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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태어난지 3일 만에 부산시청 앞에 버려졌다. 그의 옆에는 ‘신성호’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가 놓여 있었다. 보육원을 거쳐 9개월 만에 벨기에로 입양됐다. 그가 새로 얻게 된 이름은 드니 성호 얀센스. 벨기에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살게 된 그는 운동 선생님인 아버지와 가정적인 어머니의 외동아들로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8세에 아버지의 권유로 기타를 배웠다. 14세에 기타에 두각을 나타내며 벨기에 ‘영 탤런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이후 프랑스 파리 고등사범음악원과 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기타를 배웠고, 29세이던 2004년 유럽 콘서트홀협회 ‘떠오르는 스타’로 선정돼 이듬해 뉴욕 카네기홀에서 공연했다.
©Youchang
부모님은 돈, 명성, 성공을 위해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정직, 성실하게 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는 상업적 성공보다는 예술적인 성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클래식 기타를 연주하고 있지만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다닌다. 아티스트로서 연주 뿐만 아니라 젊은 클래식 아티스트를 발굴하는 프로듀싱도 한다. 한국에서 그는 인순이와 공연했고, 평창 동계올림픽 VIP 실내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벨기에와 한국을 3개월마다 오가며 활동하고 있는 드니 성호는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양부모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친부모를 찾기 위해 그동안 여러 차례 부산을 찾았다. 지난 2008년 한 방송에 출연해 “나를 버린 것을 창피해할 필요 없다. 나는 괜찮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친부모 모두 행복했으면 한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 그는 마흔이 넘어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후 한 달여 만에 다시 한국을 찾은 그를 4월 9일 충무로 코쿤홀에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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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나?
A. 20여개국에서 온 정상들과 글로벌 CEO 300여명을 위한 만찬에서 연주할 음악을 총괄하는 음악감독 역할이었다. 그들이 전부 다른 요구를 해서 굉장히 복잡했다. 하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평창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한국과 세계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을 원해 나를 선택한 것 같다. 중국과 북한도 참여하니까 선곡에 공을 들여야 했다. 처음에는 대곡으로 시작했고 마지막에는 아이들의 합창으로 마무리했다. 중간에 팝스타가 나왔다. 올림픽 분위기에 맞는 선곡이었다.
Q. 각국 정상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
A. 중국, 북한 대표, 독일의 슈뢰더, 반기문 등 각국의 정상급 인사들을 눈으로 보기만 했지 그들과 따로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인사 정도만 했다.
Q. 클래식 기타에 빠지게 된 계기는?
A. 7살 때 처음 기타를 접했다. 원래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었는데 가족이 기타를 권했다. 음악을 잘 모르기 때문에 기타가 좋아보여서 그냥 권한 것이다. 나는 처음 접한 기타의 물성이 좋았다. 부드럽고 드라마틱하고 섬세하다. 육체적인 관계와 비슷하다.
Q. 기타가 인생이 될 거라고 언제 예감했나?
A. 매순간 그랬다. 어렸을 때도 밤낮으로 기타를 연습했다. 기타가 내 피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100% 아니 300%(웃음).
Q. 다른 직업을 생각해본 적은 없나?
A. 내 인생에도 업 앤 다운이 있었다. 조금 잘 해서 올라가면 곧바로 아래에서 후배들이 치고 올라온다. 뮤지션으로 사는 인생은 정말 힘들다. 1~2년 동안 인생이 완전히 무너진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버텼다. 나는 음악에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Q. 뮤지션으로 어떤 점이 힘든가?
A. 돈이다. 20세~35세 사이에는 돈을 많이 벌었다. 한 달에 1000만원~1500만원씩 벌었다. 하지만 밥 먹고 술 마시는 데 다 썼다. 35세 이후에 커리어가 내려가면서 저축해 놓은 돈이 없으니 힘들더라. 뛰어난 피아니스트인 마르타 아르헤리치도 그런 말을 한다. 재능 있는 젊은 뮤지션들이 재정적으로 너무 힘들어 한다고. 그런데 이 길을 선택한 이상 뭐 방법이 없다. 다행히 지금은 저축한다. (한국인) 아내가 나보다 재정 관리를 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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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기타리스트에겐 기타가 친구 같겠다.
