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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불안한가 봐요. 급변하는 사회에서 업데이트를 안 하면 도태되기 쉬우니까요. 헬스장 안 가고도 혼자서 윗몸 일으키기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게 잘 안 되잖아요. 신체 관리를 위해 헬스장 가듯 지적인 자기관리를 위해 트레바리를 찾는 게 아닐까요?"
회원 10명으로 시작한 북클럽이 3년 만에 3000명으로 늘었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3시간 동안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시즌에 4번 만나 4권을 읽는다. 클럽마다 15~20명 정도가 참가한다. 김상헌 전 네이버 대표,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한옥 전문가 황두진 건축가 등 저명인사가 클럽장이 되어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회비는 클럽장이 있는 모임은 29만원, 클럽장이 없는 모임은 19만원이다.
"어떻게 보면 부담스러운 금액이지만 이 정도 금액을 받으면 저희 크루(직원)에게 대우도 잘 해주면서 멋진 서비스를 만들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북클럽 '트레바리' 윤수영 대표(30)의 말이다. 서울 압구정에서 시작한 트레바리는 안국에 이어 최근 성수에 세 번째 아지트를 열었다. 기자가 지난 10일 찾은 안국 아지트는 새로 지은 건물의 2층과 3층, 그리고 지하 1층에 층마다 서너 개의 넓은 토론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크루들은 저녁에 있을 모임 준비에 한창이었다.
책 판매량이 급감하고 오래된 서점이 문을 닫는 시대, 트레바리가 핫한 북클럽으로 뜨는 현상은 역설적이다. 사람들은 꽤 부담스런 금액을 척척 내고 낯선 사람들과 책을 함께 읽으러 온다.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것은 책 그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서가 아니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 아닐까?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헬스클럽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생각을 사업으로 실행해 옮긴 곳이 바로 트레바리다. 최근 트레바리가 인기를 얻으면서 비슷한 북클럽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대학 다닐 때부터 5년 동안 북클럽을 해왔어요. 팔수록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업을 하고 싶은데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가 제가 가장 잘 아는 분야로 해보자고 생각했죠. 독서모임을 저처럼 열심히 한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창업 전 윤 대표는 다음카카오에서 모바일 콘텐츠를 기획하는 신입사원이었다. 그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해보자는 마음으로 1년 만에 회사를 그만 두고 트레바리를 차렸다.
"너무너무 의미 있고 오래오래 지속될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냥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 많이 멋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사업을 3년째 하다 보니 정글에서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만 그때 마음가짐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윤 대표가 말한 너무너무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게 무엇일까? 마침 복도에 '세상을 더 지적으로, 사람들을 더 친하게'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윤 대표는 이 말이 트레바리의 지향점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보통 집과 회사를 오가면서 무미건조하게 살잖아요. 인간관계는 혈연, 지연, 학연, 직장 등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죠. 독서모임에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오기 때문에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책을 읽었거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문장에 꽂혀 있는 사람을 만나게 돼요. 그러면 나의 세계관도 넓어지죠."
트레바리가 인기를 끌던 초기엔 토론보다는 사교의 장으로 변질될 우려 같은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윤 대표는 이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독서모임은 사교의 장이 맞죠. 사람들이 친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목적으로 왔건 트레바리에선 최소 한 달에 한 권의 책을 읽고 무조건 독후감을 쓰고 책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야 해요. 저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본질은 혈연, 지연 등이 아니라 가치관, 관심사, 취향이라고 생각해요. 트레바리에선 내가 흥미로워 하는 주제의 책을 읽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 본질적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만날 확률이 높아요. 그래서 토론이 끝나고 뒤풀이를 하면서 기어이 뜨는 해를 보는 클럽도 있어요."
지난 10일 트레바리 안국 아지트에서 크루들이 책에 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윤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트레바리에서 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하나의 재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책을 추천하고 추천받지만, 트레바리에서 좋은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다. 같은 책을 전혀 다르게 읽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모임은 더 알차게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레바리는 사람들의 지적 열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런데 트레바리는 무슨 뜻일까? 인터뷰를 마치며 윤 대표에게 물어봤다.
"트레바리는 매사에 트집잡기 좋아하는 사람을 뜻하는 순우리말이에요. 저는 우리 사회가 말을 잘 듣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많은 사회라고 생각해요. 자신만의 생각이 없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트레바리에선 남들의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고, 그것이 일반적인 통념과 달라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지은 사명입니다."
(매일경제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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