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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동화 ‘소공녀’는 하루 아침에 하녀로 추락한 소녀 사라가 긍정의 힘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이야기였다. 사라의 무기는 상상력이었고 그녀는 자기 자신을 역경에 빠진 공주라고 생각했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이솜)는 가난해도 긍정적인 가사도우미라는 점에서 동화와 닮았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동화 속 사라가 키다리 아저씨 같은 죽은 아빠의 친구에 의해 구원받는다면, 영화 속 미소는 스스로 자기만의 삶을 찾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영어 제목을 보면 영화가 추구하는 바를 더 이해하기 쉽다. ‘Microhabitat’은 ‘미소서식처’를 뜻하는 말로 특정한 생물체나 미생물이 서식하는 국소지역을 의미한다. 주인공 이름인 미소 역시 여기서 가져왔을 확률이 높다.
(이 글에는 영화 후반부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가사도우미인 미소는 의뢰인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따뜻한 집밥을 만들며 살아간다. 일당 4만5천원을 받으면 그녀는 바에 들러 글렌피딕 위스키 한 잔을 마시고, 담배 한 갑을 산다. 남은 돈으로 세금, 월세, 약값을 낸다. 세금은 안낼 수 없고, 약은 먹지 않으면 머리가 하얗게 샌다. 담뱃값이 2천원 오르고 집주인이 월세를 5만원 올려달라고 하자 그녀는 고민한다. 수입은 그대로인데 내야 할 돈은 많아졌다. 위스키와 담배를 포기해야 하나 갈등하다가 그녀는 결심한다. 집을 포기하기로.
“난 집이 없는 게 아냐. 여행 중인 거야.”
미소는 이삿짐을 들고 예전 밴드 멤버들을 한 명씩 찾아간다. 베이스를 치던 문영(강진아)은 대기업에 취직해 점심시간에 주사를 맞을 정도로 바쁘게 일하고 있다. 키보드를 치던 현정(김국희)은 미소를 반갑게 맞아주지만 시부모와 남편 등쌀에 눈치가 보여 오래 있기 힘들다. 밴드의 막내 대용(이성욱)은 결혼한지 8개월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혼 위기에 몰려 있다. 심각한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는 그는 미소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보컬 록이(최덕문)의 부모님은 과잉친절로 미소를 부담스럽게 한다. 록이는 기어코 미소와 한 방에서 자겠다고 하더니 뜬금없이 결혼하자고 말하기까지 한다. 기타를 치던 정미(김재화)는 부잣집 사모님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남편 눈치 보느라 예전의 뜨겁던 모습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이처럼 ‘소공녀’는 인생의 우선순위가 집보다 위스키와 담배라는 확실한 취향에 있는 미소라는 독특한 여성이 그녀 또래 친구들의 일상을 방문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대기업 사원, 신혼부부, 화목한 가정, 부잣집 사모님 등 겉보기에 그럴 듯해 보인 친구들은 그러나 내면에 저마다의 슬픔을 갖고 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숨기며 살고 있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미소는 그들 모두에게 감사의 짧은 편지를 남김으로써 그들을 위로한다. 위로받아야 할 미소가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하는 아이러니는 약간의 과장과 함께 위트 있게 그려진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미소만 빼고 다섯 명의 밴드 멤버들이 만난다. 미소는 이들의 연결고리였지만 다함께로는 존재할 수 없는 여자다. 미소의 남자친구 한솔(안재홍)은 다른 친구들처럼 돈을 벌어 가난을 벗어나겠다는 이유로 미소를 떠난다. 모두들 비슷한 목적을 갖고 비슷하게 살고 있는 시대, 미소만이 유일하게 자신의 취향을 지키며 살아간다.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미소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집의 의뢰인 민지(조수향)와 대화를 나눌 때다. 민지는 “나 임신했어요. 그런데 아이 아빠가 누군지 몰라요. 나 헤픈 여자예요”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미소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이렇게 말한다. “헤픈 게 어때서요?”
미소는 그런 여자다.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여자, 타인의 사연에 공감해주는 여자,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강요하지 않는 여자, 아무리 가난해도 일상의 작은 행복을 포기하지 않는 여자,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사는 여자, 그래서 창밖으로 눈 내리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자다. ‘소공녀’는 자기만의 서식처에서 살고 있을 우리 시대 수많은 미소들에게 바치는 영화다.
소공녀 ★★★☆
자기만의 영역에 서식하며 소확행을 실천하는 희귀한 그녀. 위트로 차분하게 설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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