A. 내 절친이다. 나의 기타를 만든 토마스 험프리는 유명한 기타 제작자인데 59세에 돌아가셨다. 그는 생전 1년에 10~15개의 기타만 만들었다. 나에게 정말 특별한 악기다. (기타를 꺼내보이며) 내 여자친구다. 힘이 넘치고 아주 예민하다. 날씨가 안 좋으면 침울해진다. 진짜 여자 같다. 몸통은 캐나다 소나무로 만들었다. 이젠 구할 수 없는 나무다. 목부분은 밤나무로 만들었다. 지금 14살이다. 14년째 우린 사랑하는 사이다(웃음).
Q. 6년 전 인순이와 공연이 화제였다.
A. 인순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였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몰랐다. 소개를 받고 내 콘서트에 초청해 2번의 공연을 함께 했다. 정말 환상적이었다.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다. 10대처럼 춤을 추더라.
Q. 또 함께 공연하고 싶은 뮤지션이 있나?
A. 젊은 사람들과 하고 싶다. 엑소와 하고 싶다. ‘유니버스’라는 노래 정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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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어릴 때 벨기에로 입양됐다. 친부모를 아직 못 찾았다고 들었다.
A. 누구에게나 인생의 힘든 면이 있다. 당신에게도 힘든 부분이 있을 것이다. 친부모를 아직 못 찾았다. 나의 친부모를 찾는 건 중요하지만 이젠 그렇게 연연해하지는 않는다. 그게 인생 아닌가. 3개월 전에 어떤 분이 자신이 아버지일 수 있다며 언론사를 통해 연락해왔다. 하지만 혈액형이 맞지 않더라. 그분은 AB형이고 나는 O형이다.
Q. 벨기에 양부모님은 어떤 입장인가?
A. 처음엔 말 꺼내기가 참 어려웠다. 그분들은 저를 키워주셨다. 돈도 많이 들었을 거다. 성인이 돼서 떠나버리니까 뭔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벨기에는 작은 나라여서 비즈니스 기회가 많지 않다. 내가 한국과 벨기에를 오가며 일하는 것을 그분들도 이해해 주셨다. 세 달에 한 번 브뤼셀에 갈 때마다 부모님을 뵈러 간다. 시차 적응만 빼면 여기랑 똑같다(웃음).
Q. 뮤지션으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A. 무대에서 악기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을 느낄 때다. 솔로이스트 연주도 좋지만 콜라보레이션을 즐긴다. 팝 뮤직을 한다면 클래식 연주자와 협연할 때 서로 배울 수 있다. 지금은 일렉트로닉 음악이 너무 좋다. 다프트 펑크, 이소월을 좋아한다. 옛날에 연습할 땐 혼자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다. 최근에 런던에서 한 공연에선 19살 일렉트로닉 뮤지션과 공연했다. 그 친구에게 많이 배웠다. 그런 과정이 좋다.
Q. 드니 성호가 낯선 팬들에게 자신의 음악을 소개한다면?
A. 한국에서 첫 발매된 내 음반은 ‘Remembrance’(2011, Naxos)다. 아름답고 슬픈 음악이 담겼다. 아이튠즈에서 들을 수 있다. 일렉트로닉과 클래식이 합쳐졌다.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이다. 하지만 10년 후에는 어쩌면 클래식으로 복귀해 바흐를 연주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장르와 협연하는 게 좋다.
Q. 앞으로 활동 계획은?
A. 한국에서 공연을 하고 난 뒤 내년 11월에는 유럽 투어가 예정돼 있다. 5~6번은 벨기에, 3~4번은 프랑스에서 공연한다. 독일에서도 할 것 같다.
그는 이 날 자신이 직접 작곡한 연주곡 ‘Korean Mountain II(한국의 산)’와 ‘Morning Dew(아침 이슬)’를 직접 연주해 주었다. 음악에 인생을 바친 기타리스트의 회한이 묻어난 선율이 공연장에 울려퍼졌다.
드니 성호 (Denis Sungho Janssens)
- 1975년 부산 출생
- 한국계 벨기에 클래식 기타리스트
- 평창동계올림픽 VVIP 실내음악 감독
- 베이 엔터테인먼트 음악감독
- 14세 때 벨기에 영 탤런트 콩쿠르 우승
- 파리 고등사범음악원, 벨기에 브뤼셀 왕립음악원
- 2004년 유럽 콘서트홀협회 ‘떠오르는 스타’ 선정
- 2005년 뉴욕 카네기홀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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