이다.


30편의 출연작 중 지금의 손예진을 만든 대표작 다섯 편을 꼽아봤다. 기준은 화제성과 연기력이다.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많은 배우이기에 이 리스트는 앞으로 계속 늘어나기를 기대한다.



클래식 (2003)


“그때는 전혀 몰랐어요. 15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제일 많이 이야기하시는 영화가 ‘클래식’인 거예요.”


‘협상’ 개봉을 앞두고 만난 손예진에게 ‘클래식’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손예진은 영화 ‘클래식’ 촬영 당시를 아무 것도 몰랐던 시기로 회상한다.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른 채 열정만으로 촬영에 몰두했던 시기,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자신의 분량에만 집중하기에도 벅찬 시절이었다.


좀처럼 자신의 영화를 다시 보지 않는 손예진은 개봉 15년을 맞아 ‘클래식’을 다시 보게 됐는데 영화 속 대사들이 너무 낯간지럽게 느껴졌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물두 살의 그녀가 갖고 있던 풋풋함과 순수함을 재발견하게 돼 반가웠다고.


‘클래식’은 첫 사랑을 이야기할 때마다 소환되는 영화다. ‘건축학개론’ ‘너의 결혼식’ 등의 원조격으로 손예진은 배수지와 박보영 이전에 오랫동안 첫 사랑의 아이콘이었다. 이 영화에 함께 출연한 조승우와 조인성 모두 나란히 톱스타로 발돋움했다.



연애시대 (2006)


이혼한 뒤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커플을 그린 드라마 ‘연애시대’는 첫 사랑의 아이콘 손예진이 사랑의 아픔을 지닌 여성을 리얼하게 연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여름향기’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작업의 정석’ 등 그전까지 출연해온 팬시한 작품들과 전혀 달리, 땅에 발 딛고 사는 이혼 여성의 고민을 담아내 호평받았다.


‘연애시대’ 이후 손예진은 단지 예쁘기만 한 배우를 넘어 연기 잘 하는 배우의 입지를 갖게 된다.


일본 원작을 각색해 절반쯤 사전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골수팬이 많다. 특히 드라마 속 명대사와 명장면은 오랫동안 회자되며 사랑받고 있다.


“사랑은 여러가지 이유로 시작된다. 어떤 사랑은 뜻밖이고, 어떤 사랑은 오해에서 시작되고, 어떤 사랑은 언제 시작됐는지 모르기도 한다. 사랑은 언제 끝나는 걸까?”

“어디서부터가 사랑일까? 걱정되고 보고 싶은 마음부터가 사랑일까? 잠을 설칠 정도로 생각이 난다면.. 그건 사랑일까?”

"사랑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시작할 때는 두려움과 희망이 뒤엉켜 아프고 시작한 뒤에는 그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알고 싶어서 부대끼고 사랑이 끝날 땐 끝같지 않아서 상처 받는다."



아내가 결혼했다 (2008)


“그전까지 로맨스물의 여성 캐릭터는 여리기만 했는데 ‘아내가 결혼했다’에선 도발적인 연기를 해야 했어요. 장르를 배신하는 느낌이랄까요. 이 영화를 하고 나서 배우로서 자신감을 갖게 됐어요.”


손예진은 지난 2월 에스콰이어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손예진이 연기한 주인아는 도발적이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고 온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별을 따달래 달을 따달래, 그냥 남편 하나 더 갖겠다는 것뿐이잖아.”


손예진이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장착한 무기는 사랑스러운 애교와 완벽한 자기관리다. 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을 말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영화는 손예진의 매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그래서 당시 댓글 중엔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허락하는 남편을 이해 못하겠다면서도 아내가 손예진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평이 많았다. 손예진에게 최초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안겨준 작품이다.


영화는 사랑을 강제하는 결혼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독점 다자연애인 ‘폴리아모리’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사랑에 유효기간이 있어 상대방을 속이는 불륜이 만연한 것보다는 차라리 다자연애가 낫지 않으냐는 것이다. 최근 ‘비혼’이 늘어난 시대에 재평가받고 있는 영화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 (2014)


손예진은 아직까지 필모그래피에 ‘천만영화’를 갖고 있지 않다. 그녀의 최고 히트작은 ‘해적: 바다로 간 산적’으로 866만명을 동원했다.


‘해적’ 이후 손예진의 팬층은 더 다양해졌다. 첫 블록버스터 ‘타워’에서보다 더 능동적이고 코믹한 배역으로 손예진은 아이들에게까지도 넓은 인지도를 확보했다.



‘무방비도시’의 소매치기 등 이 영화 전에 액션 연기를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해적’의 두목 여월은 본격적인 무술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손예진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녀는 해적이 되기 위해 와이어 액션과 검술을 익혀야 했다. 당시 고현웅 무술감독은 “쉬지 않고 무술 스태프를 힘들게 한 노력파 배우”라고 말했다.


최근 손예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못다한 액션 연기에 대한 욕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언젠가 머리카락을 완전히 짧게 자르고 ‘킬빌’의 우마 서먼 같은 액션을 해보고 싶어요. 지금까지 다른 옷들을 입어왔지만, 아직 해보지 않은 배역에 대한 설레임이 있거든요.”



비밀은 없다 (2016)


“친한 동료들도 제가 그렇게 대사를 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폭발하듯 감정을 토해내는 게 시원했어요. 저도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나 봐요.”


손예진이 ‘비밀은 없다’에서 맡은 배역은 무려 중학생 딸이 있는 국회의원 후보의 아내 연홍이었다. 그녀는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아내가 결혼했다’에 이어 또다시 김주혁과 부부로 호흡을 맞췄지만 이번엔 로맨스보다는 적에 가깝다. 영화에서 손예진은 눈이 충혈돼 정신이 반쯤 나가 있거나 혹은 정신 똑바로 차리기 위해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있다.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모성애와 복수심이다.


‘비밀은 없다’는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손예진의 강렬한 연기를 볼 수 있는 영화다.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거나 분을 삯이다가 폭발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과연 지금까지 이런 표정을 어떻게 감춰왔나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평단의 호평에 비해 관객의 외면을 받아 가장 저평가된 작품으로 꼽힌다.


영화 '협상'


손예진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다. 멜로의 여왕으로서 손예진과 다른 장르에서의 손예진이다. 욕심 많은 그녀는 영리하게도 두 토끼를 살살 몰아가며 달리고 있다. 올해 출연한 세 작품 중 두 편은 전자의 모습이고 한 편은 후자의 모습이다.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와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서 손예진은 나이 들어도 멜로의 여왕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강유정 영화평론가는 “손예진은 여배우가 50·60대가 돼도 로맨스와 멜로를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배우”라고 말했다.


19일 개봉한 영화 '협상'에서 손예진은 뜨거운 가슴을 지닌 경찰 협상가로 분해 지금까지와 또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우리가 알던 멜로의 여왕 이미지를 역이용해 악당으로 분한 현빈과 '밀당'을 벌이기도 한다. 그녀는 자신의 연기 목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인생에서 쓸 수 있는 에너지가 정해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더 많이 보여드리기 위해 더 많이 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오랫동안 배우생활을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관객이) 지루해하지 않게, 손예진의 이런 모습은 어떨까 새로운 궁금증을 계속 유발하는 배우가 되어야겠죠.”


2000년 영화계에 데뷔한 이래 18년 동안 30편에 출연했지만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많다고 말하는 배우, 손예진의 필모그래피가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궁금하다.


◆손예진 필모그래피

[영화] 협상, 지금 만나러 갑니다(2018), 덕혜옹주, 비밀은 없다(2016), 나쁜놈은 죽는다(2015),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공범(2013), 타워(2012), 오싹한 연애(2011), 백야행: 하얀 어둠 속을 걷다(2009), 아내가 결혼했다(2008), 무방비도시(2007), 천년여우 여우비(2006), 외출, 작업의 정석(2005),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클래식(2003), 연애소설, 취화선(2002), 비밀(2000)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2018), 상어(2013), 개인의 취향(2010), 스포트라이트(2008), 연애시대(2006), 여름향기(2003), 대망(2002), 선희진희, 맛있는청혼(2001)



*매일경제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premium.mk.co.kr/view.php?no=23524



Youchang
저널리스트. [세상에 없던 생각] [스쳐가는 모든것들 사이에서 버텨가는]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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